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 ②-미군정·미국자료

1980년대초까지 국내에서는 미드나 조순승의 저서, 커밍스의 저서·논문 및 메릴 등의 저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무부·육군부·의회 등의 미국측 자료와 미군정(주한미군 포함-이하 같음)자료를 접하였다.
1984년 돌베개에서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해방3년과 미국』 1이라는 책명으로 1945, 1946년에 오고간 미국무부의 외교문서를 출간한 것은 해방 전후시기에 관한 미국측 자료를 국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 책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어(김국태 역) 읽기도 쉬웠다. 1986년에는 일월서각에서 주한미군 정보일지 10권(6사단·7사단 보고서 각각 2권 포함)과 주한미군정보요약 5권이 영인되어, 비록 일부가 빠진 것이었지만, 이 시기 연구자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었다.
미군정관계 자료들은 方善柱의 노고로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게 영인되어 나왔다. 이제 미군정, 미국측 자료가 국내에서도 해방시기 연구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는 이미 일월서각에서 많은 부분을 영인한 바 있는 주한미군정보일지를 사항별·인명별로 색인까지 붙여 1988년에 7권으로 영인하여 출간하였고, 이어 『주한미군북한정보요약』 4권(1989), 『미군사고문단정보일지』 2권(1989), 『주한미군정보요약』 5권(1990), 『주한미군정보일지 부록』(1990) 등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시민소요, 여론조사보고서 2권, CIC(방첩대) 보고서 3권, 노동관련보고서 1권, 하지문서집 2권 등을 간행하여, 이 방면에서 업적을 세웠다. 돌베개에서는 1988년에 『주한미군사』를 4권으로 영인하였다. 풀빛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한 호그의 정책보고서와 웨드마이어 등의 각종 보고서를 번역하여(신복룡·김원덕 편역) 『한국분단보고서』라는 책명으로 두 권을 출판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대한민국사자료집』 속에도 해방시기에 관한 자료들이 다수 영인되어 있다.
영인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도 1990년대에 미군정자료를 많이 영인하였다. 『미국무부 외교문서 1945~1954』 12권은 영인업소의 이름이 불분명한 채 영인되어 나왔다. 원주문화사에서는 『미군정청관보』 4권(李吉相 편, 1991), 『한국분단사자료집』 6권(신복룡 편, 1991), 『해방전후사자료집』 2권(이길상 편, 1992) 등을 영인하여 냈고, 다락방에서는 鄭容郁이 편집하여 『해방직후 정치사회사자료집』 12권(1994), 『해방전후 미국대한정책자료집』 13권(1995) 등을 간행하였거나 간행 중이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는 7사단보고서를 『지방미군정자료집』이라는 책명으로 편집하였다(3권, 경인문화사, 1993).
1980년대 이후에는 미군정·미국측 자료를 분석하거나 소개, 해제한 논문들도 여러 편 나와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043043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 또는 글들이 참고된다.
山極晃,「현대조선사의 사료에 대하여」(橫濱市立大學경제연구소, 『경제와 무역』 129호, 1980).
잭 선더즈,「1945~1950년의 미국립문서처의 한국관계자료」(1983;『한국현대사』 1, 열음사, 1985).
방선주,「미국의 한국관계 현대사자료」(『한국현대사론』, 을유문화사, 1986).
방선주,「미국내 자료를 통하여 본 한국근현대사의 의문점」(『아시아문화』 2호, 1987).
방선주,「미국 제24군 G-2군사실 자료해제」(『아시아문화』 3호, 1987).
이완범,「해방전후사 연구 10년의 현황과 자료」(『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방선주,「미군정기의 정보자료:유형 및 의미」(『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1).
양기백 묶음, 『미국내 한국관련 기록 및 서류목록』(영문편, 한국국제교류재단, 1991).
이혜숙,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서론, 서울대학교대학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정용욱,「해방이전 미국의 대한정책 구상 자료」(『역사와 현실』, 1993. 9호).
정용욱,「미국국립문서관 소재 ‘노동’관련 자료」(『역사와 현실』, 1994. 11호).
