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삼천리 제4권 제3호  
발행일1932년 03월 01일  
기사제목男便 金佐鎭의 招魂, 未亡人 羅惠國女史의 訪問記  
기사형태대담·좌담  
男便 金佐鎭의 招魂, 未亡人 羅惠國女史의 訪問記
日氣는 느즌 봄 가태서 음녁 설을 마지하는 서울 장안 사람들의 긔분을 한층더 명랑스럽게 하드니 갑작이 하늘빗치 곱지 못하고 거리에 침울한 氣色이 떠돌면서 찬눈비가 석겨 나리든― 음녁설이 지난지도 이틀을 격한― 날이엿다.
오-바의 에리를 노피 올니고 음산한 거리를 거처 臥龍洞 뒷골목에 잇는 雲泥洞 21番地―몃칠 전에 歸國하신 金佐鎭氏 未亡人 羅惠國女史―를 訪問하든 때는 正午도 지나서 오후 2시 반이나 되는 때엿다.
대문안에 들어서니 한 세간이나 두 세간이 사는 집 갓지 안코 여러 살님이 모혀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잇섯슴으로 마당에 서잇는 웬 부인에게 몃칠 전에 滿州에서 오신 부인이 여기 잇느냐고 물엇드니 내가 서잇는 곳과 제일 거리가 갓가운 방을 가르치면서 바로 그 방이라고 손질한다. 의심업시.
「게심니까?」하고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든 나의 기대와는 어그러젓스니 다-떠러진 조희문 창구녁에 트러박은 검정 헌겁을 살짝 빼고 웬 사람의 눈동자만 깜아케 보엿슬 뿐이고 아모 대답도 업다. 記者는 또 한번 다시.
「게심니까?」하고 소리를 첫다. 그제야 문이 좁게 열니면서 어린애를 안은 부인이 드러 오라는 허락을 내리운다.
문턱에 발을 듸려노차말자 피난민이라는 늣김을 직각적으로 가지게 되엿스니 그것은 내가 예측햇든 몃배 이상의 빈곤한 공기를 발견햇섯슴니다.
日氣 관계도 잇겟지만 방도 별노 밝지 못한 데다가 창구녁이 무러진 곳에 검정 헌겁을 틀어 막은 것 등이 더 한층 방안을 음산하게 만드러 노앗다. 거긔다가 두 어린애기까지 호역으로 알코 잇스니 방안의 침울성은 더 이야기하려고도 하지 안는다.
「머-ㄴ길에 어린애를 다리고 오시느라고 엇더케 수고 하섯슴니까?」 記者는 다 안다는드시 이러케 첫말을 건늬엿다.
부인은 쾌활한 말씨로 뭘 괜찬엇슴니다. 참 「누구신지요」하고 記者의 얼골을 치다본다.
한 장의 명함을 내여서 듸렷드니.
「그럿슴니까. 추으신데 이러케 오서서 황송함니다」 그런데 우리 사실을 잡지에 내실여고 그러심니까?」
記者의 대답이 더듸게 되엿드니.
「잡지에 발표하시면 안됨니다」하고 겻헤 안즈신 노인을 처다보면서 호호호하고 우스신다. <80>
「저 노인은 누구심니까?」
「저의 친정 어머님니다.」
「그런데 언제 京城에 도착하섯슴니까?」
「한 열흘 될까요. 그런데 어린애들이 이러케 알어서」 하면서 말을 마치지도 안코 근심스러운 얼골을 지으신다.
