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1970년대에도 그랬지만, 1950년대나 1960년대에 해방후의 역사적 사건이나 문제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할 때에는 이용할 만한 마땅한 자료가 드물었다. 성명서, 담화문, 군정당국 등의 공식 발표문 등은 부분적으로밖에 참고할 수가 없었다. 좌익에 관해서는 반공적인 저서 등에서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것을-그것도 제대로 인용되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이용하였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1970년대 초까지 이용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신문은 신문사를 찾아가 볼 수 있었고, 1차 사료로 보기가 어려운 저서들도 있었지만 해방 직후에 나왔던 책들도 간혹 구해볼 수 있었다. 李萬珪의 『呂運亨투쟁사』(叢文閣, 1946), 梁又正 편저의 『李承晩대통령독립노선의 승리』(독립정신보급회, 1948), 金俊淵의 『독립노선』(시사시보사출판국, 1947), 光州府총무과공보계 편의 『해방전후회고』(광주부, 1946), 金鐘範의 『조선식량문제와 그 대책』(創建社, 1946), 김종범·金東雲의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조선정경연구사, 1945), 朴馹遠의 『남로당총비판』(1948), 張福成의 『조선공산당파쟁사』(대륙출판사, 1949), 鄭時遇 편의 『독립과 좌우합작』(三義社, 1946) 등과 라우터백의 『한국미군정사』(국제신문사출판부 역, 국제신문출판사, 1948), 『유엔조선위원단보고서』(林命三 역, 국제신문사, 1948) 등이 그것이다. 조선은행조사부의 『조선경제연보 1948』, 『경제연감 1949』도 자주 이용되었다. 그 밖에 마크 게인의 『일본일기』(뉴욕:W. Sloane Associates, 1948)나 맥퀸의 『오늘의 한국』(하버드대학 출판부, 1950), 미드의 『한국의 미군정』(콜롬비아대학 킹스크라운출판부, 1950) 등은 영문판으로, 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巖南堂書店, 1964)은 일어판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사료적 가치가 큰 민주주의 민족전선 편의 『조선해방연보』(文友印書館, 1946), 조선인민당의 『인민당의 노선』(신문화연구소출판부, 1946), 白南雲의 『조선민족의 진로』(新建社, 1946), 朴文圭의 『조선토지문제論考』(문우인서관, 1946) 등 좌익계 저서나 문건, 신문 등은 금서였다. 조선통신사의 『조선연감 1947』, 『조선연감 1948』도 내놓고 인용하기가 어려웠다.
1950년대 이후에도 趙炳玉의 『나의 회고록』(民敎社, 1959) 등의 회고록이 나와 해방정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시기에 기초사료가 소개된 글도 나왔다. 後石學人(본명은 千寬宇)이 쓴 『사료로 본 해방 10년 약사』가 1955년 8월 15일부터 12월 1일까지 6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미소공위 개막 직전까지의 주요 자료를 소개하고, 그것에 약간의 해설을 붙였다. 이것의 후편은 『조선일보』에 1959년 8월 18일부터 10월 13일까지 약 42회에 걸쳐 연재되어, 남한 총선일이 결정된 1948년 3월 1일까지를 다루었다.
해방3년기의 사료는 1970년대 중반에 제한된 범위의 것이었지만 상당량이 나와, 부족한 대로 국내에서도 이 시기에 대한 연구에 손을 댈 수가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괄목할만하고 중요한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자료 대한민국사』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날로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이 공포된 때까지 편년체로 자료를 배열하였다. 이 자료집은 1968년부터 1974년에 걸쳐 7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각권이 1천페이지를 오르내리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 자료집을 만든 의도와 이 자료집의 성격은 제1권 서문에 있는 다음의 글에 잘 요약되어 있다.

해방후 민족사의 진전과정과 이를 뒷받침해 줄 신빙성있는 많은 사료를 수록함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주로 남한에 관한 사료의 수록에 치중하고, 북한 공산지역에 관한 것과, 남한에 관한 것 중에서도 공산계열의 선동선전과 파괴를 목적으로 한 내용의 것은 이를 제외함으로써, 해방후 정세의 추이와 史實의 진상을 빠짐없이 밝히기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이 자료집은 해방시기의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동아일보』·『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서울신문』 등 중도계 또는 중도좌파의 신문기사까지 상당부분 수록하였고, 미군정 관보와 법령 등 공문서도 많이 실려 있고, 삐라·벽보 등도 전단으로 표기하여 실었다.
1974년에는 金南植이 엮어낸 『남로당연구자료집』이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왔다. 이 자료집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기타 좌익의 주요 문건이 두권에 수록된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를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료집은 ‘대외비’였기 때문에 일반 연구자들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김남식은 이 자료집을 많이 활용하여 다음해에 『실록 남로당』(신현실사)을 저술하였다. 1976년에는 『해방30년사』란 서명으로 4권의 책이 成文閣에서 출간되었는데, 이 중 宋南憲이 집필한 제1권 『건국전야』에는 해방시기의 사료가 많이 들어 있어, 이 시기의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위와 같은 사료집-송남헌의 저서도 일종의 사료집으로 볼 수도 있다-외에도 1970년대에는 기본사료들이 들어 있는 책들이 몇권 더 나왔다. 『월간중앙』 1975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광복 30년 중요자료집』은 쉽게 볼 수 있는 자료집이었다. 雩南실록편찬위원회에서 펴낸 『雩南實錄』(悅話堂, 1976), 三均學會에서 펴낸 『素昻先生文集』 1, 2 (횃불사, 1979)도 이 시기에 나왔고, 이보다 소루하지만 白凡사상연구소에서는 『白凡語錄』(사상사, 1973)을 이미 펴낸 바 있었다. 李庭植이 영어로 編譯한 『한국공산주의자료집(1945~1947)』(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1977)도 당시로는 귀중한 자료집이었다. 古下 宋鎭禹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의 『古下宋鎭禹先生傳』(동아일보사, 1965), 呂運弘의 『夢陽 呂運亨』(靑廈閣, 1967), 이정식의 『金奎植의 生涯』(新丘문화사, 1974), 李仁의 『半世紀의 證言』(명지대학출판부, 1974), 李哲承의 『全國學聯』(중앙일보 동양방송, 1976)도 해방후의 상황을 증언해준다. 『동아일보』에 1971년 10월부터 1972년 7월까지 117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것을 보충하여 출판한 曺圭河·李庚文·姜聲才의 『남북의 대화』(한얼문고, 1972)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많이 취록하였다는 점에서 선구적이었다. 일본에서 나온 高竣石의 『朝鮮 1945~1950-革命史에의 증언』(三一書房, 1972)은 좌익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료나 자료집이 워낙 적어 웬만한 것만 나와도 귀중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기본사료나 자료집은 1980년대에 쏟아져 나왔다.