정병준,「미국내 한국현대사 관련 자료의 현황과 이용법」(『역사와 현실』, 1994.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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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이래 미군정·미정부 자료들을 국내에서도 꽤 풍부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현대사 연구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국내 신문들이 구체적인 정치 활동에 대한 취재가 약하고, 더구나 그것의 이면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는데 비하여, 미군정 자료는 각종 소스를 취합하였고, 그것에는 이면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국내 자료에서 볼 수 없었던 사실이나 진상을 많이 알려준다. 미군정·미국의 대한정책, 특히 경제와 관련된 자료들은 내용이 풍부하다. 그리고 여러 관계사항들이 국내 신문·잡지 등에 여기저기 들어가 있고 체계성도 약하게 기술되어 있어 그것을 꿰맞춰 정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은데, 미군정과 미정부 자료들은 쉽게 상황을 알 수 있게끔 체계성을 갖추고 있고, 어떤 문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감을 준다. 미군정 자료도 판독하기 어렵게 영인된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국내 신문·잡지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읽기도 쉽다. 주로 미군정·미정부 자료들을 많이 이용하게 되는 데에는 아마 해방 직후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상태에 대한 공감보다, 다시 말해서, 국내측 자료에 의해 제공되는 해방정국에 대한 상상적 교감보다, 오랫동안 미국식 사고에 익숙해진 면이 작용하여 미군정이나 미정부의 해설에 더 친밀해질 수 있는 점도 한가지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자들이 주제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군정·미정부 자료에 크게 의존하여 논문을 작성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부 학위논문들에서 미국이나 미군정 정책을 다룬 것이 아닌데도 참고자료 소개에 미군정·미정부 것이 국내 것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미군정·미정부의 자료들은 최종 정리될 때까지 여러 차례 손을 거치게 된다. 또 미국인의 평가기준과 감각으로 해설을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치 등 한국 내부의 문제에 접근하면, 사실의 오류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미군정·미정부의 의도에 은연 중 따라갈 소지를 어느 정도는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군정·미정부의 문서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좌우익을 막론하고 여러 정치세력들이 미국의 의도에 의하여 움직이거나 미국의 이용물이 된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일부 지도자들은 미국에 대하여 잘못 판단한 경우가 있었고, 미국의 규정력이 워낙 크다 보니까 결국 분단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구·여운형·김규식 등은 물론이고, 이승만 한민당도 계급적·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무조건 미국에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카아가 슈트레제만 문서에 관해서 비판한 부분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부장관이었던 슈트레제만은 1929년 죽었을 때 300상자쯤 되는 많은 양의 公的, 半公的, 私的 서류를 남겼다. 그의 비서 베른할트는 이 문서를 추려 『슈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책명으로 각권이 600페이지가 되는 책을 3권 출간하였다. 그런데 이 책은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서방관계의 것들이 주로 선호되었다. 그러나 소련전문가이기도 한 카아가 보기에 인기가 없었던 대소외교는 베른할트의 책에서보다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에 1945년에 300상자나 되는 슈트레제만 문서가 극적으로 연합국에 넘어가지 않고 없어져버렸다면 우리는 베른할트의 선택에 의해서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을 평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문서든지 필자 또는 편집자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일,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 혹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해줄 것을 바랐던 일, 아니 심지어는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기 스스로만이 생각했던 일 이상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044044 카아, 앞의 책, pp.18~21.닫기
앞에서 언급한 박헌영·존스턴 회담후 나온 샌프란시스코방송에 대한 미군정의 모략적인 성명도 그러하지만, 미군정의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기 위한 제반 노력은 미군정 기록에도 편견이나 모략이나 오보 등 여러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1945년 연말, 1946년 1월에 반탁투쟁이 일어났을 때에 미군정이 취한 태도나 남긴 기록에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정말 그들이 신탁통치와 관련된 미국무부의 정책을 그렇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반탁투쟁의 뛰어난 반소반공적 효용성 때문에 미군정의 그러한 태도나 기술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등등, 이 부분만 가지고도 한 편의 논문을 쓸 수가 있을 만큼 납득이 잘 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들이 많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공산당에게 입힌 타격을 보더라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우익신문이 여러 날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을 보더라도 미군정측에서도 꽤 많은 자료를 남겼어야 했고, 그 이면도 해부해 보려고 했음직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미군정이 남긴 자료는 너무 적고, 해석이나 설명도 너무 간단하다. 이 사건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직후 터져 나온 조봉암의 박헌영에게 보낸 사신 공개사건과 여운홍 등 인민당간부들의 탈당사건과 같은 시기에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또 이 사건에 대한 경찰·검찰·법원·우익과 조선공산당 및 좌익의 주장이 전적으로 상반되고, 증거가 박약하기 때문에도, 미군정측의 자료는 무척 중요한데, 다른 상세한 기록들과는 크게 대조적으로 기록이 적다.
