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틀묘의 등장

기원 전후부터 1세기대를 중심으로 평양 대동강 남안을 중심으로 하나의 墓壙 속에 角材로 정방형의 外槨을 조영한 후 그 내부에 2개 내지 그 이상의 목관을 안치하는 형식의 대형 고분이 주류를 이룬다. 大形-正方形-同槨-合葬을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墓制를 榧本杜人은 ‘木室墓’028028 榧本杜人, 「樂浪漢墓-日本人の業績」, 1962(『樂浪漢墓』第2冊 수록, 1975).닫기, 북한학계에서는 이를 ‘귀틀무덤’029029 황기덕 외, 앞의 논문, 1971.닫기, 田村晃一은 ‘同一槨內夫婦合葬木槨墓’030030 田村晃一, 「朝鮮半島からみた日本の靑銅器」, 『MUSEUM』 311, 東京國立博物館, 1977.
田村晃一, 「樂浪郡地域の木槨墓-漢墓綜考2」, 『三上次男頌壽紀念東洋史考古學論集』, 1979.
닫기
, 李榮勳은 ‘同槨合葬木槨墳’031031 李榮勳, 『樂浪 木槨墳의 一考察』, 서울大 석사학위논문, 1987.닫기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연구자들 간의 다양한 구분 기준과 분류 방식에도 불구하고032032 귀틀묘의 세부 분류방식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리순진은 무덤의 축조재료에 따라 ‘순수귀틀무덤, 귀틀돌무덤, 귀틀기와무덤, 귀틀벽돌무덤’으로 분류하며, 中村春壽는 목곽의 평면형태을 기준으로 A, B, C, D, E, F의 다섯 형식으로, 그리고 李榮勳은 내부 구조, 목관과 부장품의 배치상태, 主·副室의 분리여부 등을 기준으로 A,B,C,D의 네 가지 세부형식을 나눈 바 있다. 田村晃一은 夫婦의 棺이 동일한 內槨에 들어있는지, 아니면 부부의 棺 사이에 격벽이 있는지에 따라 王根墓型과 王盱墓型으로 구분하였다.닫기 귀틀묘는 대세적으로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첫째 형식은 귀틀 안에 칸막이나 기둥을 세워서 내부를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고 거기에 각각 부부의 목관을 갈라 놓고 묻은 것이다. 둘째 형식은 귀틀의 동남쪽 혹은 서북쪽에 치우쳐서 안곽을 만들어 夫婦의 관을 나란히 넣고 나머지 ‘ㄱ’자 모양의 공간에 부장품을 안치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형식을 榧本杜人은 ‘중간에 칸막이가 있는 木室墓/외곽시설을 가진 木室墓’, 田村晃一은 ‘중간에 칸막이가 있는 목곽묘(王根墓型)/동일곽내부부합장목곽묘(王盱墓型)’, 황기덕·정찬영·박진욱은 ‘칸막이 귀틀무덤/전형적인 귀틀무덤’, 中村春壽는 ‘B型式木槨墳/C型式木槨墳’,033033 中村春壽, 『樂浪文化』, 六興出版, 1989.닫기 李榮勳은 ‘B型式同槨合葬木槨墳-C型式同槨合葬木槨墳’, 리순진은 ‘초기형의 순수귀틀무덤/전형적인 귀틀무덤’으로 보았다. 본고에서는 이를 각각 ‘A類 귀틀묘/B類 귀틀묘’로 명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목곽묘와 귀틀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單葬木槨墓는 異穴合葬木槨墓로 이행하는데, 異穴合葬木槨墓는 連接한 별도의 묘광 속에 棺槨이 병치되는 형태를 띤다. A류 귀틀묘와 이혈합장목곽묘를 비교하면, 하나의 묘광 속에 귀틀곽을 만들어 단일 공간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부부의 목관을 하나의 공간 속에 넣지 않고 나무 기둥이나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분리시켜 안치한다는 점은 서로 통한다. 그러다가 B류 귀틀묘 단계가 되면 귀틀곽 속에 안곽을 만들어 부부의 목관을 하나의 공간 속에 안치하는 것으로 진전된다. 형식학적으로 단장목곽묘-이혈합장목곽묘-A류 귀틀묘-B류 귀틀묘로의 단계 설정이 가능하다.