1981, 1983년에는『民世安在鴻選集』 1권과 2권이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되었다. 안재홍은 우익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을 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에 대한 중요한 증언을 많이 써놓아서, 『민세안재홍선집』 제2권은 소중한 사료집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 펴낸 『전환기의 내막』(1982)에도 해방정국에 대한 증언이 들어 있다. 1984년에는 두권의 중요한 자료집이 나왔다. 驪江출판사에서 영인하여 내놓은 『南朝鮮過渡立法議院速記錄』과 김천영 편의 『연표 한국현대사』 1, 2(한울림)가 그것이다. 후자는 연표 해당일자에 관계되는 자료를 첨부하였던 바, 그때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이 꽤 들어 있다.
해방3년사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집은 1986년 돌베개에서 영인되어 나왔다. 김남식·이정식·韓洪九가 펴낸 『한국현대사자료총서』는 해방3년사 연구에서 꼭 필요한 신문·잡지가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희귀한 자료도 꽤 있었다. 1권에서 5권은 『漢城日報』·『朝鮮人民報』·『獨立新報』·『解放日報』·『靑年解放일보』·『노력인민』 등이 수록되었다. 결본이 꽤 있고, 영인상태가 나쁜 것도 적지 않지만, 좌우익의 신문이 고루 갖추어져 있어, 당시 신문에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는가를 파악하는데 기본적인 양을 제공한 셈이다. 또 이 시기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나와 있었다. 『동아일보색인 1945~1950』은 이미 1981년에 출판되었다. 『한국현대사자료총서』가 나온 이듬해에는 거름에서 『한국현대문학자료총서』를 펴냈던 바, 주로 문학(문화)기사가 편집된 것이었지만 이 자료집에는 여러 신문들이 수록되었다.007007 거름 자료집에서 발굴한 신문들에 대해서는 이완범,「해방전후사연구 10년의 현황과 자료」(『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p.534 참조.닫기 신문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영인되어, 『전국노동자신문』·『民主衆報』·『우리신문』과 미국의 조선민족혁명당계에서 냈던 『독립』도 상하권으로 영인되었다(原主문화사, 1992). 연구자들은 이 밖에 『嶺南日報』·『光州民報』·『濟州新報』·『民衆時報』·『大邱時報』·『大衆日報』·『婦女日報』 등을 각지에서 찾아내 사료로 이용하였다.
해방시기의 잡지(주간·旬刊 등 포함)도 아주 많은 부분이 영인되었다. 『한국현대사자료총서』에는 6권에서 9권에 주로 잡지가 수록되었던 바, 『科學戰線』·『大潮』·『民鼓』 『民聲』·『民心』·『民政』·『民主朝鮮』·『白民』·『새한민보』·『先鋒』·『新世代』·『新朝鮮』·『新天地』·『우리公論』·『人民』·『人民科學』·『再建』·『朝光』·『朝鮮經濟』·『週刊 新太平洋』·『週報 民主主義』·『春秋』·『學兵』·『學風』·『協同』·『革命』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결본도 적지 않다. 1987년에는 『開闢』이 일부 영인되었고(한일문화사), 최근에 와서는 『한국현대사자료총서』에 들어있는 잡지 중 빠진 부분과, 그것에 아예 들어 있지 않았던 잡지가 복사되었다. 『開闢』·『國際評論』·『綠十字』·『大衆公論』·『大潮』·『大韓消防』·『無窮花』·『文學評論』·『民政』·『民主公論』·『民主朝鮮』·『民族文化』·『百濟』·『法曹協會』·『先驅』·『新聞評論』·『新文化』·『우리公論』·『雄辯』·『嶺南敎育』·『新天地』·『協同』·『建國公論』·『大衆科學』·『동광』·『民聲』·『婦人』·『月刊法廷』·『三千里』·『새한민보』·『新傾向』·『新世代』·『週刊經濟』·『朝鮮週報』·『朝鮮春秋』·『韓國公論』·『彗星』 등이 그것이다.
『한국현대사자료총서』에는 또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의사록』·『전국농민조합총연맹결성대회회의록』·『민주주의민족전선의사록』·『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보고문及결정서』·『제1회조선문학자대회회의록』·『쏘米共同委員會에 관한 諸般資料集』·『임시정부수립大綱-美蘇共委諮問案答申集』 등이 수록되었다. 이 자료총서에는 좌우익에서 낸 여러 단행본들도 영인되었는데, 이 중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책들도 여럿 들어 있었다.
