3. 假倭의 대두

고려말의 수탈과 압제의 대상이었던 계층 가운데에는 왜구가 침구하자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또는 경제적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왜구를 자칭하는 집단이 나타났으니 楊水尺·禾尺·才人 등의 이른 바 신분은 양신분이지만 역은 천역에 종사하는 자들로 이들을 ‘假倭’라고 부른다. 이들은 천인계층으로 지배층의 토지탈점과 가혹한 봉건적 수탈에 대해 민 들 가운데 가장 먼저 봉건정부에 반발한 것이다. 물론 대두하게 된 원인은 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닌 단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왜구의 잦은 출몰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문란해지자 왜구를 가장하여 도적 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 가왜문제를 가지고 연구자들은 그것이 왜구의 주체였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여 많은 논란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에는 왜구의 구성원 가운데 고려인도 많이 포함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045045 이를 비판한 최근의 논문으로는 이영,「高麗末期 倭寇構成員에 관한 考察」(『韓日關係史硏究』 5, 1996)이 참조된다.닫기 그러나 필자는 이런 문제보다는 왜 가왜가 당시 사회에 대두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왜냐하면 왜구의 적지 않은 숫자가 가왜였다고 하는 사실을 밝히려고만 매달릴 때에는 가왜가 고려 사회에서 기능한 면을 간과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왜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A ① 禾尺들이 무리 지어 모여 거짓 왜적으로 칭하고 寧海郡에 침구하여 불을 지르고 관청과 民戶를 약탈하니 판밀직 林成味, 동지 安沼, 밀직부사 皇甫琳, 전밀직부사 姜筮 등을 보내어 추격하여 잡았다. 임성미 등이 포로로 되었던 남녀 50여 명과 말 200여 필을 바쳤다. 그런데 화척이란 楊水尺을 가리킨다.046046 『高麗史』 권134, 신우 8년 4월.닫기
② 서해도 안렴사 李茂가 잡은 禾尺 30여 명과 말 100필을 바쳤다.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이 각기 잡은 화척을 巡軍獄에 가두고 이를 국문하여 그 首謀者만 죽이고 처자를 노비로 편입하고 말들을 몰수하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다. 도평의사사가 각 도의 안렴사에게 첩문을 보내 석방한 화척들을 각 주에 나누어 두고 平民에 비해 차등있게 역을 가하되 따르지 않는 자는 명하여 사형에 처하였다.047047 위와 같음.닫기
③ 交州·江陵道 禾尺·才人 등이 왜적으로 가장하여 平昌·原州·榮州·順興·橫川 등지를 약탈하였다. 원수 金立堅과 체찰사 崔公哲이 50여 인을 잡아죽이고 처자를 州郡에 나누어 두었다.048048 『高麗史』 권135, 신우 9년 6월.닫기
④ 禾尺과 才人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民租를 먹고 있으면서 恒産이 없으므로 恒心이 없이 산골짜기에 모여서 倭賊으로 가장하고 있으니 그 위세는 危懼할 바가 있으므로 빨리 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으로부터 거주지의 주와 군에서 그 가족을 조사하여 호적을 작성하고 유랑 또는 이주할 수 없게 하며 또 황무지를 주어서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에 근실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위반하는 자는 거주지의 관리들이 법에 의하여 처벌하도록 할 것입니다.049049 『高麗史』 권118, 열전 31 趙浚, 우왕 14년 8월.닫기

가왜에 대한 기록은 『高麗史』나 『高麗史節要』의 경우로 한정할 때 위의 기록이 전부이다. 물론 ②의 경우 화척이 가왜활동을 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① 기록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화척들이 가왜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기록이다. 위의 ①은 화척이 직접 가왜로서 집단화하여 관아와 민가를 약탈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음을 알려 주고, ②는 포로로 잡은 화척들의 처리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이 가는 점은 가왜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주모자만 처벌할 뿐 나머지 대다수는 석방하여 일반 백성과 같이 役을 주고 살게 하는 온건 정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③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을 포로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여 직접 토벌에 나서 처와 자식을 제외한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있다. 비록 10개월 차이가 있는 기사이긴 하지만 처음 가왜의 기록이 나타나는 우왕 8년 4월에는 가왜가 그리 극성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그들이 ③의 기록에서와 같이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약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④는 우왕 14년대의 기록으로 재인과 화척이 가왜로서 활동할 것을 염려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개혁세력의 핵심 인물의 하나인 趙浚이 전제개혁의 일환으로 올린 글이지만, 그가 이처럼 재인과 화척집단이 가왜로서의 활동을 염려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곧 당시는 특수 집단인 재인이나 화척이 직접 활동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가왜로 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그들의 流移를 금지하고 땅을 주어 토지에 귀속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재인이나 화척이 가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기록들이 참조된다.