「참 안되엿슴니다. 그런데 朝鮮을 떠나시기는 언제 떠나섯나요?」
「제가 떠난지는 한 10년 되지만은 金선생은 한 15년 된대요」 하는 말세가 金씨의 事情은 잘 모르는드시 이약이를 마처 버린다.」
「안이 처음 떠날실 때에 함께 가시지 안엇댓나요?」
「사실은요 지금 내가 아오님 보고서 이약이 하지요만은 나는 咸鏡北道 會寧 태생으로 싀집 갓다가 남편이 죽으니 부모님과 함께 北間島로 뛰여 갓지요. 北間島에서 몃해 살다가 北滿州에 이사 햇는데 그때에 처음 金선생하고 알게 되엿담니다.」
「아! 그럿슴니까. 지금으로부터 몃해 전임니까?」
「금년까지 8년ㅅ재 되엿지요.」
「金선생님은 어듸 출생이신지요?」
「京畿道 安城임니다.」
「그런데 김선생님을 맛나서부터 지금까지의 風霜을 격그신 이야기를 자세히 들녀주십시오.」
「아이구 그것을 엇더케 일일이 이야기 함닛가. 너무나 파란을 만히 격고 나니 머리가 멍한거시 이상하게 되고 엇던 때는 희스데리나 안인가 생각하는 때도 만슴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방 한일도 깜박깜박 이저버리는 때가 만슴니다. 그리고 더구나 내 입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십지도 안코요. 滿州에서 떠날적부터 엇덧턴 모-든 사실을 세상에 발표할여고 하지 안엇슴니다. 우리가 이곳에 와 잇다는 말을 듯고 신문 記者나 잡지 記者들이 차저 올줄 알엇슴으로 앗가 밧게서 차즈실 때에도 남자분이면 거절할여고 햇든 것임니다.」
길-게 이야기를 계속하시든 夫人의 몹시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가 흐려지며 얼골이 붉어지드니 눈에 눈물이 핑그르 떠도랏다. 그러면서도 말을 이어서(13行略-원문) 하고는 기-ㄴ 한숨을 휘-내뿜는다. 나는 氏의 이야기를 드르면서 보통 여성과 다른―이의 안해가 다르다는 늣김을 마지 안엇다.
「金선생님이 被殺 당하든 때가 바로 어느 때든가요?」
「벌서 오라지요. 재작년 섯달 스므닷새ㅅ날이엿슴니다.」
「어느 곳에서엿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다떠난 핼림에서 한 60리나 격한 山市라는 곳에서」 기가막힌다는 드시 고개를 푹수기면서 말을 맛치지 못하신다.
「도라가실 때에 그 광경을 목격하섯슴니까?」
「보지 못햇서요. 아참에 宋月山氏(친구)와 함께 정미소(우리가 經營하든)에 나가 보신다고 나가시드니 오후 두시나 되여서 그러케 되엿다는 말을 듯고 뛰여 나갓드니 벌서 세상을 떠나섯드람니다.
「정미소와 宅의 거리가 머럿든가요?」
「좀 머-ㅁ니다. 그랫기 때문에 총소리도 못드럿슴니다.」
「그래 그 현장에 宋氏밧게 사람이 업섯슬까요?」
「안이요 사람은 만헛슴니다. 정미소의 일하는 사람들도 이섯고 또 언제나 다리고 다니시는 保安隊도 셋이나 다리고 나가서도 무기를 가지고 안 나갓기 때문에 대항도 못햇지요. 그리고 총을 쏠 때 뒤로 쏘앗습듸다. 왼쪽등을 마젓는대 탄환이 바른쪽 가삼을 뚤코 나왓서요.
엇더케 强氣잇는 양반이엿든지 총을 마즈시구도 몃 거름 뛰여 가서 「누가 나를 쏘느냐고 소리를 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드람니다.」
夫人의 이야기를 듯고 잇는 내 가삼은 몹시도 두군거렷다.
「그런데요. 총쏜 사람은 누구든가요?」
「共産黨員 박상실이라는 사람임니다.」
「그 사람을 붓잡지 못하섯나요.」
「아이구 말슴마십시요. 그 놈을 잡으려고 엇더케 애를 썻는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말담이 업는 나로서는 엇더케나 하면 자세하게 해 드릴는지요. 지금 스믈셋 먹은 내 녀동생이<81> 잇서요. 이번에 함께 오다가 長春와서 떠러젓지요. 그 동생과 함께 2년 동안이나 차자 다니는데 두 살 먹은 어린 것을 업고 밤길도 만히 거럿지요.
