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 기원전 20년 02월 )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049049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닫기마한(馬韓)050050 한강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러 소국(小國)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동이전, 한전에 자세한 관련 기록이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백제(百濟)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있다.닫기에 보내 예를 갖추었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辰韓)·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인데051051 靑銅器文化 단계의 馬韓 小國연맹체는 진한이나 변한보다 선진집단이었음이 考古學的인 遺物들에 의하여 증명된다(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1982, 37~45쪽). 그러므로 철기문화를 소지한 부여계의 백제와 위만조선 및 漢族 流民이 남하하기 이전에는 진한과 변한이 마한에 예속되어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사실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기사, 즉 弁辰韓 24국 중에서 12국은 辰王 곧 馬韓王에 臣屬되어 있었다든지 혹은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진한에게 주어 살게 했다는 기록과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고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王으로 군림하였는데, 諸國王의 先代는 모두 馬韓 種族의 사람이다》라고 한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도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다.닫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052052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75, 한전에 따르면,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삼한의 여러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변진 12국이 진왕(辰王)에게 예속되어 있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한시대 초기의 마한이 진한·변한보다 세력 규모에 있어 우위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동시에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닫기 [호공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성인(聖人)이 일어난 뒤 인사(人事)가 잘 닦이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053053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닫기·054054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겸허하게 저를 보내 우호를 닦으시니 이는 가히 예의가 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의도이십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호공을] 돌아가게 해주었다. 예전에 중국인들이 (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辰韓)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055055 서기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북방 유이민들이 대거 남하하여 辰韓 지역에 거주한 사실은 考古學的인 유물과 각종 문헌 자료에 의하여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辰韓條와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내용에 상응한다.닫기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을 알 수 없다. 본래 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註 049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
註 050
한강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러 소국(小國)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동이전, 한전에 자세한 관련 기록이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백제(百濟)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註 051
靑銅器文化 단계의 馬韓 小國연맹체는 진한이나 변한보다 선진집단이었음이 考古學的인 遺物들에 의하여 증명된다(이현혜, 《삼국사회형성과정연구》, 1982, 37~45쪽). 그러므로 철기문화를 소지한 부여계의 백제와 위만조선 및 漢族 流民이 남하하기 이전에는 진한과 변한이 마한에 예속되어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사실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기사, 즉 弁辰韓 24국 중에서 12국은 辰王 곧 馬韓王에 臣屬되어 있었다든지 혹은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진한에게 주어 살게 했다는 기록과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고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王으로 군림하였는데, 諸國王의 先代는 모두 馬韓 種族의 사람이다》라고 한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도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다.
註 052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75, 한전에 따르면,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삼한의 여러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변진 12국이 진왕(辰王)에게 예속되어 있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한시대 초기의 마한이 진한·변한보다 세력 규모에 있어 우위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동시에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註 053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
註 054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
註 055
서기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북방 유이민들이 대거 남하하여 辰韓 지역에 거주한 사실은 考古學的인 유물과 각종 문헌 자료에 의하여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辰韓條와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내용에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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