하지나 러치 등 주한미군 고위층에서는 근거가 약한데도 남한에서의 좌익의 동정을 소련에 의한 사주로 단정해 버리는 언술이 종종 기록에 나온다. 하지중장은 1945년 11, 12월에 맥아더사령부에 여러 번에 걸쳐 남한에서의 대부분의 급진적 요소는 소련인들이 부추긴 것이며, 모든 활동은 잘 훈련된 외부의 전문가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는 냄새가 난다거나,045045 『주한미군사(HUSAFIK)』 2(돌베개 영인-이하 같음) p.28.닫기 미군정 활동이나 경제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소련과 일본인들에 의해 지원을 받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046046 위의 책, pp.29~30 참조.닫기 주한미군정보일지에는 대구폭동이 북한에서 내려와 계획, 조직되었다면서, 현재 대구에는 혼란을 조직하기 위해 북한에서 온 많은 에이전트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047047 『주한미군정보일지(G-2 보고)』 3(1946. 10. 8;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영인-이하 같음) p.93.닫기 브라운소장은 대구에 내려가 조사한 뒤, 10월 14일의 보고에서 소요의 원인의 하나로 북한 에이전트에 의한 소요의 신중한 계획과 집행을 들었다.048048 『주한미군사』 3, p.365. 심지연, 『대구10월항쟁연구』(청계연구소, 1991) 부록, p.126.닫기 한 기록에서는 봉기가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공산당의 사주와 지시가 없었더라면 (1946년) 10월 2일의 유혈도 없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즉 이 봉기는 미군정을 불신하고 혼란에 빠뜨리도록 명백히 신중히 계획, 입안된 것으로, 북한에서 직접 고무했다고 단정했다.049049 『주한미군사』 3, pp.370~371.닫기 그러나 브라운소장과 김규식·여운형을 의장으로 한 朝美공동소요대책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조속히 독립이 안된 점과 친일경찰 등에 대해 민중의 원성이 컸던 점을 소요의 주요 요인으로 꼽고, 박헌영의 사주도 한 원인으로 보았을 뿐이고,050050 심지연, 앞의 책, 부록 pp.419~423.닫기 스티코프 비망록을 포함하여 어떤 자료에서도 직접 북한이 10월 2일 등의 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북한정보에 대한 기록이나 C.I.C.(방첩대) 문서는 특히 극우적 반공성향이 농후하게 배어 있지만, 미군정의 각종 기록과도 성격이 또 다른 미국무부에 보낸 미군정의 보고에도 그런 면이 약한 것은 아니다. 해방정국에서 집회는 조직력이 우세한 좌익이 우익보다 더 많은 군중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1946년 3월 1일 있었던 3·1기념집회의 경우 좌우익의 여러 신문과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볼 때, 좌익측이 더 많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51051 과장이 많은 이철승의 『전국학련』에도 좌익이 연 창경원쪽의 시민위안대회는 성황이었으나 우익의 서울운동장 집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아 창경원쪽의 사람들을 몰고 갔다고 기술되어 있다(이철승, 『전국학련』, 중앙일보 동양방송, 1976, pp.171~174).닫기 그런데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1946. 3. 19)에서는 우익집회에 20여 만명, 좌익집회에 약 1만 5천명이 참가하였다고 기술하였다.052052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241.닫기
좌익에 대한 편견은 우익에 대한 편파적인 호의적 기술로 나타나게 된다. 주한미군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군정초기에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에는(1945. 9. 29) 한민당이 일제말에 약 1천명에 이르는 반일비밀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씌어 있고,053053 위의 책, p.71.닫기 1945년 10월 5일에 아놀드군정장관 고문단으로 임명된 11명에 대해 양대 정치세력인 좌익 혹은 혁신파와 보수파 지도자, 그 밖에 교육자·법률가·실업가 및 ‘애국지사’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베닝호프는 맥아더사령부의 정치고문 대리 에치슨에게 전문을 띄웠다(1945. 10. 9).054054 위의 책, p.79.닫기 이 11명의 고문단에 여운형은 원래 들어 있었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북에 있는 조만식을 제외한 9명 중 7명은 한민당원이었고, 다른 두 명은 한민당과 가까운 인물들로 분류될 수 있었으며, 친일파로 간주될 수 있는 자들도 여러 명 있었고, 대개 다 영향력이 약한 사람들이었다.055055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창작과 비평사, 1984) p.56 참조.