한번은 「영고탑」이라는 데서 그 놈이 잡혓다는 풍설이 들니기에 나혼자 어린애를 업고서 떠낫지요. 城門에까지 이르러서 드러가기를 청하니 문을 지키는 軍人들은 드러가지 못하게 함니다. 아모리 애걸을 하여도 共産黨員들께서 돈을 만히 바더 먹은 중국 군인들은 내가 드러가기를 禁하겟지요. 엇절수 업서 어린애를 업고서 人家도 업는 그 城 밧게서 하로ㅅ밤을 새웟슴니다. 밝은 날에 또 다시 나는 군인들을 보고 싸왓슴니다. 被告가 드러가는 곳에 原告가 웨 못드러 가느냐고요. 그랫드니 總司令部에 전화를 거러보고 드러가라는 승낙을 나리우겟지, 總司令部에 드러가서 모-든 이야기를 죄다-하고 被告를 死刑에 處하기를 청하엿스나 돈을 만히 먹은 그들은 역시 내 말을 잘듯지 안엇슴니다. 나는 끗까지 노력해 볼 양으로 그 곳 중국 여관에 투숙하면서 總司令部에 드러가서 매일 가치 이야기를 하엿슴니다. 共産黨員들은 나를 맛나면 죽이라는 삐라―를 돌엿담니다. 좀 무서웟스나 그러타고 해서 용기를 일치 안엇슴니다. 내가 그 곳 영고탑에 잇슬 때 金氏의 동지들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분이 만엇슴으로 나는 배곱흐면서도 만주를 몃개식을 날마다 차입해 듸렷슴니다. 이려케 하면서 지나는 동안이 어느듯 두 달이나 되엿섯슴니다. 결과를 볼 때까지 잇서 보려고 햇지만 그 놈이 붓삽히지 안엇다고 함으로 밤3시나 되여 영고탑을 떠나서 60리 되는 밤길을 거러서 집으로 도라온 일도 이섯슴니다. 그후 얼마 지나서 우리 형제는 엇더케 하든지 그 놈을 복수 하려는 생각에서 中國總合令部에 드러가서 또 다시 고소하엿슴니다. 겨우 그 놈을 잡어서 奉天에 보내여 死刑에까지 處하게 만드럿는대 그 뒤에 日中衝突이 이러나게 되여서 엇 더케 되엿는지요.
「그런데 金선생님 장례식은 몃츨만에 하섯슴니까?」
「석달만에 햇지요.」
「아이구 그러케 오래잇다가 하섯슴닛가.」
「사회장을 하겟스닛가 각지에 흐터진 동지들이 다-오기까지 기다리느라고 그러케 오랏슴니다.」
「그랫스면 葬禮式 때에 굉장하섯겟슴니다.」
퍽 떠드럿지요. 각국에 흐터저 잇는 동지들도 만히 왓거니와 못오시는 분들이나 또는 단체에서 보내주는 만장도 1백50여장 이엿스며 金額도 2,000여원이나 드러왓슴니다. 그리고 葬禮式 當日― 喪輿가 떠날 때에 수십명의 중국 군인이 열을 지어 압서서 나갓슴니다.」
「중국 군인은 엇더케 되여서 나가게 되엿슴닛가?」
金氏가 생존에도 어듸 가실 때면 우리 保安隊 외에 중국 司令部에서 내여주는 保安隊가 잇섯담니다.
