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_052_0030_0020_0040_0030_0020

나. 남북요인회담 및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김규식과 김구는 평양에 와 남북요인회담을 가질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김구는 연석회의에 잠깐 나가 인사말을 했을 뿐이고 김규식은 아예 참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도 북측과 소련측은 김규식과 김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요인회담을 열 것을 요구한 것은 자신들은 통일국가 수립의 방안을 협상하기 위해 북행한 것인데, 연석회의는 협상을 하자는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쪽에서 남북협상으로 더 많이 알려진 요인회담은 4월 26일에서 30일 사이에 열렸다. 4월 24일 저녁 김두봉의 초청으로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와 김일성 등이 만났을 때 ‘정치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26일 오후 7시부터 약 4시간에 걸쳐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간에 통일민족국가 수립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회담에서 김규식이 4월 21일 북행 직전에 공표한 5개 원칙을 북의 지도자들이 찬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김일성은 4김회담도 연석회의에서처럼 주로 단선단정 반대에 주력하려고 하였지만, 김규식 등 두 김은 ①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 ②남북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의 수립, ③남북통일운동을 위한 조직문제의 토의를 제기하였다.441441≪서울신문≫, 1948년 5월 3일.
≪경향신문≫, 1948년 5월 3일(국사편찬위원회 편,≪자료 대한민국사≫7, 14∼15쪽).
닫기
북은 남에 이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으므로 2항과 3항, 특히 2항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다. 다음 날인 27일에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이상 민족주의자)·허헌·박헌영·백남운·김일성·김두봉·崔庸健·주영하(이상 좌익) 등 15인이 회동하여 남북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4월 28일에는 김규식과 김일성의 개별회담이 열렸다. 김규식은 단선반대뿐만 아니라, “통일 조선을 창조하는 미래의 초석이 될 남북연합기구 창설”을 주장하였다.442442<레베데프비망록>20,≪부산일보≫, 1995년 3월 24일(도진순, 앞의 책, 274쪽에서 재인용).닫기 26일에 제의한 2항을 가다듬어 다시 제의한 것이었다. 4김회담·2김회담 등에서 논의되고 합의된 것은 김규식의 5원칙을 기준으로 하여 남측에서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이, 북측에서 연석회의준비위원장 주영하가 대변인으로서 공동성명서 초안을 다듬어갔다.
 4김회담 등 요인회담의 공동성명서를 어떠한 형식으로 발표할 것인가도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4월 30일 먼저 4김회담에서 공동성명서를 승인한 뒤 곧바로 열린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다시 통과시킨 다음 북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42개 정당·사회단체가 서명하였다. 대외발표용으로 명의를 빌린 셈이었다. 이 공동성명서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명의로 되었다.443443≪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보고문 及 결정서≫, 54∼55쪽(김남식 등 편, 앞의 자료총서 13, 305∼306쪽).
도진순, 앞의 책, 390쪽.
닫기
공동성명서 4개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외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들 大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下記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全文임).
4. 남조선 단독선거는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이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報告文及決定書≫, 54∼55쪽;金南植·李庭植·韓洪九 편,≪한국현대사자료총서≫13, 돌베개, 1986, 905∼906쪽).

 공동성명 1항은 김구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도 주장하였지만 표현상 북측 입장이 더 반영되었다. 그런데 이 1항은 김규식이 1947년 9월 쉬티코프가 미·소 양군 철수를 주장할 때부터 역설한 것, 곧 남한의 안보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2항이 바로 이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북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분은 북이 하고 싶지 않은 양보였다. 이 성명서에는 외군철수 후 유엔 등에 의한 전쟁이나 혼란을 막기 위한 적극적 방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김규식은 특별히 이 부분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2항과 같은 소극적 방식으로밖에 처리되지 못하였다.
 남북통일국가 수립의 방안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 3항이다. 김구와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북에 온 것은 주로 이 3항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은 곧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특히 이 3항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때까지 북은 외군철수 후 막연히 선거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만 했을 뿐이었다. 북이 3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4월 29일 김일성이 가진 기자단회견에서 다른 부분은 다 이야기했는데, 이 3항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444444최성복, 앞의 글, 68쪽 참조.닫기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김일성은 단선단정 반대, 외군철수에 주력하였고, 구체적인 통일방안 채택은 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3항과 관련된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은 남북총선거에 의해 수립될 입법기관에서 조선헌법을 제정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4월 28·29일-이 날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열린 북조선인민회의특별회의에서 자신들이 마련한 헌법원안을 찬동한다는 형태로 사실상 승인한 헌법초안을445445윤경섭, 앞의 글, 91∼94쪽.닫기 부정하는 행위였다.
 공동성명 제4항은 김구·김규식 등도 주장하였지만, 강한 어조으로 표현되었다. 이 4항은 김구·김규식 등 남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북의 단선단정도 거부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제3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4김회담에서는 38선 이남에 주로 위치한 연백평야에 수리조합물을 다시 내려보내는 문제, 남에 전기를 계속 송전하는 문제, 曺晩植의 월남 허용 문제, 만주의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유골 이장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김일성은 앞의 두 가지는 들어주겠다고 했으나,446446송남헌, 앞의 글, 220쪽.닫기 송전 등은 얼마 후 중단되었다.
 평양에서는 메이데이행사에 이어 5월 2일 대동강가 쑥섬에서 4월 평양회의를 경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김구·김규식·김일성 등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15인과 김구·김규식을 안내한 강양욱 등이 참석하였다.447447중앙일보 특별취재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중앙일보사, 1993), 361쪽.닫기 5월 4일 김구·김규식 일행은 평양을 출발하여 5월 5일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돌아왔다.

註 441
≪서울신문≫, 1948년 5월 3일.
≪경향신문≫, 1948년 5월 3일(국사편찬위원회 편,≪자료 대한민국사≫7, 14∼15쪽).
註 442
<레베데프비망록>20,≪부산일보≫, 1995년 3월 24일(도진순, 앞의 책, 274쪽에서 재인용).
註 443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보고문 及 결정서≫, 54∼55쪽(김남식 등 편, 앞의 자료총서 13, 305∼306쪽).
도진순, 앞의 책, 390쪽.
註 444
최성복, 앞의 글, 68쪽 참조.
註 445
윤경섭, 앞의 글, 91∼94쪽.
註 446
송남헌, 앞의 글, 220쪽.
註 447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중앙일보사, 1993), 361쪽.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