닫기 미군정 관계자들이 이러한 보고들을 본국에 올린 것은 미국무부의 지시와 거리가 있는 자신들의 친일파 등용 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미군정은 자신들한테 추종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자들이라도 편파적으로 기술하거나 나쁘게 묘사하였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주한미군정치고문 랭던이 1945년 11월 20일 미국무장관에게 사실상 분단정부로 될 수가 있는 전한국에 걸친 행정위원회의 조직을 제안한,056056 커밍스는 이 랭던 전문에 1946년 2월 민주의원-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8년 단정의 시나리오가 암시되어 있다고 분석하였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프린스턴대학출판부, 1981, p.186).닫기 널리 알려진 보고에 들어 있는 다음의 구절이 참고가 될 것이다.057057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152.닫기

구왕조 정부(고종정부-필자)가 대내적으로는 봉건적이며 부패하였지만, 기록에 의하면 극동 3국 중에서 외국의 이익에 대해 가장 호의적이었고, 외국의 인명과 재산과 기업을 보호해주었으며, 모든 조약과 특권을 존중해주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미군정에서는 위의 랭던보고서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행정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여 사실상 중경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 입국한 직후에는 많은 호의를 보였으나, 반탁투쟁 때 김구의 임시정부측이 미군정과 정면으로 맞선 이후로는, 김구에 대해서 대체로 비판적이거나 악의적으로 기록을 하였다.058058 이에 대해서는 李東炫,「미국은 이렇게 김구를 미워했다」(『월간중앙』, 1992. 6) 참조.닫기 김구에 대한 주한미군과 미국인관리들의 혐오는 1949년 6월 26일 그가 암살되었을 때, 그를 무자비하고(ruthless) 비양심적인(unscrupulous)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 묘사한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구의 죽음에는 그의 통일정책에 대한 경계와 관련하여 미국도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059059 이에 대해서는 1992. 4. 12·15일에 안두희가 자신이 암살을 결행하기 전에 미정보기관에 있는 중령과 중위를 만났다고 증언한 것 등 참조. 이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92. 4. 13·18 및 『한겨레신문』 1992. 4. 14 참조.닫기 김구 암살의 진상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미대사관측에서 김구가 안두희로 하여금 이승만을 암살하도록 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안두희의 김구 암살의 요인이라는 정부측 ‘설명’을 중시하고, 그의 죽음은 일시적으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의심을 증가할 것이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도 의미가 있다.060060 『주한미국대사관주간보고서』(Joint Weeka) 3(1949. 7. 1, 영진 영인-이하 같음) pp.17~18. 이와 함께 『동아일보』 1992. 4. 19 참조.닫기 미대사관에서는 자신들도 김구의 장례식에 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숫자인 40만명이나 모였다고 기술하였으면서도, 그들이 단지 부드럽고 평상적인 관심(only mild, normal curiosity)을 보였을 것이라고 ‘차갑게’ 기술하였다.061061 위의 책 3(1949. 7. 8) p.28.닫기
여러 미군정관리들이 여운형에 대해 호의를 가졌지만, 주한미군수뇌들은 미국과 소련에 중립적이고, 남의 좌익, 북의 지도자들과도 손을 잡으려 하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들어오지 않는 여운형을 불신에 가득찬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여운형이 미국의 중요한 기획에 어긋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그러한 시선은 그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으로 표출되었다. 여운형이 1946년 2월 민주의원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을 때, 동경의 맥아더는 미국무장관에게 인민당은 소련의 지시를 받는 조선공산당한테 완전히 매수되어 버렸으며, 여운형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신분을 공산주의자라고 밝혔고, 이번에 여운형은 음흉한 공산주의자로서의 진면목을 최초로 드러낸 셈이라고 설명하였다(1946. 2. 24. 접수).062062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p.228~231.닫기 여운형이 암살되기 전날 金龍中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런 말이 있다.063063 姜竣植,「해방정국, 미군정의 이승만 옹립 드라마」(『신동아』, 1989. 1, p.327에서 재인용).닫기

군정청은 초기부터 내게 부드러운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소. 북의 소련인들이 극좌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곳 미국인들은 극우분자를 두둔하오.