『한국현대사자료총서』에 들어있는 좌익단체의 회의록 등에 이어 조선공산당 내부의 문건도 정리되어 나왔다. 1950년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의 일부를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1945~46』(1993)이 그것이다. 이균영이 정리한 『김철수친필유고』(『역사비평』, 1989 여름)에도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기술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몽양여운형전집』도 두권 출간되었다(1권, 1991, 2권, 1993, 한울). 1980년대 후반 이래 주로 좌익관계 인사가 많지만, 해방 전후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 『역사비평』 등에 실렸는데, 이것들도 사료로서 꽤 이용되고 있다.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자료들도 많이 나왔다. 아라리연구원에서 펴낸 『제주민중항쟁』 1~3(1988, 1989)은 자료집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제사 말햄수다』(한울, 1989),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4·3장정』(1~4권은 백산서당, 1990~1991, 5, 6권은 나라출판, 1992, 1993) 濟民일보에서 펴낸 『4·3은 말한다』 1~3(고려원, 1994, 1995) 등에는 증언이 많이 채록되어 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에서 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1992, 1993)는 주로 북한과 관련된 증언들이 많지만, 남한 정치사에 관련된 사료들도 있다. 박갑동의 증언보다는 신빙성이 있지만, 사료로 이용하는 데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심지연이 자신의 논문과 함께 부록으로 수록한 각권당 약 200~3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들도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중 『한국민주당연구』 1(풀빛, 1982), 『한국현대정당론』(창작과 비평사, 1984), 『해방정국논쟁사』 1(한울, 1986)은 『한국현대사자료총서』가 나오기 이전에 나온 것들로, 특히 『해방정국논쟁사』 1은 吳世昌의 아들 吳一龍이 해방시기에 직접 모았던 삐라·벽보 등을 주로 수록하였는데, 사료적 가치가 높다.008008 이와 관련해서는 오일룡,「정치삐라로 지샌 1945년의 해방정국」(『신동아』, 1985. 10) 참조.닫기 그후에도 심지연은 『박헌영노선비판』(김남식과 함께 編著, 세계, 1986), 『조선혁명론연구』(실천문학사, 1987), 『조선신민당연구』(동녘, 1988), 『미소공동위원회연구』(청계연구소, 1989), 『인민당연구』(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91) 등에 계속 자료를 수록하였다.009009 이 시기의 자료에 대한 전반적 검토는, 역사문제연구소 해방3년사연구모임, 『해방3년사연구입문』(까치, 1989) 참조.닫기
해방후 정치사를 연구하는데, 회고록이나 수기·증언·일기 등 개인자료가 중요하게 사료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한 개인자료가 무척 빈약하고 거기에다가 신빙성에도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 자료도 우익측이 더욱 적지만 별로 많은 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신문은 1차 사료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도,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잡지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당시 신문은 사료로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지면이 많지 않았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은 속간되고나서 한동안 타블로이드판으로 2면을 냈고, 때로는 4면을 발행하였다. 이렇게 지면이 좁은데도, 그 지면의 상당부분은 외신으로 채웠다. 2면짜리 신문의 1면은 거의 외신으로 채워서 내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국내정치의 보도는 담화 성명 등과 그것의 해설이 많았고, 거기에다가 주의 주장을 담은 글이 여러 회에 걸쳐 연재될 때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뉴스성이 강한 보도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한 뉴스도 8·15기념식 등 각종 기념식이나 국민대회, 단체 창립대회같은 모임, 크고 작은 각종 사건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으로, 해방정국은 ‘정치의 범람 시기’라고 말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정치활동, 그것의 이면, 중요한 정치 행위가 결정되는 과정에 대한 보도는 드문 편이다. 정국의 추이나 변화가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사건’을 통해 부각이 될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신문을 통해서 해방정국을 보면 동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태적인 느낌을 준다. ‘정치’가 살아 움직이기보다는, 정치인들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은 채, 곧 ‘정치’가 별반 없이, ‘사건’으로 정국이 움직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이 점은 좌익보다도 우익이 더욱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해방정국에서 기사가 빈약한 것은 신문사의 취재능력이 약한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기사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도 한 가지 신문을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같은 계열이라도 다른 신문을 보아야 하고, 또 반대편 신문들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신문들간에 내용에 차이가 많고, 정반대로 보도하는 경우도 있다. 해방정국을 특징짓는 당파성, 곧 좌냐 우냐 하는 것이 신문에 극명하게 표출되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의 좌우익 싸움에서 여러 신문이 청년단같은 무력조직과 함께 첨단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문은 좌우싸움의 유력한 도구였다. 이것은 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 좌익의 대변지인 『조선인민보』, 한민당의 喉舌이라고 불리는 『동아일보』나 반공의 선봉에 서 있던 『大東新聞』들이 특히 그러하였지만, 중립지를 표방한 경우도 좌우익 싸움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신문의 주필은 “이 때가 어느 때라고 중간적 존재를 허할 것이냐, 우가 아니면 좌다. 각자의 정치적 색채를 분명히 하고 싸워야 한다”고 연설하였다지만,010010 吳基永,「언론과 정치」(『신천지』, 1947 신년호) p.16.닫기 좌우싸움의 선봉장으로서 여러 신문들이 자신의 색채를 분명히 하였다. 외신도 자신의 정파에 유리한 것으로 골라 실었고, 담화 성명서도 자기 정파 것을 주로 싣되, 그것으로 상대편을 공격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반대 정파의 것을 실어 주었다. 여기에 취재도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각각의 성격에 맞추어 신문을 사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좌우의 소식을 알려면 兩紙(『대동신문』과 『인민보』-필자)를 사보야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인민보』를 위하여 슬퍼한다”는 개탄이나,011011 「人民報의 위기」(『신천지』, 1946. 5) p.70.닫기 『동아일보』가 重刊辭에서 들고나선 ‘破邪의 劒’은 어떤 것을 ‘邪’라 하여 ‘破’하려는지가 독자에게 뚜렷이 예고되어 있고, 또 『동아일보』가 말한 ‘춘추의 正筆’이란 곧 우익의 대변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며, 그가 자인한 ‘王師의 전위’란 곧 우익師의 선두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 것은012012 東田生,「동아일보」(『신천지』, 1946. 5) p.74.닫기 이 시기 신문의 성격을 엿보게 하는 지적들이다. 그러다보니까 『대동신문』이 특히 그러하였지만 신문에 욕설이나 험악한 말투가 많이 실렸고, 좌익신문처럼 사상을 강제하려는 것같은 인상도 주었다. 또 뉴스와 가십도 경계선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매도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모든 신문이 극단적으로 어느 한쪽 편에 경도된 기사를 쓴 것은 아니었다. 중립을 표명한 신문도 순수하게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해방정국의 특성상 어려웠지만, 그래도 두 극단의 신문에 비하면 공정하게 기사를 쓰려고 노력한 면이 있었다.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에 비하여 역량이 있었고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우익에서는 좌익에 기울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친일파 처단도 주장하고 민족협동전선에도 관심을 보인 우파 민족주의 신문이었는데, 대체로 김구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漢城日報』는 안재홍이 사장 또는 후견인이었으므로 중도우파의 입장을 대변하여 좌우·남북 渾和의 통일정부 출현을 待望하였다. 『독립신보』는 창간호에 김규식의 축사가 머리로 실리고, 여운형과 백남운을 고문으로 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중도좌파의 입장에서 좌우합작을 역설하였으나, 나중에는 좌파진영의 대변지가 되었다.013013 해방 3년기에 신문을 좌우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다. 분류하는 입장에 따라 좌우의 기준이 다를 수 있고, 시기에 따라 신문이 변하기 때문이다. 해방 3년시기 신문들의 성격이나 특징, 좌우 분류에 대해서는 崔埈, 『한국신문사』(일조각, 1965) 및 송건호,「미군정시대의 언론과 그 이데올로기」(『한국사회연구』 2, 한길사, 1984), 이완범, 앞의 논문 참조.닫기 중립성 또는 객관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극우극좌한테 얼마나 시달릴 수 있는가는 해방정국의 영향력 있는 중립적 잡지였던 『신천지』의 예가 보여준다. 『신천지』 1945년 연말 1946년 연초에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본격화되고, 정당이나 단체들이 좌우의 어느 한쪽에 가담하게 되는 형세가 나타날 때, 우익으로부터는 좌라는 칭호를 받는 동시에 좌익으로부터는 반동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014014 「본지가 1년동안 걸어온 길」(『신천지』, 1947. 2).닫기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를 지지하는데도, 여운형을 먼저 언급하면 좌익으로 분류되었고, 김규식을 앞에 놓으면 우익으로 단정되는 상황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기본사료로 많이 이용될 수밖에 없는 신문이 위와 같이 객관성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엄정한 사료비판을 거쳐서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술과 글, 논문이 정치적·계급적으로 유리한 사료를 임의로 구사한 경우가 많았다. 이하에서는 저서와 논설, 논문 등에 이용되었던 기사가 얼마나 사실 또는 진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는가를 몇가지 예를 들어 서술하기로 한다.
