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瀾齋日記 解題
최근 고문서를 통한 생활사 전반에 걸친 연구성과는 고문서 그 자체로서의 사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고문서학의 학적 체계화를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역사학의 1차 사료로서 고문서에 대한 인식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때를 같이 하여 각 대학의 도서관과 박물관, 연구소를 비롯하여 여러 국학 기관에서도 많은 고서·고문서를 자료집으로 펴내고 있다. 그 가운데 일기류 자료집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그 만큼 일기류 자료집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일기류 자료의 대부분이 私的이면서도 객관성이 다소 결여된 기록이라는 한계성을 안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이면서도 다양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당 시대의 일정 부분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에 간행하는 韓國史料叢書 제44집은 일제시기 경기도 용인지역을 중심으로 쓰여진 鄭觀海(1873~1949)의 생활일기를 편찬·간행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庚戌國恥 직후인 1912년부터 1947년 解放政局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일기는 순 한문으로만 쓰여져 있다. 日帝 초기만 하여도 이미 신식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書堂이나 私塾이 폐지되는 등 한문교육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으며, 나아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에 의한 전통교육 폐지론이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 일기의 필자는 전통교육의 필요성과 그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한문 有用論을 주창하고 있다.
약 35년간에 걸쳐 쓴 이 일기의 체제는 일반적인 생활일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도 그 형식이나 내용구성은 조선시기의 일기체제1)와 매우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미 조선사회와 일제시기라는 단절된 생활 여건 등에 의하여 그렇게 변화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일기는 날자와 干支, 날씨를 기록한 뒤 그날의 일상사에 대한 정황과 소회를 적고 있다. 여기에서 日曆은 모두 음력을 주로 썼으며 어떤 연대에서는 양력을 倂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양력이 절후에 맞지 않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일기책은 총 24권으로서 물자가 매우 귀하였던 일제시기인 만큼 주로 갱지를 이용하였고, 각 권의 규격이나 면수는 일정하지가 않다. 여기에서 권수라는 것 또한 편의상 成冊된 수로 표기한 것이다. 더불어 일기는 각 권의 行數가 정하여져 있지도 않으며 字數 또한 일정하지 않다. 각 권의 가로×세로의 규격과 면수, 기록 연기는 대개 다음 표와 같다.
규격(세로×가로)cm면수(장)기간
120·5×2037壬子(1912) 1월 30일~4월 22일
226·5×1810壬子(1912) 9월 1일~癸丑(1913) 8월 25일
326·5×20·35戊午(1918) 8월 25일~9월 21일
424·5×2381庚申(1920) 1월 1일~辛酉(1921) 1월 19일
524×22·539癸亥(1923) 11월 15일~甲子(1924) 12월 1일
624×22·549乙丑(1925) 1월 1일~丙寅(1926) 1월 18일
733·5×228丙寅(1926) 12월 23일~丁卯(1927) 4월 19일
823·5×22155戊辰(1928) 11월 21일~己巳(1929) 12월 12일
923·5×22~23·5134己巳(1929) 12월 20일~庚午(1930) 12월 29일
1023×22·397辛未(1931) 1월 1일~9월 21일
1124×22·363辛未(1931) 9월 22일~壬申(1932) 11월 10일
1222·5×21·763壬申(1932) 11월 13일~癸酉(1933) 10월 5일
1323×2260癸酉(1933) 10월 30일~甲戌(1934) 11월 8일
1424·2×2255甲戌(1934) 11월 9일~乙亥(1935) 3월 30일
1523·5×24154丙子(1936) 閏3월 1일~丁丑(1937) 12월 20일
1623·5×21·730丁丑(1937) 12월 21일~戊寅(1938) 5월 23일
1723·5×21·766戊寅(1938) 9월 30일~己卯(1939) 12월 24일
1823·5×21·756己卯(1939) 12월 25일~庚辰(1940) 9월 11일
1923·5×21·761庚辰(1940) 9월 21일~辛巳(1941) 5월 28일
2027×19·318甲申(1944) 10월 16일~12월 30일
2124×22·337乙酉(1945) 1월 1일~10월 2일
2228·5×1842乙酉(1945) 10월 3일~丙戌(1946) 8월 6일
2328·5×17·547丙戌(1946) 9월 20일~丁亥(1947) 7월 22일
2429×17·38丁亥(1947) 11월 25일~戊子(1948) 1월 28일
『觀瀾齋日記』의 필자 鄭觀海는 初名이 東魯이며 字를 聖三, 號를 觀瀾이라 하였다. 貫鄕은 慶州2) 이다. 관란은 조선 말기인 고종 10년(1873)에 태어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9에 졸하였다. 따라서 이 일기는 그의 중반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쓴 것이다.
