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001001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 제4대 왕이자, 석(昔)씨의 시조. 본서에 따르면, 서기 57년에 즉위하여 80년에 사망하였다.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었다가, 처남인 유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닫기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002002 토해(吐解): 탈해의 다른 이름. ‘吐’는 ‘토함산(吐含山)’의 ‘토’와 같은 글자임이 유의되는데, 탈해와 토함산의 관련성이 깊다는 사실에 구애되어 일부러 ‘吐’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이 상정된다.닫기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003003 나이가 62세였다: 탈해이사금의 즉위년이 서기 57년에 해당한다면, 그가 출생한 해는 B.C. 5년이 된다. 그런데 본 기사의 뒷부분을 보면 탈해가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한 시기가 혁거세 재위 39년이라고 한다. 본서의 기년상으로, 혁거세 재위 39년은 B.C. 19년이 되는바, 출생보다 14년 앞서 진한의 해안에 출현한 것이 되어 연대를 둘러싼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닫기 왕의 성은 석씨(昔氏)로,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004004 아효(阿孝) 부인: 남해차차웅의 맏딸로서,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5년조에 탈해에게 시집을 간 것으로 나오는 여성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나오고, 같은 책 기이제1의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 전한다.닫기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005005 다파나국(多婆那國): 위치는 알 수 없음. 본 기사에서는 왜국의 동쪽 1천 리에 있는 나라라고 했으나, 아마도 바로 뒤에 보이는 여국(女國)과 관련지어 나온 후대의 윤색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아버지는 완하국(玩夏國) 함달파왕(含達婆王)인데, 화하국왕(花厦國王)이라고도 한다.”라고 소개하였고, 같은 책 기이제1의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서는 탈해 스스로가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실렸는데 그에 대한 협주로 “한편에서는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국은 혹은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1천 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덧붙여져 있다. 다파나국이라는 명칭은 중국 측 기록인 『위서(魏書)』 권8 세종기(世宗紀) 영평(永平) 원년(508) 3월 기해조에 당시 북위에 조공을 바친 서역(西域)의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나오는 ‘다파나가(多婆那伽)’와도 연관성이 엿보이며, 『삼국유사』에 전하는 부왕(父王)의 이름 ‘함달파’의 ‘달파’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한편 함달파는 불교 경전에서 천룡팔부(天龍八部) 중의 하나로, 수미산(須彌山) 남쪽의 금강굴(金剛窟)에서 살며 제석천(帝釋天)의 음악을 맡아 보는 신이라고 하는 ‘건달파(乾達婆)’와도 음이 유사하여, 불교적 관념에 따른 윤색일 가능성도 크다.닫기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006006 왜국(倭國)의 … 1,000리에 있다: 탈해의 모국에 해당하는 다파나국이 본래 왜국의 동북 1,000리에 있다는 전승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앞서 호공도 왜국에서 건너온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보면, 경주 지역에서 탄생하지 않고 외부에서 이주해 온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투적으로 왜국이나 그쪽 방면의 나라 출신으로 부회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탈해가 이끄는 집단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 그가 애초에 김해 지역의 가락국 수로왕과 경쟁하다가 밀려서 추격을 피해 ‘계림(雞林)’ 즉 신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참고하면, 본래 김해의 북쪽이면서 경주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울산 방면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강종훈, 77~78쪽). 참고로 탈해 집단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북방 흉노계 유목민족설(千寬宇, 281~283쪽), 중국 남방계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후 다시 일본 쪽으로 건너갔다가 재귀환한 해양족설(姜仁求, 118~124쪽), 한반도 서북부에서 이주해 온 낙랑 유민설(金泰植, 54~55쪽), 한반도 동북부 옥저 지역에서 남하한 낙랑계 유이민설(문안식, 149~160쪽) 등도 제기 된 바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姜仁求, 2001, 「昔脫解와 吐含山, 그리고 石窟庵」, 『정신문화연구』 82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 『新羅史學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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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007007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서는 ‘적녀국(積女國)’으로 나온다.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 관한 전승은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조 말미에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라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 동옥저의 동쪽 바다 즉 동해에 여국(女國)이 있다는 이 기록에 착안하여, 여국왕의 딸이 왕비가 된 다파나국의 위치를 ‘왜국의 동북 1,000리’로 소개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닫기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008008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 난생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주몽), 신라의 시조 혁거세, 금관가야(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설화 요소이다. 난생은 하늘을 나는 조류에게서 볼 수 있는 생식 방식이며, 따라서 시조 난생 설화는 시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게 될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닫기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009009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 자리 잡았던 가야 소국. 흔히 ‘금관가야’로 통칭된다.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삼국유사』에는 대개 ‘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으며,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한’조에서는 ‘구야국(狗邪國)’으로, 『일본서기』에서는 ‘남가라(南加羅)’ 등으로 지칭하였다. 본서의 권1과 권2에서는 그냥 ‘가야(加耶)’라는 이름으로도 자주 나오는데, ‘가야’의 경우 5세기 후반 이후의 사실을 전하는 본서 권3, 권4에서는 주로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고령의 대가야(大加耶)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 구별이 필요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 따르면, 서기 42년에 해당하는 해인 임인년(壬寅年)에 수로왕(首露王)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9간의 추대를 받아 건국하였다고 한다. 서기 532년에 이르러 마지막 왕 구해(仇亥)가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없어졌다. 참고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924)에서는 속성(俗姓)이 ‘신김(新金)’씨로서 흥무대왕(興武大王) 즉 김유신의 후손으로 나오는 진경대사 심희(諱審希)에 대해 “그 조상은 임나왕족(任那王族)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금관국을 ‘임나’로 인식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닫기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010010 금관국(金官國) … 취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탈해가 탄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雞林)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같은 책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는 탈해가 가락국의 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변신술로 겨루다가 패한 뒤, 계림의 경계로 달아나 들어갔다고 나온다.