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題




1、서지 사항과 필자 이력
『최병채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한 자료로、필자 최병채의 아들 최빈규(崔斌奎) 소장 문서 중에 하나이다。이 일기는 최병채가 21살이 되는 1927년부터 68세인 1974년까지 47년간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책 수가 모두 121책에 달할 정도로 분량이 많아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일차적으로 1945년 해방까지의 일기를 우선 간행하기로 하였다。일기 원문은 주로 한문 해서와 초서로 되어 있는데、1942년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되기도 했다。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원문보기에서 원본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최병채는 1907년 4월 16일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북면 백암촌 사제에서 출생했다。초명은 최병권이고、후에 최병채로 개명하였다。호는 운하(雲下) 또는 수경거사(水鏡居士)이며 자는 맹숙(盟叔)이다。아들 최빈규씨가 부친의 약력을 ‘운하약력(雲下略歷)’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이를 재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서기 1907년(정미、광무11) 4월 16일 6시 전라도 진산군 북면 백암촌 사제출생
一、1909년 3살 오른쪽 눈 실명
一、1913년 7살 엄친(嚴親)에게 천자문 수학
一、1918년 7월 연산 교천리 주사 이만무(李晩茂) 선생 문하에서 수업
一、1921년 9월 진산공립보통학교 2학년 입학
一、1926년 2월 진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졸업、이후 사제에서 한문학 연구
一、1927년 5월 장남 창규(昌奎) 출생
一、1928년 1월 운하가숙(雲下家塾) 개설
一、1931년 6월 자친상(慈親喪) 당함
一、1935년 5월 2남 득규(得奎) 출생
一、1937년 3월 유림 천거로 수원궐리사(水原闕里祠) 직원 역임
一、1939년 10월 3남 빈규(斌奎) 출생
一、1941년 8월 일제에 의해 운하가숙 폐쇄、사제에서 성리학 연구 정진
一、1946년 1월 운하가숙 재건
一、1951년 11월 엄친상(嚴親喪) 당함
一、1959년 11월 부인 양씨상(梁氏喪) 당함
一、1960년 3월 운하가숙 개치(介峙)마을 일시 이전
一、1962년 3월 운하가숙 원백암(元白岩) 사제로 환원
一、1967년 1월 ⚶일 수연(晬宴)을 설연함
一、1967년 8월 진산향교 전교(典校)에 선임
一、1968년 2월 진산 유림 중심 명륜계(明倫契) 창설、존성명륜(尊聖明倫) 사업 적극 추진。
一、1968년 7월 유도회(儒道會) 진산지부장 선임、유도 진흥에 노력함。
一、1974년 3월 13일 향년 68세로 별세。

2、『최병채일기 5』 내용
『최병채일기 5』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기를 담고 있다。최병채는 이제 30대 후반으로 장년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실제 1945년 봄 최병채는 39살에 장남 창규의 혼인으로 시아버지가 된다。39살에 며느리를 보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매우 빠른 것이지만、조선시대로 보면 일상적인 일이다。이 시기 혼례나 제례는 여전히 조선시대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업은 제지공장 사업이 주였는데、공장은 날씨 등으로 휴업하는 때가 많았고 직공들은 주인 마음과 같이 움직여주지 않아서 속상해할 때가 많다。특히 이 시기에는 여자직공도 생겨서 주목이 되기도 한다。여공으로 표현되는 이 여자는 비교적 일을 잘 했지만、남자들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 등으로 결국 얼마되지 않아 해고를 하게 된다。제지공장 운영은 쉽지는 않았으나 생계를 유지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역시 해방일 것이다。1942년까지 좋았던 일본의 전쟁 상황은 1943년 이후가 되면、최병채의 표현대로 ‘치열’해지면서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44년에는 더욱 나빠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점차 일본의 정책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된다。그리고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에는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된다。해방의 사회 분위기를 최병채는 기쁨으로 묘사하고 있다。