여운형에 대해서 특히 그러하였지만, 미국은 좌익을 분열시켜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 기록들은 좌익내의 갈등 부분에 대해서는 유난히 지대한 관심을 보여줘, 이 기록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한다면 그러한 면이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실제는 온건파 좌익지도자가 미군정측에 대해 공산당에 대한 불신을 언급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 자신은 좌익 또는 민족의 대의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공산당에 대한 그러한 언급은 말하는 자건 듣는 자건 기록자건 과장하여 표현하였을 가능성도 많다. 상대편이 듣기 좋아하는 부분만 주로 말해주었을 여지도 크고, 또 거두절미하고 듣는 자나 기록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그 부분만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들은 연구자들이 진상 또는 이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사료로 특히 중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註 043
: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 또는 글들이 참고된다.
山極晃,「현대조선사의 사료에 대하여」(橫濱市立大學경제연구소, 『경제와 무역』 129호, 1980).
잭 선더즈,「1945~1950년의 미국립문서처의 한국관계자료」(1983;『한국현대사』 1, 열음사, 1985).
방선주,「미국의 한국관계 현대사자료」(『한국현대사론』, 을유문화사, 1986).
방선주,「미국내 자료를 통하여 본 한국근현대사의 의문점」(『아시아문화』 2호, 1987).
방선주,「미국 제24군 G-2군사실 자료해제」(『아시아문화』 3호, 1987).
이완범,「해방전후사 연구 10년의 현황과 자료」(『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방선주,「미군정기의 정보자료:유형 및 의미」(『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1).
양기백 묶음, 『미국내 한국관련 기록 및 서류목록』(영문편, 한국국제교류재단, 1991).
이혜숙,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서론, 서울대학교대학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정용욱,「해방이전 미국의 대한정책 구상 자료」(『역사와 현실』, 1993. 9호).
정용욱,「미국국립문서관 소재 ‘노동’관련 자료」(『역사와 현실』, 1994. 11호).
정병준,「미국내 한국현대사 관련 자료의 현황과 이용법」(『역사와 현실』, 1994. 14호).
註 044
: 카아, 앞의 책, pp.18~21.
註 045
: 『주한미군사(HUSAFIK)』 2(돌베개 영인-이하 같음) p.28.
註 046
: 위의 책, pp.29~30 참조.
註 047
: 『주한미군정보일지(G-2 보고)』 3(1946. 10. 8;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영인-이하 같음) p.93.
註 048
: 『주한미군사』 3, p.365. 심지연, 『대구10월항쟁연구』(청계연구소, 1991) 부록, p.126.
註 049
: 『주한미군사』 3, pp.370~371.
註 050
: 심지연, 앞의 책, 부록 pp.419~423.
註 051
: 과장이 많은 이철승의 『전국학련』에도 좌익이 연 창경원쪽의 시민위안대회는 성황이었으나 우익의 서울운동장 집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아 창경원쪽의 사람들을 몰고 갔다고 기술되어 있다(이철승, 『전국학련』, 중앙일보 동양방송, 1976, pp.171~174).
註 052
: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241.
註 053
: 위의 책, p.71.
註 054
: 위의 책, p.79.
註 055
: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창작과 비평사, 1984) p.56 참조.
註 056
: 커밍스는 이 랭던 전문에 1946년 2월 민주의원-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8년 단정의 시나리오가 암시되어 있다고 분석하였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프린스턴대학출판부, 1981, p.186).
註 057
: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152.
註 058
: 이에 대해서는 李東炫,「미국은 이렇게 김구를 미워했다」(『월간중앙』, 1992. 6) 참조.
註 059
: 이에 대해서는 1992. 4. 12·15일에 안두희가 자신이 암살을 결행하기 전에 미정보기관에 있는 중령과 중위를 만났다고 증언한 것 등 참조. 이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92. 4. 13·18 및 『한겨레신문』 1992. 4. 14 참조.
註 060
: 『주한미국대사관주간보고서』(Joint Weeka) 3(1949. 7. 1, 영진 영인-이하 같음) pp.17~18. 이와 함께 『동아일보』 1992. 4. 19 참조.
註 061
: 위의 책 3(1949. 7. 8) p.28.
註 062
: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앞의 책, pp.228~231.
註 063
: 姜竣植,「해방정국, 미군정의 이승만 옹립 드라마」(『신동아』, 1989. 1, p.327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