「김선생님 압흐로 군인이 몃명이나 잇섯나요?」
「各地에 퍼저 잇는 군인들을 죄다―합하면 500여명이지요. 그런데 도라 가신 후에 안된 것은 군인들입듸다. 소위 누구라고 하는 분이업스니깐 그러케 용감하든 그들은 맥을 탁 일허 버리고 죄다 떠나겟다고 한담니다. 그래서 葬禮式에 나문 金額으로 旅費를 주어서 돌여보내엿지요.」
「김선생님 도라가신 후에도 山市에서 살님을 하섯슴닛가?」
「안이요. 그 이듬해 中東省 핼림에 이사하엿지요.」
「생활은 엇대케 하섯슴닛가?」
「도라가신 후에도 살님은 그러케 곤란하지 안엇서요. 어머님과 나는 논을 부처서 타작을 하구요. 또 내동생이 학교 교원 노릇을 하여서 한 달에 쌀 세 부대와 돈 5원 또 課外로 한 100여원 되는 돈이 나왓기 때문에요」,
그러시면 그 곳 게섯든 편이 오히려 낫지 안엇을가요.」
「생활에 잇서서는 나엇지만은 엇더케 견대 낼수가 잇서야지요. 無智한 중국 군인들이 엇더케도 우리 朝鮮 사람을 못살게 구는지요. 눈이 껌벅껌벅 하는 산 사람을 업듸여 노코 독기로 목을 찍어 가는 일까지 이섯스니 더 말해서 무엇함닛가. 그러기 때문에 굴머죽어도 朝鮮 나와서 죽을여고 <82> 떠낫슴니다만은 정작 와보니 장차 엇더케 살는지 압히 캄캄함니다.」
「歸國하신 후에 살님은 엇더케 하심닛가.」
「滿州서 떠날 때부터 京城지 오는 동안에 旅費는 金氏 동무들이 어더 주어서 왓는데 오고 나니 한푼이나 나멋겟슴닛가? 밥도 해 먹지 못하고 방만 어더 가지고 이러케 잇는뎨요. 밥도 얘 사촌이 사다 주어서 먹슴니다」 하면서 무릅에 안은 어린애를 물끄럼이 내려다 보시다가 다시 말을 이어서 「굼든지 먹든지 이것들 둘을 中學校 공부까지만 시키엿스면 하는데요?」
「압흐로 서울서 사실 모양이심닛가?」
「글세요. 참 엇더케 하면 조흘가요. 내 아우 가트니 꺼리 업시 살 방침에 대한 具體案을 상의해 보고 십슴니다.
물에 빠저 떠나려 가논 사람이 볏집 한 대라도 붓잡을여고 애쓰는 것과 꼭 가튼 경우에 이른 氏에게 同情하지 안을 수 업섯다. 記者 입에서 말이 떠러지기도 전에 氏는 다음과 가튼 이야기를 계속한다.
「나는 재봉틀 하나만 월부로 마터서 어린애들 양복 가튼 것이나 지을여고 함니다. 그리고 이번에 長春서 떠러진 동생이 직업만 잇스면 곳 나오겟다고 지금 날마당 편지만 기다리고 잇슬텐데. 그애가 엇더케 직업을 엇게 되엿스면 근근히 사러 나갈 것 가튼데요. 어듸 적당한 직업이 업슬는지요. 그러치 안코는 도저히 살길이 업슬 것 가태요. 金氏의 고향―安城으 간다면 一家들이 거나려 주지 안으면 살 수가 업겟구요. 나는 어적게도 하도 답답해서 滿州 동포에게 慰安品을 보내주는 某會社 압헤 가서 한참 섯섯담니다. 옷은 이 모양으로 입고 검정 보선에 흙이 잔득 무든 고무신을 신고 거리로 왓다 갓다하니 곱게 입고 곱게 차린 서울 부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구경 삼아 서서 본담니다. 그러타고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은 안님니다.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안은 일이면 조곰도 부끄러울거야 잇슴닛가? 滿州에 잇슬 때 朝鮮에도 金氏의 동지가 만히 잇다고 들엇드니 와 보니 한 분도 업는 것 가터서 퍽 쓸쓸함니다. 나는 어적게도 동생한테 편지하기를 감옥에 가친 것보담 더 답답하고 더 아득하니 장차 엇지면 조겟는지 눈물밧게 업다고 하엿담니다.
氏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돌고 잇다. 할머님이 안은 큰 따님 恩愛가 목이 말으니 배 좀 사달나고 조르며 울고 잇스나 사 줄 념은 못하고 어린애를 달내기만 하시니 지갑에 돈 한푼 업는 記者의 맘은 압푸고 조리여서 한번 더―방문하기를 약속하고 문턱을 너머섯다. 바람이 차서 피부를 어이는 것 가햇다만은 보담 더 컴컴한 방에서 어린 것에 성화를 밧는 羅氏의 情形이 눈압헤 떠도라서 가슴이 압헛다. 이러한 처지에 억매어 우는 이 엇지 이 未亡人 한분일까?<83>
<8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