연구자들은 해방3년기에 주요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평가할 때, 각 정당 단체의 소속원 숫자를 종종 참고한다. 3·1운동이나 다른 규모가 큰 사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9월총파업이나 10월항쟁, 3·22파업, 2·7투쟁 등을 평가할 경우 동원된 인원의 숫자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좌익계건 우익계건 신문들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정치세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정당·단체의 조직원수나 행사·사건에 동원된 숫자를 크게 늘이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30일자와 『해방일보』 1946년 5월 1일자에는 민전가맹단체의 조직원수가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 105,081명, 조선인민당 170,000명, 조선신민당 180,000명, 노동조합전국평의회 596,000명, 전국농민조합총연맹 3,530,850명, 조선부녀총동맹 800,000명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대개가 배 또는 수배 이상 불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015015 박헌영은 1946년 1월초 공산당원이 남쪽에 1만명, 북쪽에 2만명 있다고 말한 것으로 『주한미군사(HUSAFIK)』는 전하고 있다(『주한미군사』 2, 돌베개 영인, p.22). 좌익에서는 전평의 가입자수를 50만명으로 주장하였는데, 해방직후 남한의 공장노동자수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러가지 통계를 볼 때 운수노동자를 합해도 50만명에는 훨씬 못미쳤다. 전농은 가입자가 3백만명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전농 결성대회 회의록에 의거한다고 하더라도 1백만명 내외로 추산된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pp.292~293 참조).닫기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도 늘렸지만, 직접적으로는 미소공동위원회 협의대상으로서 민전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10월항쟁 참가인원을 북에서 펴낸 『조선중앙연감』 1949년판에서는 201만여 명으로 집계하였는데, 각 지역에서의 봉기·시위 참가자수를 합산해볼 때 위의 숫자는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016016 서중석, 위의 책, p.455 참조.닫기 10월항쟁보다 규모가 작았던 1948년 ‘2·7구국투쟁’ 참여인원을 『노력인민』에서 150만명이라고 보도한 것도 과장임에 틀림없다.017017 『노력인민』에서는 1948년 2월 7일에서 2월 9일에 걸쳐 3일간에 파업투쟁·맹휴투쟁·군중투쟁에 총동원된 숫자가 전남 332,359명, 경남 417,055명, 경북 552,683명 등 총계 1,477,117명이라고 보도하였다(『노력인민』 1948. 3. 26).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2월10일 소요사태로 인해 경찰관·관공리·우익간부 사망 11명, 폭도 사망 28명, 전선절단 68개소, 기관차 손상 39대, 파업 15건, 맹휴 8건, 데모 81건, 봉화 67건 등으로 발표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6, 1973, pp.282~283). 당국의 발표도 믿기가 어렵지만, ‘2·7투쟁’은 주로 기습시위 등이 중심이 된 것으로 수천명 이상이 동원된 시위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닫기
우익도 숫자를 늘리는데 좌익에 지지 않았다. 1947년 6월 미소공동위원회협의대상 정당·단체들이 참가 청원서를 낼 때, 한민당에서는 유령단체를 급조하였고,018018 이 유령단체 조작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데 한 쟁점으로 나타났다. 민전에서 작성한 유령단체 조작에 대한 진정서에 대해서는 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청계연구소, 1989) pp.359~384 참조. 이 밖에 서중석, 앞의 책, pp.585~586 참조.닫기 우익에서는 정당·단체의 인원을 크게 늘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한민당원은 86만명으로 최대 당원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불교중앙총본부는 신도를 425만명, 천도교총본부는 신도를 406만명으로 보고하여 최대 종교단체가 되었다.019019 송남헌, 『해방3년사』 2(까치, 1985) p.486.닫기
좌익과 우익신문들은 주요 행사 인원도 사실과 차이가 있게 보도하였다. 해방되고 처음으로 맞이한 3·1기념식에 대해 『한성일보』에서는 미군정·우익이 공식행사를 가졌던 종로보신각앞 광장에 수만 인파가 모였다고 보도하였는데, 같은 계열의 신문인 『동아일보』에서는 1면에 수십만이 몰려들었다고 보도하였고, 2면에는 백만 시민이라고도 표현하였다.020020 『한성일보』·『동아일보』 각각 1946. 3. 2. 참조.닫기 그 반면 『서울신문』에서는 좌익측의 남산집회에 30여 만명이 참집하였다고 보도하였는데(1946. 3. 1), 이 신문에 실린 민전의 성명에는 10만명이 동원되었다고 쓰여 있다(1946. 3. 3).021021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2(1969) pp.158~160.닫기 해방후 첫번째 가진 서울에서의 메이데이행사에 대해 『한성일보』와 『독립신보』는 전평측에 대해서는 10여 만명으로 참여인원을 같게 보도하였지만, 대한노총에 대해서는 전자는 수천, 후자는 1천여 명으로 보도하였다.022022 『한성일보』·『독립신보』 각각 1946. 5. 3. 참조. 메이데이기념식에는 농민 일반 근로대중이나 시민들도 참여하였다.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는 대한노총측에 약 3천명, 전평쪽에 약 3만명이 모인 것으로 보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2, p.524.