이 일기가 쓰여진 1912년에서 1947년까지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이 더욱 극악스러워져 가는 시기이면서,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중국대륙으로의 진출과정에서 빚어지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해방공간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기이다. 이러한 격동기의 시대상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일기의 주인공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시대상황에 맞게 적고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는 비록 조금 떨어진 지역이기는 하지만, 거의 서울과 동시에 그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이는 일기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당시의 향촌민이 감지하는 정치적 감각이 매우 민감하였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중일관계와 국제정세의 판도에 대한 예견 등은 매우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저자는 학문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기의 전반부에는 주로 신식학교의 설립으로 인성교육을 강조하였던 전통교육이 무너짐을 강조하면서, "今世雖尙新學 後世子孫 必不以能此之人爲名祖 爲其名祖者 惟其尙文學之人也"라 하여 후세의 자손들은 모름지기 문학(한문을 통한 전통교육)을 숭상하는 이를 名祖로 받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當此亂世 人皆趨新俗 而我獨守舊規"라 하고, "擧世輻奏於新學 而余以獨力輓回"라 하여 혼자의 힘으로서라도 일제의 新學에 맞서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은 마음을 다스리는 본령으로서 비록 漢文이 亂世에는 賤文이나 治世에는 貴文이므로, 지금 모든 이가 한문의 無用을 말하고 있으나 이는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들이 자신을 두고 "守舊"라고 하는데, 이 같이 변하지 않는 품성이 모두 학문의 힘에 연유한 것3)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굳이 그의 학문적 연원을 따진다면, 洛論으로 대표되는 陶庵李縡 계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계통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梅山洪直弼鼓山任憲會艮齋田愚·野愚徐廷淳으로 연결되고 있는 학통이다. 이때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東田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일기의 저자인 觀瀾과는 매우 밀접한 친교를 맺고 있는 사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전은 일기에 "東田丈"으로 표기되는 인물로서 용인지역에서는 학문적으로 꽤 알려진 孟輔淳4)을 이른다. 동전장이라고 하는 데에는 동전이 1862년생으로 관란보다는 11년 연장인 셈이었기 때문이다. 동전은 일찍이 고산임헌회의 제자인 야우서정순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때 간재동전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하였다고 한다. 관란은 이 같은 동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또한 癸巳年(1893)에 田艮齋에게 직접 나아가 배웠다고 하였다.5) 그 뒤 간재의 학문에 대하여 자주 논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면, 그의 師承關係가 간재학통으로 이어졌음을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관란은 이러한 학문적 바탕을 기반으로 서당을 열어 후진양성에 정진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경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家計經濟와 地域經濟가 일제의 침탈로 피폐되는 상황에서 "絲穀經濟", 즉 農桑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지론은 언제나 人心을 바로잡는 윤리의식의 앙양과 일제의 수탈로부터 경제를 일으키는 두 가지 명제를 실천하는 데 있었다.6)
이상에서와 같이 이 일기는 격동기 사회를 살아가는 재지 지식인의 일상에 비친 내면적인 삶의 모습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여건, 나아가서는 당시의 전반적인 국제동향에 관한 인식과 이에 대한 향촌민의 대응까지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비록 단편적이고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어느 한 개인이나 가문 또는 一鄕의 동향을 그려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일제시기에서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경제상을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사료라고 하겠다.
張 弼 基
1)대체적으로 조선시기 생활일기는 그 내용 구성면에서 일정한 정형을 지니고 있다. 그 대강을 보면, ①날씨와 기후, 자연재해 등 자연현상, ②식사와 문안, 관혼상제의 의례, 친족왕래 등의 일상사를 통한 奉祭祀接賓客, ③서신왕래, 나들이, 교우관계, ④농사, 노비와 토지 경영 등의 경제활동, ⑤수령과 아전 등의 관리 접촉, 부세와 환곡, 지방정책 등의 지방통치 관계, ⑥향교출입, 향회, 동회, 풍속, 통문, 呈疏관계 등 향촌활동상, ⑦백일장, 시문활동, ⑧사물에 대한 玩賞, 漁獵, 鷹 등을 통한 취미활동, ⑨지위향상을 위한 科試활동, ⑩朝報나 전문에 의한 중앙의 정국동향 파악 및 여행을 통한 견문활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독서진척 과정, 약방문에 관한 劑藥과 鍼灸, 佛事관계 등 당시의 생활환경에 관한 기술을 하기도 하였다.
2)『慶州鄭氏 文獻公派譜』에 의하면 鄭觀海 家系는 문헌공파 중에서도 齊安公 孝常派에 속한다. 특히 觀瀾이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온 '鄭榮大 傳統 家屋'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종손(사료소장자 鄭仁均)이 살고 있다. 본래 이 가옥은 朝鮮 正祖代에 禁衛大將·摠戎使·訓鍊大將·兵曹判書 등을 역임한 李柱國(1721~1798)의 생가로서 1918년에 경주정씨일가가 이사하여 世居하게 되었다 한다. 아울러 일기에 등장하는 정관해의 가계를 간략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3)"吾稟性所偏者多 能變者少 不變者多 則學問之力似不可無"
4)東田孟輔淳에 대해서는 鄭廣淳, 「『龍仁明倫學校日記』에 관하여」(『경기향토사학』4, 1999) 참조.
5)『觀瀾齋日記』 壬子年 4月 3日條.
6)"今世有二大禍網 設學校蔑倫理 治金融脫財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