1943년 가족 상황을 보면 이때에는 임희와는 헤어져 간간히 소식을 듣는 정도이다。그래도 가끔 임희 꿈을 꾸면서 여전히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또 우연히 마주치면서 다시 만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그러나 결국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재결합은 없었다。오히려 얼마 후인 1944년 초에 소실 이씨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인 양씨는 여전히 집안일과 농사일、직조 등의 일을 병행하며 과중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창규는 공부를 마치고 직업을 갖고자 노력했다。아버지는 간혹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고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소개하자면、호랑이 이야기가 있다。당시 1924년 전남지역에서 호랑이 6마리가 포획된 것이 마지막이라고 전해지고 있었는데、1943년 이해에 호랑이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1월 12일 기사에、“호랑이가 노루를 쫒는 것을 보았다고 사촌 형이 말하였다。백주에 대호(大虎)가 횡행하였는데 처음 듣는 일이다。”고 기록했다。호랑이는 당시에 영물로서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이다。
1943년은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치열한 때로서 조선은 그 영향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일기에는 훈련、노동자 모집、공출과 관련된 기사가 무수하다。“40세 이하 청장년 총훈련을 실시한다。”(4월 26일) “저녁에 면서기 유봉식(兪鳳植)이 노동자 모집 때문에 왔다가 갔다。”(5월 11일) 등 무슨 노동자를 뽑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이런 기록들이 수시로 보인다。
공출 관련 기록도 많다。공출 품목은 1942년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해졌다。거의 공출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면화、보리、가마니、밀、송진、갈피(葛皮 칡껍질)、대마(大麻)、종이、볏집 등이다。“면화 20근을 공출하였는데 우리 집에 할당된 양은 200근이다。”(1월 9일)、“우리집에 할당된 가마니는 18매이다。다행히 반장의 노력 덕분에 지금 완료하였다。한 매당에 ⚻전(錢) 지급하였다。”(3월 13일)、“근래에 동네 사람이 송진[松脂] 공출로 매우 고생하고 있다。각 집 당 30관(貫)씩 할당되었다。나는 아우들과 함께 60여 근을 할당받았는데 동생 병흠(炳欽)이 힘을 다해 정리하고 있다。”(9월 2일) 등의 기록이 공출의 양상을 보여준다。당시 송진은 정제해서 연료로 만들어 선박 등에 사용했다고 한다。
미곡(米穀) 할당이 지나치게 심해서 다시 조정하는 일도 있었고、벼농사가 흉년인데도 벼를 공출해야 해서 그야말로 먹을 식량이 없다는 푸념도 나왔다。“미곡공출통지서를 받았는데 11가마 2말 5되 할당되었다。우리집 뿐만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 이처럼 과중되었으니 이것은 큰 우려이다。”(11월 6일)“ 금년 우리 마을 벼 공출 할당량이 공정하지 못하여 다시 개정하였다。”(11월 10일) “우리 마을 금년 벼농사는 이미 흉년이다。그런데 공출하고 남은 벼로는 도저히 식량을 할 수 없다。”(11월 11일)는 기록에서 절박함을 볼 수 있다。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생활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소실 이씨를 들였다는 사실이다。어떻게 맞이하게 됐는지는 나오지 않지만、살림집을 마련한 후에는 임희 보다 더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소실은 집안일이나 농사일도 열심히 한다。물론 부인 양씨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집안 청결에 힘쓰고 바느질을 하며 김매기、직조、심지어 시아버지 모시는 일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임희에 비해 가정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계속 경성에 가보고 싶어하고 또 실제로 가는 것을 보면、부인 양씨에 비해 바깥 활동이 좀 더 자유로운 것을 볼 수 있다。그리고 소실이 ‘여자연성사(女子鍊成事)’라고 하여 단체활동을 하기도 하는데 최병채는 이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처첩 간의 갈등은 임희 때 보다는 약하지만、전혀 없지는 않다。