닫기 그런데 『조선인민보』에서는 전평쪽에 20여 만명이 모였다고 보도하였으나, 대한노총쪽은 언급하지 않았다.023023 『조선인민보』 1946. 5. 3.닫기 서울에서의 8·15해방 1주년 기념식에 대해서 『독립신보』에서는 좌익측에 15만명, 미군정·우익측에 수만군중이 모였다고 보도하였는데, 『조선인민보』에서는 좌익측만 30만명이 집결하였다고 크게 보도한 반면 우익측 집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024024 『조선인민보』·『독립신보』 각각 1946. 8. 16. 참조.닫기 좌우대립이 더욱 심화된 1947년 3·1기념식에 대한 『한성일보』와 『독립신보』의 보도는 더욱 관심을 끌 만하다. 두 신문 모두다 객관성을 유지하겠다고 주장하였는데도, 『한성일보』에서는 우익의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서울운동장)에 수십만 대중이 몰려들었다고 크게 보도하고, 좌익의 남산쪽 집회에 대해서는 맨끝 귀퉁이에 2단으로 ‘人波와 旗海’라고 제목을 뽑고 10여 만 군중이 모였다고 보도하였다.025025 『한성일보』 1947. 3. 2.닫기 그와 대조적으로 『독립신보』에서는 남산에서 열린 좌익의 3·1운동기념식에 수십만명이 모였다고 크게 보도하고, 우익측 집회에 대해서는 『한성신문』이 좌익측 집회에 대해 보도했던 위치 비슷한 곳에 거의 같은 크기로 수만 대중이 참집하였다고 보도하였다.026026 『독립신보』 1947. 3. 3. 『조선일보』에서는 우익측의 서울운동장 집회에 7만 대중이 집결하였고 좌익측의 남산집회에는 수만명이 참가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4(1971) pp.354~356.닫기
뉴스에 대한 보도가 우익과 좌익간에 상위가 많고, 우익신문에만 나는 소식, 좌익신문에서만 볼 수 있는 사건이 아주 많은데, 어떤 경우는 중대한 사건인데도 전혀 보도가 되지 않는 예도 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할 때, 좌익 내부를 분열시키고 조선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힌 조봉암의 박헌영에 대한 私信의 공개, 여운형의 아우 여운홍 등의 인민당 탈당, 조선정판사위폐사건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미군정의 의도가 개재될 수 있었고, 좌익, 특히 조선공산당한테는 자신들을 분열시키고 탄압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우익계 신문은 크게 보도하였고, 조선정판사사건에 대해서는 전면으로 제호를 뽑는 등 여러 날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반면 이 시기에 좌익계 언론인들이 탄압을 받고, 『해방일보』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사실상 폐간되었으며, 정판사위폐사건이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조선인민보』에서는 위폐사건에 대한 공산당의 성명은 보도하였으나, 이 사건에 대한 당국의 발표는 사실상 묵살하였다. 이 점은 『독립신보』도 비슷하였다. 조봉암의 박헌영에게 보낸 사신에 대해서도 『조선인민보』에서는 기자단 질문에 대해 조봉암이 “남의 사신을 무단 공개”했다고 답변을 한 부분만 실었다.027027 『조선인민보』 1946. 5. 15.닫기 그리고 여운홍 등의 탈당에 대해서는 李如星인민당총무국장이 기자단에게 탈당성명을 반박한 내용의 기사만 실었다.028028 『조선인민보』 1946. 5. 16. 『독립신보』에서는 2단으로 탈당한 인민당원의 성명을 실어주었다(『독립신보』 1946. 5. 13). 이 신문에서는 극우의 독립전취국민대회에 대해서 성황을 이루었다고 4단으로 보도하였다(『독립신보』 같은 날짜).닫기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오보는 모스크바3상회의결의의 내용에 대한 보도일 것이다. 1945년 연말 한국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유일한 결의가 발표될 무렵부터 그 결의 내용을 둘러싸고 거센 대립이 일어나, 우익과 좌익은 반탁 대 3상결의 지지로 나뉘었다. 그리하여 좌우대립이 격렬해졌고 좌우로의 분립도 확연해졌다. 그뒤 분단이 구체화될 때까지 좌익과 우익의 싸움은 마치 3상결의 지지와 반탁의 싸움처럼 되어버렸다. 3상결의 발표 이전까지는 주로 좌익에서 친일파를 민족반역자이므로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결의 발표 이후에는 친일파가 포함된 우익진영에서 상대편을 매국노 민족반역자로 규탄하여, 좌우가 서로를 매국노 민족반역자로 비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나아가 우익진영에서는 좌익이 아니더라도 반탁투쟁비판세력(예컨대 김규식·안재홍 등의 중도우파)에 대해서까지 찬탁론자요 반역분자라고 몰았다.029029 오기영,「이성의 몰락」(『신천지』, 1947. 5) pp.17~19 참조.닫기
신탁통치는 1943년경부터 미국이 구상하고 있었고, 1945년 9, 10월 미국이 대한정책을 정립할 때에 그것이 주요 골자를 이루었다. 그것은 10월 20일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에 의해 언급되었다. 이때 소련은 신탁통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주소 대사 해리만은 소련이 후견체제보다 조속한 독립정부의 수립에 호의적임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030030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해방3년과 미국』 1(김국태 역, 돌베개, 1984) p.139.닫기 모스크바회의에서 1946년 12월 17일 미국무장관 번즈는 신탁통치안을 골자로 한 한국문제의 해결안을 제시하였고, 12월 20일 소련외상 몰로토프가 임시정부 수립을 핵심으로 한 수정안을 내놓았던 바, 이 회의에서는 소련수정안이 중심이 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신탁통치안은 이 결의의 3항 후단에 들어갔는데, 소련텍스트에는 ‘후견’이라는 뜻을 가진 οπeκα(아뻬까)로 표기되어 있었다.
