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이 침략하다 ( 기원전 28년 04월30일 )

〔30년(B.C. 28)〕 낙랑인(樂浪人)001001 낙랑인(樂浪人): 낙랑은 한(漢)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중국의 변군(邊郡)으로, 서기 313년 무렵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20여 년간 존속하였다. 관할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애초에는 위만조선의 중심지에 설치한 조선현(朝鮮縣)을 필두로 11개의 현이 소속되었으나, B.C. 82년경에 이르러 처음 낙랑군과 함께 설치되었던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番郡)을 흡수하여 그 지역들을 각각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와 남부도위(南部都尉)의 관할 구역으로 편제하면서 규모가 배가되었다.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는 후한 초에 이르러 광무제가 낙랑의 토착인 왕조(王調)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면서 폐지되었고, 이후 고구려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낙랑군의 세력 범위는 급속히 축소되었다. 서기 204년 무렵에는 당시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씨 정권이 둔유현(屯有縣: 지금의 황해도 황주로 비정) 이남의 과거 낙랑군 남부도위 관할 지역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변군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게 하였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의 요령성 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으나(尹乃鉉, 1985),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한편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과 낙랑군이 위치했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혁거세거서간 시기에 낙랑인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내용의 본 기사는 사료적 신빙성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인 학자들은 아예 후대의 날조된 기사로 치부해 왔으며(津田左右吉, 1924),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한사군에 와 있던 관리 및 상인집단이 군대를 대동하고 교역을 위하여 바닷길로 경주 지역까지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고(李鍾旭, 1979), 이른바 ‘북진한(北辰韓)’ 세력이 남하하던 도중에 낙랑과 충돌한 사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1989). 그리고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앞 시기로 소급·부회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宣石悅, 200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기에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 지어 ‘낙랑’을 자칭한 옥저 지역의 토착 세력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安植, 1997; 文昌魯, 2004). 이와는 달리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은 본래 ‘진한(辰韓)’으로 표기되어 있던 원자료가 『삼국사기』에 기술되기까지 수차에 걸쳐 전록(轉錄)되는 과정에서 편사자의 오해로 말미암아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한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19, 「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25, 洛陽堂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鍾旭, 1979, 「斯盧國의 成長과 辰韓」, 『韓國史硏究』 25
尹乃鉉, 1985,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 41, 일지사
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文安植, 1997, 「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이는 樂浪·靺鞨史料에 관한 檢討」, 『傳統文化硏究』 5, 조선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宣石悅, 2001, 『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혜안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
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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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곡식도 한데에 쌓아 들판에 널린 것을 보고서 서로 말하기를, “이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道)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군사를 몰래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병사를 물려서 돌아갔다.

註 001
낙랑인(樂浪人): 낙랑은 한(漢)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중국의 변군(邊郡)으로, 서기 313년 무렵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20여 년간 존속하였다. 관할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애초에는 위만조선의 중심지에 설치한 조선현(朝鮮縣)을 필두로 11개의 현이 소속되었으나, B.C. 82년경에 이르러 처음 낙랑군과 함께 설치되었던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番郡)을 흡수하여 그 지역들을 각각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와 남부도위(南部都尉)의 관할 구역으로 편제하면서 규모가 배가되었다.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는 후한 초에 이르러 광무제가 낙랑의 토착인 왕조(王調)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면서 폐지되었고, 이후 고구려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낙랑군의 세력 범위는 급속히 축소되었다. 서기 204년 무렵에는 당시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씨 정권이 둔유현(屯有縣: 지금의 황해도 황주로 비정) 이남의 과거 낙랑군 남부도위 관할 지역에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변군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게 하였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의 요령성 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으나(尹乃鉉, 1985),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한편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과 낙랑군이 위치했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혁거세거서간 시기에 낙랑인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내용의 본 기사는 사료적 신빙성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인 학자들은 아예 후대의 날조된 기사로 치부해 왔으며(津田左右吉, 1924),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한사군에 와 있던 관리 및 상인집단이 군대를 대동하고 교역을 위하여 바닷길로 경주 지역까지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고(李鍾旭, 1979), 이른바 ‘북진한(北辰韓)’ 세력이 남하하던 도중에 낙랑과 충돌한 사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1989). 그리고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앞 시기로 소급·부회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宣石悅, 200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기에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 지어 ‘낙랑’을 자칭한 옥저 지역의 토착 세력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安植, 1997; 文昌魯, 2004). 이와는 달리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은 본래 ‘진한(辰韓)’으로 표기되어 있던 원자료가 『삼국사기』에 기술되기까지 수차에 걸쳐 전록(轉錄)되는 과정에서 편사자의 오해로 말미암아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한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19, 「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25, 洛陽堂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鍾旭, 1979, 「斯盧國의 成長과 辰韓」, 『韓國史硏究』 25
尹乃鉉, 1985,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 41, 일지사
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文安植, 1997, 「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이는 樂浪·靺鞨史料에 관한 檢討」, 『傳統文化硏究』 5, 조선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宣石悅, 2001, 『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혜안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
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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