창규는 이때에 철도국에 취직이 돼서 집을 떠나 있었는데、건강상의 문제、또 일이 위험한 관계로 얼마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다。집을 떠나 있는 동안 부인 양씨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병흠은 면사무소를 그만두고、집에서 이른바 놀고 있다。병흠이 유학을 하고 싶을 정도로 포부가 있었던 만큼 면사무소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던 모양이다。다니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자주 출근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결국은 얼마되지 않아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
1944년 전쟁은 그야말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이제는 공출뿐만 아니라 출력 즉 노력 동원이 일상화된다。굴지공사(掘池工事)는 거의 연일 계속되는데 남자만이 아니고 남녀가 총 동원되는 형태가 많다。이제 사람들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한다。더구나 식량 배급은 늘 부족해서 더욱 힘들었다。물론 그 와중에도 적국을 격멸하자든가 하는 구호는 계속되었는데、그다지 의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청년들이 지원병으로 선발되는 것을 이제는 꺼리는 모습이 발견된다。최병채가 구장을 하는 등 관변 일을 많이 하는 만큼 때로는 지원병 선발에 간여했다는 오해를 받고 원망을 사기도 한다。이 모든 상황이 1942년 지원병에 기꺼이 지원하고 낙방하면 섭섭해 하던 것과는 격세지감이 있는 일이다。
1945년 일기는 앞부분에 비망록이 있다。1945년에 있었던 2가지 큰일을 기록하고 그에 따른 소회를 적은 것이다。첫 번째 일은 그해 아들 창규가 음력 4월 5일(양력 5월 16일)에 대전의 이희석(李熙錫)의 딸과 혼인한 일이고、두 번째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서 조선이 독립한 일이다。최병채는 조선이 해방이 돼서 삼천만 민족의 환호성이 삼천리 강산에 충만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1945년 초기 일기는 창규의 혼인이 진행되는 과정과 혼인을 준비하는 과정들에 대한 기록이 다수이다。특히 부인 양씨는 살림을 준비해주는 데에 신경을 많이 쓴다。장롱이며 이불[衾枕]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최병채는 특별 식량배급을 신청했다。당시 혼인과 같은 큰 일이 있을 경우 특별신청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혼사에 청첩된 사람은 대략 200명 정도인데 사실 당일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참석한 사람중에는 당일 돌아간 사람도 있고 며칠 유숙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오고 있기는 했지만、사람들에 대한 노력동원은 계속 됐다。군부공사、철도공사 등 다양한 동원이 있었다。동생 병중은 함경도 길주 철도공사에 동원됐다가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은인 이원재훈(李原在塤)을 만나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최병채는 그 사람의 은공에 대해 각골난망이라고 표현한다。6월이 되면서 조선에도 공습이 빈번해졌다고 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그 이후 정황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독립지사들이 귀국하는 것과 격변했던 국내의 정세와 소회、다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안재홍、여운형、이승만、김구、김일성、막카사、하지 등의 이름들이 나타난다。또 독립 후 고향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귀향하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해방 후 유언비어와 도적 등의 망동、폭등하는 물가로 불안정했던 생활상 등도 보인다。자신이 운영하는 제지공장의 제지를 싣고 수원、오산등지로 판로를 개척하려 간 적이 있는데、실제 이 지역에서 부르는 값이 매우 낮아서 결국 헐 값에 넘기고 올 수밖에 없는 상황도 경험 한다。해방 직후의 물가 불안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그리고 정치인들 간의 입장차가 점차 드러나자 조선의 정치상황이 복잡다단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불안감 보다는 새로운 희망에 차 있는 모습이 우선한다。1945년 11월 12일 “… 이 강산 삼천리 서름이 가고 해방의 감격이 용소슴치니 시마의 종소리 힘차게 울리니 이러서라 삼천만 우리 동포야 …”라고 둘째 아들 득규의 학습장에 들어 있는 창가를 그대로 옮겨오면서 희망에 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편사연구관 이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