모스크바3상결의에 대해 우익에서는 초지일관 반탁투쟁을 벌인 김구와, 반탁이면서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한 한민당,031031 한민당이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을 때, 『동아일보』 주간 薛義植은 “삼상회의는 탁치를 결정한 일도 없고…모든 방안의 성안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맡기었고…장차 수립되는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을 특기”하였다고 지적하였다(『동아일보』 1946. 5. 4). 앞부분을 제외하면 타당성이 있다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반탁투쟁의 논리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닫기 신탁통치는 반대하되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3상회의결의가 지켜져야 하며, 신탁통치문제는 임시정부를 먼저 세워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시행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반탁은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에 하면 된다는 김규식·안재홍·김병로 등의 주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반탁투쟁이 격렬히 일어난 데에는 언론의 ‘오보’가 큰 몫을 하였다. 『동아일보』에서는 모스크바에서 3 나라 외무부장관이 회의를 하고 있던 1945년 12월 24일 소련이 원산·청진에 특별이권을 요구한다는 기사를 싣고 다음날부터 주간 설의식이 소위 소련이 했다는 요구를 반박하는 해설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이 아니었다. 12월 25일 『동아일보』는 톱으로 소련이 조선과 만주 등을 차지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12월 26일 이승만은 미국의 트루먼대통령·번즈국무장관 등 미국정부의 지도자들이 조선독립을 주장하고 있다고 명언하고, 소련이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는 것처럼 시사하는 방송을 하였다. 12월 27일에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은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요구한다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모스크바3상결의의 과정과 전면 배치되는 주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워싱턴발’로만 표기되었을 뿐 뉴스의 출처도 불명이었다. 미·영·소 세 나라 서울에서 3상결의 내용이 발표되었던 12월 28일에는 『동아일보』 등에서는 전날의 보도를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소련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각계의 반탁성명을 실었다. 12월 29일 『동아일보』에서는 모스크바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고 전단으로 보도하였는데, 이 보도에는 3상결의 제1항에 명시된 임시정부를 조속히 수립한다는 내용도,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임시정부 등과 협의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날부터 서울에서 반탁투쟁이 일어났다. 3상결의 내용은 12월 30일에야 『동아일보』 1면 중간에 실렸는데, 미육군성 발표로 되어 있어 3상결의안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더구나 이날에는 서울에서 격렬한 반탁시위가 일어나, ‘사실’이 실렸다고 하여도 제대로 읽혔을지는 의문이다. 『조선일보』에서는 1946년 1월 3일 있었던 좌익이 주최한 3상결의지지대회였던 서울시민대회의 사진을 싣고 탁치반대서울시민대회장 전경이라고 설명하였다.032032 『조선일보』 1946. 1. 4.닫기 3상결의에 대한 왜곡은 1946년 1월 24일 타스통신에 의해 그것의 결의과정이 공개되고, 1960년대 이후에는 조순승·최상룡·커밍스 등 여러 학자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였다.033033 『민족의 선봉』(대한경찰戰史 제1집, 興國硏文協會, 1952)에서는 5년간의 신탁안이야말로 소련의 주창으로서, 크레믈린의 세계 적화 흉모로 나온 것이라고 서술하였다(p.49). 1967년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1에도 소측은 신탁통치안을 주장한데 반하여 미측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p.72). 1973년에 나온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한민국정당사』에는 12월 27일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고 하여(p.128),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를 않고, 3상결의가 오로지 신탁통치 실시만 결의한 것처럼 기술하였다. 1980년대에 사용한 고등학교 국사(하)도 『대한민국정당사』와 같은 논조로 기술되어 있다(pp.159~160).닫기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된 왜곡보도는 그뒤에도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1946년 1월 16일자에서 1월 5일 박헌영이 뉴욕타임스기자 존스턴과 회견하였을 때, 소련의 1국신탁을 지지하였고,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연방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방송에서 방송한 뉴스를 크게 다뤘다.034034 같은 날짜에 『조선일보』에서는 방송 내용과 박헌영의 부인담화를 함께 실었다.닫기 다음날 역시 『동아일보』에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박헌영 언동에 각 정당과 50여 단체가 분연 궐기하였다고 보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이 문제에 대한 사설을 썼다.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035035 강준식,「김일성과 박헌영, 그 숙명의 대결」(『신동아』, 1989. 4) pp.501~502.닫기
임시정부 수립의 임무를 맡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며칠 전인 1946년 3월 13일자의 『동아일보』에서는 얄타회담에서 소연방이 조선 전체를 요구하였는데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 하였다는 소위 얄타비밀이라는 것을 큰 활자로 ‘폭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만주에 주둔하였던 소련군대가 38선을 향하고 있다는 피야슨의 말을 역시 크게 보도하였다. 3월 16일, 17일자에도 김준연·처칠 등의 반소 언급이 박스기사 등으로 실렸다. 1945년 12월 하순 『동아일보』의 보도를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4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미군정 당국의 제의로 남부 조선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주석에는 이승만이 앉을 것이라는 설을 크게 보도하였는데, 다음날에는 이에 대한 미국무부의 부인 성명을 실었다.
신문·잡지 등이 해방정국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적한 바와 같이 문제가 많은데, 그 점은 회고록이나 증언, 수기에서도 보여진다. 그 한 예로 조병옥의 경우를 들어보자. 그는 해방정국에서 경무부장이라는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그의 『나의 회고록』(民敎社, 1959)은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다른 인물들의 것보다 일찍 나온 편이어서 사료로서 가치가 크고 신빙성도 있을 성싶다. 그러나 이 저술은 사료로서 분명히 중요성은 크지만 신빙성에는 문제가 많다. 신빙성과 관련하여 해방직후의 상황을 그린 『제5장-8·15해방과 나의 경무부장시절』의 앞 부분 두 페이지만(pp.144~145) 분석해 보자.
이 회고록의 해방정국 묘사는 한민당의 조직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의 첫머리에 쓰여 있는 “한국민주당의 白寬洙·金炳魯·李仁·徐相日 諸氏들과 高麗同志會 元世勳·李順鐸·金若水 등 諸氏가 합하여” 한민당을 발기하였다는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백관수·김병로·이인 등이 처음에 준비한 것은 한국민주당이 아니라 조선민주당이었으며, 원세훈이 발기한 당은 고려민주당이었다.036036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1(풀빛, 1982) p.48.닫기 또 이순탁은 한국국민당 결성을 준비했던 것으로 『한민당小史』에서는 밝히고 있다.037037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창작과 비평사, 1984) 부록, p.284.닫기 『나의 회고록』에는 한민당 총무에 김병로·이인과 자신 등이 들어가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김병로는 백관수와 동향인이어서 총무를 백관수에게 사양하고 감찰위원장을 맡았다. 이 회고록에서는 여운형·안재홍 양씨가 8월 15일밤 방송을 통하여 “동포여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때 방송을 한 것은 안재홍 한 사람이었고, 그것은 8월 15일 밤이 아니라 8월 16일 오후 3시·6시·9시였다. 조병옥은 이 회고록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소련군의 지령을 받고 조직되었던 집단체”라고 규정하고, 그 이유로 “8월 15일에 공산당의 밀사가 지령을 갖고 그들에게 통고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었으나, 이것은 비슷한 점조차 전혀 없는 중상모략이었다. 이어서 소련군이 나진 상륙을 한 지 3주일이 지나 건준이 각 지방마다 간판을 내걸고 조직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건준은 8월 16, 17일부터 평남·함남·황해 등 북한지역과 남한 각지에서 조직을 하여 8월 말경에는 140여 개의 지부를 갖게 되었다. 또 건준이 소련군의 지령에 의하여 조직되었던 까닭에 중앙책임자와 각 부서 책임은 민족주의자한테 직책을 맡김으로써 건준이 공산주의집단이 아님을 가장하고 그 차장은 공산주의자에게 맡겨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고 쓰여 있지만, 건준에는 부서 책임자에 우파도 좌파도 중도파도 있었고, 차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위의 진술에 이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9월 6일에 발표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기술하였는데, 건준 부서와 인공의 부서는 전혀 다른 것이고, 인공 부서의 부장은 좌우가 섞여 있었으며 차장은 공산당계가 많았다. 또 인공 부서의 명단 발표는 9월 14일에 있었다. 조병옥은 송진우가 정권을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을 것이 아니라, 연합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인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 저술에서 주장했지만,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민당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근거가 없다. 그리고 이어서 한민당의 반대로 건준이 阿部총독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지 못했다고 기술했는데, 한민당은 8월 15일로부터 훨씬 지난 9월에 가서야 발기를 하고 발당을 하였다. 또 한민당은 건준을 타도하였고, 그 다음 소위 인공과 인민위원회, 민전을 성토 타도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건준은 인공이 만들어지면서 자발적으로 해소되었다.