B ① … 전에 李至榮이 朔州의 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楊水尺이 興化, 雲中道에 많이 모여 살았다. 이지영이 楊水尺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본래 賦役이 없으니 나의 기생 紫雲仙에게 예속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자운선이 그 이름을 적고 貢納을 끝까지 징수하였으므로 이지영이 죽고 최치원이 또 자운선을 첩으로 삼은 후에는 인구를 조사하여 공납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양수척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는데 거란 병이 침입하자 그들이 마주 나가 항복하고 길 안내까지 한 까닭에 적병이 산천, 요해지며 도로의 원근을 모조리 알았다.050050 『高麗史』 권129, 열전 42, 崔忠獻.닫기
② 신우 2년 7월 … 신우가 말하기를 사방에 도적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軍政은 오늘의 급한 일이다. … 上京의 大小 品官 및 그 子弟, 閑散·兩班·百姓· 여러 宮司 倉庫의 私奴僕·才人·禾尺·僧人, 鄕吏 가운데 활 쏘고 말 잘 달릴 줄 아는 사람을 골라서 그들에게 각각 무기, 겨울 옷, 군복, 그리고 2개월의 먹을 양식을 준비하여 대기하게 하면 事變이 나면 원수, 각 軍目, 도병마사들이 제 때에 모일 것이다.051051 『高麗史』 권81, 지35 병 1 병제, 신우 2년 7월.닫기
③ 대개 白丁을 혹은 禾尺·才人·韃韃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므로 국가에서 齊民하는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이라고 칭하여 옛 이름을 변경하고 軍伍에 소속하기 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었으나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디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그 동안 내려온 풍속이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모여 살면서 자기들끼리 혼인을 하는데, 혹은 소를 잡고, 동냥질을 하며, 도둑질도 합니다. 또 高麗 때에 거란이 來侵하니 가장 앞서 嚮道를 하였습니다. 또 假倭 노릇을 하면서 처음에는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까지 蔓延하여 장수를 보내 토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크고 작은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이 무리입니다. ···052052 『世祖實錄』 세조 2년 3월 정유.닫기

①의 기록은 고종대에 양수척들이 처음에는 국가로부터 직역이 없었으나 기생 자운선에게 귀속됨으로써 이동의 자유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오르고, 또한 공납을 심하게 내게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거란족이 침입하자 항복하고, 그들의 길 안내자가 되었으므로 거란병이 고려의 모든 주요 지형을 알았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종전에 없었던 직역의 부담으로 인해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②의 기록은 당시 왜구의 침구를 방어하기 위해 취한 병력동원책으로서 화척과 재인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계층 가운데 무예가 있는 자를 징집한 것이다. 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역의 편성과 공납에 불만을 가졌던 화척과 재인이 이제는 군역까지도 지게 이른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徵兵案은 더욱 강화되어 다음해인 우왕 3년에는 왜구가 종식될 때가지 아예 武藝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양반과 백성을 포함하여 성년 남자의 화척과 재인 모두를 징집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긴 자는 군법에 의하여 처벌받게 하였다.053053 『高麗史』 권81, 지35 병 1 병제, 신우 3년 12월.닫기
경작지도 없고 국가에 대한 부역도 가해지지 않았던 화척, 재인 등에 대하여 집단의 성년 남자가 군인으로 징집된다고 하는 것은 집단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항해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길이 바로 가왜로의 활동이었던 것이다.054054 이영, 앞의 논문, p.26.닫기 그렇지 않아도 천민집단으로 계급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화척, 재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가왜로 대두되었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들에게서 민족 내지 국가라는 의식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또한 봉건지배층에 항거하기 위해 가왜로서 활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③의 기록은 세조대의 집현전 대제학 양성지의 상소로 화척, 재인 등의 유래와 그들을 토벌하게 된 이유를 적고 있다. 이에 의하면 화척과 재인은 근원이 오래되고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거란의 향도가 되기도 하고 가왜로 활동하였는데 처음에는 강원도에서만 활동하였으나 후에 경상도까지 내려와 할 수 없이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곧 이들이 향도와 가왜로 변하게 된 이유를 그들만의 습속이기 때문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후대의 기록으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사하는 점은 적지 않다.