〈도면 1〉 목곽묘와 귀틀묘
1. 단장목곽묘(정백리 92호분) 2. 이혈합장목곽묘(정백리 3호분) 3. A류 귀틀묘(정백동 2호분) 4. B류 귀틀묘(석암리 201호분)
절대연대 자료를 중심으로 고분의 연대를 살펴보면, 정백동 37호분 북곽에서 출토된「地節四年(기원전 66년)」銘 漆匣을 통해 이혈합장목곽묘의 연대는 기원전 1세기 중엽임을 알 수 있다. A류 귀틀묘인 정백동 2호분에서는 「永始三年(기원전 14년)」銘 일산대가 출토되었으며, 정백동 2호분에서 日光鏡·昭明鏡이, 석암리 52호분에서 昭明鏡·四螭文鏡이 출토되는 등 전한 말-왕망 시기 동경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A류 귀틀묘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 1세기 초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B류 귀틀묘는 기원전 4년-기원 71년까지의 시기에 해당되는 紀年銘 漆器와 後漢代 동경들의 출토상황으로 보아 기원 1세기대로 추정된다. A류 귀틀묘가 B류 귀틀묘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034034 高久健二는 두 유형을 시간차가 아니라 계보차로 파악한다. 즉 목관을 목곽의 中軸線에 배치하는 A類목곽묘와 목관을 목곽의 한쪽에 치우쳐서 배치하는 B類목곽묘로 구분한 후, 전자는 河北省 등 華北지역의 漢墓와, 후자는 江蘇省 등 華南지역 漢墓와 계보적으로 연결시킨다(高久健二, 앞의 책, 1995, pp.175~185).닫기 아울러 부장품의 양상에서도 A류 귀틀묘의 부장품에서는 칠기, 장신구, 거마구 등 새로운 漢式文物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한국식 동검(정백동 2호분, 정백동 88호분, 정백동 381호분), 한국식동검 계통 칼집(석암리 219호분)과 한국식 동모(석암리 219호분, 정백동217호분, 토성동936호분), 고조선식 車馬具035035 岡內三眞, 「朝鮮古代の馬車」 『震檀學報』 46·47合, 1979.닫기(정백동 88호분) 등이 부장되고 있어, 목곽묘에서 B류 귀틀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인다.
이상을 정리하면 낙랑고분은 기원전 1세기 중엽 전후 단장목곽묘에서 발전하여 이혈합장목곽묘가 등장하며, 기원 1세기 후반에서 기원 전후 A류 귀틀묘를 거쳐 기원 1세기대 이후 B류 귀틀묘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이러한 변천의 과정은 단절적이라기보다는 계기적이고 중복적이었을 것이다. 대량의 중원제유물이 부장되는 전형적인 귀틀묘로 알려진 B류 귀틀묘는, 목곽묘에서 귀틀묘에 이르는 과도기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혈합장목곽묘와 A류 귀틀묘를 거쳐서 형성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B류 귀틀묘가 조영되기 시작한 기원 1세기 전반에 이미 무덤의 축조에 벽돌[塼]이 사용됨으로써 塼室墓로의 이행을 서서히 준비한다.036036 정백리 127호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小場恒吉·榧本龜次郞, 『樂浪王光墓』, 『古蹟調査報告』 2, 朝鮮古蹟硏究會, 1935).닫기 낙랑고분의 묘제를 이해함에 있어 동태적인 접근을 요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註 028
榧本杜人, 「樂浪漢墓-日本人の業績」, 1962(『樂浪漢墓』第2冊 수록, 1975).
註 029
황기덕 외, 앞의 논문, 1971.
註 030
田村晃一, 「朝鮮半島からみた日本の靑銅器」, 『MUSEUM』 311, 東京國立博物館, 1977.
田村晃一, 「樂浪郡地域の木槨墓-漢墓綜考2」, 『三上次男頌壽紀念東洋史考古學論集』, 1979.
註 031
李榮勳, 『樂浪 木槨墳의 一考察』, 서울大 석사학위논문, 1987.
註 032
귀틀묘의 세부 분류방식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리순진은 무덤의 축조재료에 따라 ‘순수귀틀무덤, 귀틀돌무덤, 귀틀기와무덤, 귀틀벽돌무덤’으로 분류하며, 中村春壽는 목곽의 평면형태을 기준으로 A, B, C, D, E, F의 다섯 형식으로, 그리고 李榮勳은 내부 구조, 목관과 부장품의 배치상태, 主·副室의 분리여부 등을 기준으로 A,B,C,D의 네 가지 세부형식을 나눈 바 있다. 田村晃一은 夫婦의 棺이 동일한 內槨에 들어있는지, 아니면 부부의 棺 사이에 격벽이 있는지에 따라 王根墓型과 王盱墓型으로 구분하였다.
註 033
中村春壽, 『樂浪文化』, 六興出版, 1989.
註 034
高久健二는 두 유형을 시간차가 아니라 계보차로 파악한다. 즉 목관을 목곽의 中軸線에 배치하는 A類목곽묘와 목관을 목곽의 한쪽에 치우쳐서 배치하는 B類목곽묘로 구분한 후, 전자는 河北省 등 華北지역의 漢墓와, 후자는 江蘇省 등 華南지역 漢墓와 계보적으로 연결시킨다(高久健二, 앞의 책, 1995, pp.175~185).
註 035
岡內三眞, 「朝鮮古代の馬車」 『震檀學報』 46·47合, 1979.
註 036
정백리 127호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小場恒吉·榧本龜次郞, 『樂浪王光墓』, 『古蹟調査報告』 2, 朝鮮古蹟硏究會,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