지금까지 조병옥이 자신이나 한민당과 관련된 해방직후의 정국에 대해 『나의 회고록』에서 서술한 2페이지 분량의 기록이 사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를 검토하였다. 이렇게 오류가 많다면 조병옥의 『나의 회고록』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해방정국에서의 그의 위치와 활동을 볼 때 그의 기술이 신빙성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가 쓴 것은 사료로서 중요하며, 신빙성이 약한 것은 그것대로 또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병옥의 『나의 회고록』이 틀린 사항이 많은 것은 그 글을 쓸 때에 자료를 챙겨가면서 꼼꼼이 쓰지 않았던 것이 1차적 요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도 일원이었던 한민당 총무의 이름에 다른 사람도 아닌 김병로를 열거한 것은 수석총무를 제외한 총무들의 기능이 총무회의를 포함하여 명목 뿐이었고, 감찰위원회의 활동도 조병옥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한민당의 당 운영에 대해 소중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건준과 인공에 대한 서술은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고의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조병옥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소련군이 아직 평양이나 함흥에도 오지 않았는데, 8월 15일 소련이 보낸 공산당 밀사의 지령을 받고 그날 건준을 만들었다거나, 또 건준이 한민당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이나 조병옥같이 정치활동에서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서신이나 증언 등에 거짓말을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그들 뿐만 아니라 한민당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1945년 9월 6일 한민당 발기인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에서 건준과 인공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조병옥이 그의 회고록에서 기술한 것과 그 취지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민당에서는 좌익에 대해서만 그러한 방식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영수로 모셨던 김규식이나 김구도 입장이 달라지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어떤 사항에 관한 증언은 시기마다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사료로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기술내용에 많은 차이를 보일 수가 있다. 8·15해방을 전후하여 조선총독부측에서 송진우와 교섭하였느냐 여운형과 교섭하였느냐는 오랫동안 쟁점으로 있었다. 한민당 등 보수세력은 총독부에서 먼저 송진우를 만나 치안 또는 행정을 위임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송진우의 거부로 실패하자 여운형과 교섭하였는데, 몰염치한 여운형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해방 당시 정무총감이었던 遠藤柳作의 1957년 8월 13일 국제타임스와의 회견, 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1964), 당시 총독부 조사과장이던 崔夏永의「정무총감 한인과장을 호출하다」(『월간중앙』, 1968. 8.) 등을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정통성’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197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으며,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된 한민당측의 최초의 사료는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다. 1945년 9월 6일에 나온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서는 치안 또는 행정 위임 문제에 관련된 여운형 부분은 성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치안 또는 행정을 송진우에게 위임하려고 했다는 언급은 이상하게도 나오지 않는다. 송진우와의 관련사항은 이 해 10월의 한 기록에 나온다. 송진우는 10월에 여운형 등과 합좌한 자리에서, 총독부의 原田사무관이 8월 10일 찾아와 치안이 염려되니 일을 좀 해달라고 얘기하였고, 12일쯤에는 요리점에서 고위급 친일파인 朴錫胤, 일본군 참모 神崎 등이 신중히 打合하자고 피력하였으며, 13일에는 30년래의 지인인 生田 경기도지사가 폭동이 염려된다면서 총독을 만나보라고 권하였는데, 모두다 건강 등을 이유로 거절했음을 설명하였다.038038 『조선주보』 1945. 10. 15(『한국현대사자료총서』 9, p.578). 송진우가 총독부측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서중석, 앞의 책, p.199, pp.203~207 참조.닫기 송진우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 단지 치안 문제에 대해 협조를 요청한 것이었고, 그것도 공식적인 요청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遠藤의 1957년 인터뷰 등에서 밝혀진 것처럼, 조선총독부에서 공식으로 ‘치안 유지’에 대해 협조를 요청한 것은 명백히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김준연은 1945년 12월 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일개 사무관인 原田이 송진우에게 ‘행정위원회 조직’을 의탁하였고, 그 뒤에도 生田지사와 岡경찰부장 등이 송진우를 만나서 그와 같은 교섭을 한 것처럼 기술하였으며,039039 김준연, 『독립노선』(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pp.12~13.닫기 1946년 8월 15일 『동아일보』에 쓴 글에서는 일보를 더 나아가 여러 관·군 관계자들이 송진우에게 행정위원회같은 것을 조직하라고 권하고 ‘독립준비’까지를 하여도 좋다고 말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또 송진우가 거절한 이유도 송진우가 앞에서 말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040040 위의 책, pp.2~5.닫기 김준연이 서문을 쓴 1948년 출간된 『한국민주당소사』에서는 아예 중간 관공리 수준을 넘어 정무총감 遠藤이 직접 “송진우씨를 먼저 청하여 치안유지회같은 것을 조직하여 행정권 일체를 맡아가라”고 말한 것으로 기술하였다.041041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부록, p.272.닫기 한민당 간부였던 李相敦은 1980년대에 쓴 글에서 原田 등이 송진우를 찾아가 치안권, 정권을 맡아달라고 권고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4분의 3, 즉 경찰·사법·통신·방송·신문 등을 넘겨줄 터라고 제의하였다고 상세히 기술하였다.042042 이상돈,「해방전후 종횡담」(『신동아』, 1987. 8) p.620.닫기

註 007
: 거름 자료집에서 발굴한 신문들에 대해서는 이완범,「해방전후사연구 10년의 현황과 자료」(『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p.534 참조.