그러면 가왜는 우왕 8년과 9년에만 나타났을 뿐 다른 시기에는 없었는가 그리고 가왜집단이라고 하면 천민집단이었던 화척이나 재인 등으로만 구성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시기에 관하여는 『고려사』의 기록으로는 앞의 A ①·②·③의 기록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따라서 A ④나 B ③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가왜는 일시적이 현상이 아닌 왜구의 침구가 극렬하였을 적에 적지 않게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가왜의 구성원에 대하여는 아래의 기록이 참조된다.

① 판중추원사 李順蒙이 上書하기를 ··· 신이 듣건대 고려말 왜구가 興行하여 民들이 살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간 왜인들은 불과 10명에 1, 2명에 지나지 않고 본국의 民이 (役을) 피하여 거짓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黨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 역시 살펴야 되는 일입니다.055055 『世宗實錄』 세종 28년 10월 임술.닫기
② 일본에 예물을 가지고 갔던 중랑장 方之用이 일본인 探題將軍 五郞兵衛 등의 사신과 함께 와서 일본의 토산물을 바쳤다.056056 『高麗史』 권134, 열전 47 신우 2, 우왕 6년 11월. 닫기
③ 호조참판 朴習이 말하길,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로 있을 적에 들은 바 무릉도의 둘레가 7息이고 곁에 조그마한 섬이 있으며 田地가 50여 결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사람만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家를 거느리고 入居하여 혹은 假倭로서 도둑질을 하였습니다.057057 『太宗實錄』 태종 16년 9월 경인.닫기
④ 하위지가 아뢰기를 ··· 國家가 兩色白丁으로 하여금 평민과 섞여 살게 하니 후환이 염려됩니다. 그러나 白丁과 平民은 서로 혼인하지 않고 각각 스스로 구별하므로 태평한 때에는 진실로 염려할 바가 없으나 만약 變故가 있게 되면 반드시 떼로 모여 난을 일으킬 것이니 이러한 사실은 예전(고려시대)에 홍건적의 난과 왜구 때의 일을 보면 알 수 있거니와 마땅히 그 법을 밝혀서 평민과 혼인하게 하여야 합니다.058058 『文宗實錄』 문종 1년 6월 계미.닫기

위의 기록들은 천민집단인 화척과 재인만이 아닌 다른 계층에서도 가왜활동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우선 ①의 기록을 보자. 이 기록은 비록 세종대의 것이지만 일본 학자들이 고려말 왜구 집단이 일본인이 아닌 고려의 백성들이 대부분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 이 학설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순몽이 號牌法을 다시 시행하도록 임금에게 상서한 것이 주 내용이다. 곧 호패법의 사용에 관하여 주장하면서 위의 기록을 부수적으로 넣은 데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기록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왜구의 80% 이상이 고려인이었다는 결과가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80% 이상이 왜구였다고 가정하면 이것은 왜구의 침구가 아니고 민들의 내란이며, 이 사실을 『고려사』의 찬자들이 『고려사』 기록하지 않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059059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이 학설을 쟁점으로 삼아 반론을 제기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일본 국수주의적 식민사관의 비판적인 대응이라는 데에는 수긍이 가나 그들의 논리에 맞설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재에 있어서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론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그 논리를 부각시키는 의미를 갖게 되므로 무시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닫기 뿐만 아니라 이 기록을 제외하고는 왜구의 비율이 나타나 있는 사료가 보이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 내용보다는 가왜가 화척이나 등 특수 천민집단이 아닌 일반 민이었다는데 주목을 해야 한다. 곧 고려의 민들이 왜구의 침구로 살수 없게 되자 거짓으로 왜복을 입고 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반 민들이 가왜로서 활동하였다는 내용이 『고려사』 등지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위의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060060 이외에도 예종 1년 10월 계유조에 의하면 姜希孟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도적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아뢰면서 고려말기에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구라고 일컫고 도둑질한 자가 자못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睿宗實錄』 예종 1년 10월 계유).닫기
