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임정존폐’ 문제와 ‘임정법통론’

 국민대표회의 적법·부적법 문제가 회의 개최 이전의 문제였다면 회의 기간 내 최대의 쟁점은 임정존폐 문제였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임정에 대한 개조·창조 양파의 좁혀질 수 없는 인식 차이가 있었다.
 먼저 임정을 부인하고 신기관의 건설을 주장한 창조파의 인식 근저에는 임정은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 세워졌던 여러 임시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즉 창조파는 지금의 임정은 3·1 독립선언 이후 갑자기 남에서, 북에서, 안에서, 바깥에서 여러 최고기관이 성립되어 세상에 발표된 것만 하여도 그 수가 4, 5개나 되는데 그런 가운데 일시의 사세로 대표적 행위를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331331≪독립신문≫, 1922년 12월 23일.닫기
 창조파가 임정을 일개 독립운동 단체로 사실상 격하시킨 이유는 임정의 지역적 제한성 때문이었다. 즉 이들은 임정이 여러 독립운동 지역 가운데 한 곳인 상해 한 켠에 있으면서 상해가 천하의 중심이오 상해에 모인 인물이 천하사를 左하면 좌하고 右하면 우할 터이니 상해안만 타협되면 서북간도도 노령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잘못된 상해만능주의에 빠져있거나,332332≪독립신문≫, 1922년 8월 12일.닫기 또는 다른 지역의 단체는 말하지 않고 오직 상해정부만 거론하는 상해관을 집중 비판했던 것이다.333333≪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닫기 이를 근거로 창조파는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 주장에 대해 “一粒만도 못한 상해 한 구석에서 전인구 4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효 중에서도 전부도 못되는 그들의 무리한 이론과 무가치한 위협”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334334≪독립신문≫, 1922년 8월 12일.닫기
 결국 창조파의 주장에 따르면 임정은 처음부터 인적·지리적으로 제한된 상해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임정으로는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대표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 대표들이 모인 국민대표회의를 통해서 향후 독립운동을 이끌 최고기관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개조파 역시 임정이 성립할 당시 인적·지리적 제한성이 있었고 현존하는 임정의 대표성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점에서는 창조파와 문제인식을 같이했다. 예컨대 안창호는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장하면서 지금 단계에서 노령이나 중국의 어떤 단체가 각 방면을 소집하면 모두 이에 응하지 않듯이 임정도 마찬가지라고 하며 임정의 한계를 지적했다.335335도산기념사업회,≪安島山全書≫中 (汎洋社出版部, 1990), 190쪽.닫기 그러나 개조파는 그 한계를 “혁명시의 불가피한 일”이라거나 아니면 “그때에는 시기의 절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여 문제인식의 근거가 달랐다. 때문에 이들의 임정에 대한 대응방식은 지금은 시기적 절박성으로 인해 생겨난 임정의 불충분한 점을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개조파가 임정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대응방식에서 임정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근저에는 임정의 성립과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창조파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지난 5년간 내외가 공인하고 다수 국민이 추대했던 기성정부이고 수만 명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한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라는 임정의 역사성을 중시했던 것이다.336336≪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4월 4일.닫기 또한 미국 등 열강들이 임정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임정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개조파가 이러한 임정의 역사성을 중시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임정의 법통문제 즉 임정법통론이었다. 1919년 9월 상해 임정이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하면서 한성정부를 봉대하기로 하여 임정의 역사적 성립 근거를 한성정부에 두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한성정부가 국내에서 성립되었고, 나아가 13도 대표가 모여 성립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개조파는 임정의 이러한 역사적 명분을 중시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조파는 국민대표회를 탈퇴하면서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할 것을 우려했듯이 창조파의 뜻대로 신기관을 건설했을 때 이 법통론을 근거로 국민대표회를 반대하고 임정유지를 고집한 이승만과 정부옹호파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법통론에 대해 의연히 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른바 법통문제에 매몰된 주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즉 당시≪독립신문≫에서는 “법통을 정하여야 할 절대 필요가 무엇인가. 지금 법통을 정하지 않으면 독립선언 후 4년간의 법통이 왜정부로 돌아갈까 염려함인가. 또 독립의 성공여부가 법통의 定石에 관계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10년, 10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서라도 법통문제에 전심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우리가 復國의 一日을 做來한다면 독립선언 후뿐만 아니라 망국 후 10년간의 법통도 왜정부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 만일 복국의 하루도 없다면 망국 후 10년은 고사하고 건국 후 반만년의 역사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하며 법통론을 비판했다.337337≪독립신문≫, 1922년 12월 23일.닫기 즉 한 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법통문제로 허송세월을 하지 말고 하루라도 속히 독립운동의 방침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임정존폐 문제가 쟁점이 된 이면에는 개조파·창조파·정부옹호파 사이에 현존하는 임정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에 커다란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다. 즉 개조파는 현실론을 바탕으로 임정을 인정하고 부분적 개조를 주장한 반면에, 창조파는 임정의 지역적·인적 제한성과 법통론의 무용성을 바탕으로 임정을 부인하고 신기관의 건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양파의 이같은 인식 차이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결렬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국민대표회의는 시국문제에 대한 창조·개조 양파의 입장차이와 정부옹호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국민대표회의의 좌절은 오히려 이 회의에 참여한 세력간에 그리고 임정의 현상유지를 고집한 정부옹호파 사이에 불신과 분열의 골만 깊게 했다. 그럼에도 국민대표회의는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에 여러 가지 의미있는 영향을 미쳤다.
 먼저 비록 좌절은 했지만 국민대표회의가 남긴 의의는 첫째 독립운동계에 국민대표회의를 통해서 법리론이나 임정법통론과 같은 ‘명분’보다는 운동의 ‘실제’를 보다 중시하는 경향을 낳은 점이다. 즉 국민대표회가 소집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독립운동의 실제에 맞지 않는 임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데 있었듯이 독립운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임정법통론이나 법리론과 같은 명분에 얽매이기보다는 독립운동의 실제적 근거와 경험을 기초로 삼을 것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둘째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명분과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현존하는’ 임정의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즉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의 조직형태로서 인식되어 왔던 ‘정부형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 모색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형태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 모색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이 일던 무렵 그 대안으로 아일랜드의 심편당과 터어키의 청년당, 이탈리아의 소년단 모양으로 우리도 대한의 혁명당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고, 여운형도 국민대표회 본회의에서 독립당 건설을 주장했다. 비록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임정 존폐문제를 둘러싼 시국문제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의 조직 형태로서 당적 형태를 본격적으로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이 회의는 이후 해외 독립운동계 내에 이념적 분화를 촉진한 점이다. 즉 창조·개조 양파는 이념이나 운동노선 등에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임정에 대한 입장이 분열과 결합의 원리로 더 중요하게 작용했었다.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계가 1920년을 앞뒤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을 수용한 이래 아직 내부적으로 이념적 분화를 모색하던 시대적 한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회의기간 동안 독립운동노선, 최고기관 건설과 같은 조직노선 등의 더욱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지 못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실패하게 한 내적 원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이후 독립운동계를 이념과 독립운동노선 등에 따라 재편시키고 반일 민족통일전선의 결성 노력을 더욱 진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尹大遠>

註 331
≪독립신문≫, 1922년 12월 23일.
註 332
≪독립신문≫, 1922년 8월 12일.
註 333
≪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
註 334
≪독립신문≫, 1922년 8월 12일.
註 335
도산기념사업회,≪安島山全書≫中 (汎洋社出版部, 1990), 190쪽.
註 336
≪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4월 4일.
註 337
≪독립신문≫, 1922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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