註 008
: 이와 관련해서는 오일룡,「정치삐라로 지샌 1945년의 해방정국」(『신동아』, 1985. 10) 참조.
註 009
: 이 시기의 자료에 대한 전반적 검토는, 역사문제연구소 해방3년사연구모임, 『해방3년사연구입문』(까치, 1989) 참조.
註 010
: 吳基永,「언론과 정치」(『신천지』, 1947 신년호) p.16.
註 011
: 「人民報의 위기」(『신천지』, 1946. 5) p.70.
註 012
: 東田生,「동아일보」(『신천지』, 1946. 5) p.74.
註 013
: 해방 3년기에 신문을 좌우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다. 분류하는 입장에 따라 좌우의 기준이 다를 수 있고, 시기에 따라 신문이 변하기 때문이다. 해방 3년시기 신문들의 성격이나 특징, 좌우 분류에 대해서는 崔埈, 『한국신문사』(일조각, 1965) 및 송건호,「미군정시대의 언론과 그 이데올로기」(『한국사회연구』 2, 한길사, 1984), 이완범, 앞의 논문 참조.
註 014
: 「본지가 1년동안 걸어온 길」(『신천지』, 1947. 2).
註 015
: 박헌영은 1946년 1월초 공산당원이 남쪽에 1만명, 북쪽에 2만명 있다고 말한 것으로 『주한미군사(HUSAFIK)』는 전하고 있다(『주한미군사』 2, 돌베개 영인, p.22). 좌익에서는 전평의 가입자수를 50만명으로 주장하였는데, 해방직후 남한의 공장노동자수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러가지 통계를 볼 때 운수노동자를 합해도 50만명에는 훨씬 못미쳤다. 전농은 가입자가 3백만명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전농 결성대회 회의록에 의거한다고 하더라도 1백만명 내외로 추산된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pp.292~293 참조).
註 016
: 서중석, 위의 책, p.455 참조.
註 017
: 『노력인민』에서는 1948년 2월 7일에서 2월 9일에 걸쳐 3일간에 파업투쟁·맹휴투쟁·군중투쟁에 총동원된 숫자가 전남 332,359명, 경남 417,055명, 경북 552,683명 등 총계 1,477,117명이라고 보도하였다(『노력인민』 1948. 3. 26).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2월10일 소요사태로 인해 경찰관·관공리·우익간부 사망 11명, 폭도 사망 28명, 전선절단 68개소, 기관차 손상 39대, 파업 15건, 맹휴 8건, 데모 81건, 봉화 67건 등으로 발표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6, 1973, pp.282~283). 당국의 발표도 믿기가 어렵지만, ‘2·7투쟁’은 주로 기습시위 등이 중심이 된 것으로 수천명 이상이 동원된 시위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註 018
: 이 유령단체 조작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데 한 쟁점으로 나타났다. 민전에서 작성한 유령단체 조작에 대한 진정서에 대해서는 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청계연구소, 1989) pp.359~384 참조. 이 밖에 서중석, 앞의 책, pp.585~586 참조.
註 019
: 송남헌, 『해방3년사』 2(까치, 1985) p.486.
註 020
: 『한성일보』·『동아일보』 각각 1946. 3. 2. 참조.
註 021
: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2(1969) pp.158~160.
註 022
: 『한성일보』·『독립신보』 각각 1946. 5. 3. 참조. 메이데이기념식에는 농민 일반 근로대중이나 시민들도 참여하였다.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는 대한노총측에 약 3천명, 전평쪽에 약 3만명이 모인 것으로 보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2, p.524.
註 023
: 『조선인민보』 1946. 5. 3.
註 024
: 『조선인민보』·『독립신보』 각각 1946. 8. 16. 참조.
註 025
: 『한성일보』 1947. 3. 2.
註 026
: 『독립신보』 1947. 3. 3. 『조선일보』에서는 우익측의 서울운동장 집회에 7만 대중이 집결하였고 좌익측의 남산집회에는 수만명이 참가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자료집 4(1971) pp.354~356.
註 027
: 『조선인민보』 1946. 5. 15.
註 028
: 『조선인민보』 1946. 5. 16. 『독립신보』에서는 2단으로 탈당한 인민당원의 성명을 실어주었다(『독립신보』 1946. 5. 13). 이 신문에서는 극우의 독립전취국민대회에 대해서 성황을 이루었다고 4단으로 보도하였다(『독립신보』 같은 날짜).
註 029
: 오기영,「이성의 몰락」(『신천지』, 1947. 5) pp.17~19 참조.
註 030
: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해방3년과 미국』 1(김국태 역, 돌베개, 1984) p.139.
註 031
: 한민당이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을 때, 『동아일보』 주간 薛義植은 “삼상회의는 탁치를 결정한 일도 없고…모든 방안의 성안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맡기었고…장차 수립되는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을 특기”하였다고 지적하였다(『동아일보』 1946. 5. 4). 앞부분을 제외하면 타당성이 있다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반탁투쟁의 논리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註 032
: 『조선일보』 1946. 1. 4.
註 033
: 『민족의 선봉』(대한경찰戰史 제1집, 興國硏文協會, 1952)에서는 5년간의 신탁안이야말로 소련의 주창으로서, 크레믈린의 세계 적화 흉모로 나온 것이라고 서술하였다(p.49). 1967년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1에도 소측은 신탁통치안을 주장한데 반하여 미측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p.72). 1973년에 나온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한민국정당사』에는 12월 27일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고 하여(p.128),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를 않고, 3상결의가 오로지 신탁통치 실시만 결의한 것처럼 기술하였다. 1980년대에 사용한 고등학교 국사(하)도 『대한민국정당사』와 같은 논조로 기술되어 있다(pp.159~160).
註 034
: 같은 날짜에 『조선일보』에서는 방송 내용과 박헌영의 부인담화를 함께 실었다.
註 035
: 강준식,「김일성과 박헌영, 그 숙명의 대결」(『신동아』, 1989. 4) pp.501~502.
註 036
: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1(풀빛, 1982) p.48.
註 037
: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창작과 비평사, 1984) 부록, p.284.
註 038
: 『조선주보』 1945. 10. 15(『한국현대사자료총서』 9, p.578). 송진우가 총독부측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서중석, 앞의 책, p.199, pp.203~207 참조.
註 039
: 김준연, 『독립노선』(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pp.12~13.
註 040
: 위의 책, pp.2~5.
註 041
: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부록, p.272.
註 042
: 이상돈,「해방전후 종횡담」(『신동아』, 1987. 8) p.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