이와 관련하여 ④의 기록이 주목된다. 백정은 고려시대 이래의 韃靼계의 이민족으로 간주되어 온 재인·화척의 후예로 이들은 세종 5년 정부의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白丁이라 개칭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의 백정은 화척과 재인을 뜻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평민이 이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태평한 때에는 아무런 염려도 없으나 변고가 있을 경우에는 모여 그들과 함께 난을 일으킨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한 점이다. 평민들이 화척, 재인과 함께 함으로써 고려의 가렴주구보다는 오히려 역이 없는 유망민에 투속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화척, 재인과 더불어 가왜로서 활동하였음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현상이라 하겠다.
②·③의 기록은 관료를 지낸 자도 가왜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②의 기록은 중랑장이었던 방지용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우왕 6년(1380) 일본으로 사신으로 가서 탐제장군 五郞兵衛 등과 함께 토산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방지용이 왜 중랑장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물길에 익숙한 자이므로 벼슬이 내려진 게 아닌가 막연히 추측해 볼뿐이다. 당시는 물길이 험난하고 왜구의 약탈도 심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일반 민에게 벼슬을 내려 일본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③은 호조참판 박습이 1411년(태종 11)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적에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조선시대의 자료로 방지용이 무릉도에 들어가서 가왜활동을 하였음을 알려 준다.
②·③의 기록에 대해 방지용이 가왜로서 중랑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중랑장이 된 후 가왜가 되었을 지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가왜활동을 한 층이 화척과 재인 만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진다. 따라서 일반 민 가운데 가왜활동을 한 자가 그렇게 적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의 대다수가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가왜층이 각계 각층에 존재하였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註 045
: 이를 비판한 최근의 논문으로는 이영,「高麗末期 倭寇構成員에 관한 考察」(『韓日關係史硏究』 5, 1996)이 참조된다.
註 046
: 『高麗史』 권134, 신우 8년 4월.
註 047
: 위와 같음.
註 048
: 『高麗史』 권135, 신우 9년 6월.
註 049
: 『高麗史』 권118, 열전 31 趙浚, 우왕 14년 8월.
註 050
: 『高麗史』 권129, 열전 42, 崔忠獻.
註 051
: 『高麗史』 권81, 지35 병 1 병제, 신우 2년 7월.
註 052
: 『世祖實錄』 세조 2년 3월 정유.
註 053
: 『高麗史』 권81, 지35 병 1 병제, 신우 3년 12월.
註 054
: 이영, 앞의 논문, p.26.
註 055
: 『世宗實錄』 세종 28년 10월 임술.
註 056
: 『高麗史』 권134, 열전 47 신우 2, 우왕 6년 11월.
註 057
: 『太宗實錄』 태종 16년 9월 경인.
註 058
: 『文宗實錄』 문종 1년 6월 계미.
註 059
: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이 학설을 쟁점으로 삼아 반론을 제기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일본 국수주의적 식민사관의 비판적인 대응이라는 데에는 수긍이 가나 그들의 논리에 맞설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재에 있어서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론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그 논리를 부각시키는 의미를 갖게 되므로 무시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註 060
: 이외에도 예종 1년 10월 계유조에 의하면 姜希孟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도적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아뢰면서 고려말기에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구라고 일컫고 도둑질한 자가 자못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睿宗實錄』 예종 1년 10월 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