닫기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011011 아진포구(阿珍浦口):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신라 영역에 도착한 것을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雞林東 下西知村 阿珍浦)에 이르렀다.”라고 전하면서, 아진포에 대한 협주로 “지금도 상서지, 하서지라는 촌 이름이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하서지’라는 지명은 현재도 ‘경북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下西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울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서리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아진포의 위치를 양남면 지역으로 보지 않고 경북 영일로 보는 설(李丙燾, 26쪽)과 경주 감포로 보는 설(丁仲煥, 68쪽)도 제기된 바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丁仲煥, 2000, 『加羅史硏究』,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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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B.C. 19)의 일이었다.012012 혁거세(赫居世) … 일이었다: 본서의 기년상으로, 혁거세 재위 39년은 B.C. 19년이 된다. 그런데 앞서 탈해이사금이 즉위했을 때 나이가 62세였다고 전하였다. 본서에 전하는 탈해의 즉위년을 서력기원으로 환산하면 서기 57년에 해당하는바, 그가 출생한 해는 B.C. 5년이 된다. 따라서 본 기사에서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한 시기를 혁거세 재위 39년 즉 B.C. 19년이라고 전한 것과는 배치된다. 이런 차이로 인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사의 기년에 문제가 많음이 지적되었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0쪽).닫기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작(鵲)’의 글자를 줄여서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013013 까치 ‘작(鵲)’의 … 씨(氏)를 삼고: 석(昔)이라는 성씨의 유래를 ‘까치 작(鵲)’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이 기사와 더불어, 호공의 집을 탈취한 전승과 연결 지어 “옛날[昔]에 내 집이었다고 하여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昔)’이라고 하였다.”라는 다른 전승도 실어놓았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든 후대인들이 한자의 의미를 따서 부회한 것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석’에 가까운 발음의 고유어를 음차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닫기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014014 궤짝을 열고 … 마땅하다: ‘탈해(脫解)’의 한자가 ‘벗다’와 ‘풀다’의 의미를 지니는 것에 구애되어, 꾸며진 이야기일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토해(吐解)’라는 이칭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말로 전승되던 이름을 어느 시기엔가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판단된다.닫기라고 하였다.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015015 양산(楊山): 애초에 6촌 가운데 하나였던 알천 양산촌의 ‘양산(楊山)’을 가리킨다. 훗날 월성(月城)이 되는 호공(瓠公)의 거처가 양산 아래에 있었다는 이 전승은 월성과 양산이 거리상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닫기 아래의 호공(瓠公)016016 호공(瓠公):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 2월조에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온다. 본 기사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이사금이 즉위한 후, 2년 정월에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전하며, 9년 3월에는 금성의 서쪽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인 알지를 처음 발견하였다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 2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닫기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017017 속임수를 써서 … 살았는데: 이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 자세하게 나온다.닫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018018 월성(月城): 신라의 궁성(宮城)으로, 현재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월성은 원래 호공(瓠公)의 집이었는데 탈해(脫解)가 길지(吉地)라고 여겨 빼앗아 거주한 곳이다. 파사이사금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하고, 왕이 옮겨가 살았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 왕이 명활성으로 이거했다가, 소지마립간 9년(487)에 월성을 수리[葺]하고 이듬해 다시 월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은 기본적으로 월성에 기거하였다. 본서 지리지를 보면 월성은 ‘재성(在城)’으로도 불렸으며 둘레가 1,023보라고 되어 있다. 아울러 ‘신월성(新月城)’의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어서 그 둘레가 1,838보였다는 기사가 이어지는데, 신월성과 만월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본 기사와 지리지에서의 월성 혹은 신월성을 지금의 ‘경주 월성’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경주 월성은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문천)’을 끼고 축조된 토성(土城) 유적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 남쪽 편 구릉에 부딪혀 서쪽으로 꺾어져 흐르는데, 성은 남천을 감싸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의 평면이 반달 모양으로 인식되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렸다. 성벽의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이다.
경주 월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80년 무렵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2014년부터는 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껏 월성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신라 유물은 4세기의 것이다. 본서에 나오는 월성의 축조 연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월성이 신라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대체로 그 무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소지마립간이 월성을 수리했다고 하는 5세기에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축조되고, 그 북쪽으로 수혈 해자가 개착되었다. 셋째,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수혈 해자가 석축 해자로 개축되었는데, 이는 통일 이후 해자의 군사적 기능과 함께 조경적 요소가 중시되었음을 시사한다(李相俊, 1997; 박성현, 2018).
한편 신라본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고 하고, 같은 왕 19년(679)에는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월성 해자 북편에 대한 조사에서 제의용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확인되어 궁역이 월성 북쪽 방면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지에 나오는 만월성은 통일기에 확대된 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전덕재, 226~228쪽; 박방룡, 186쪽).
〈참고문헌〉
李相俊, 1997, 「慶州 月城의 變遷過程에 대한 小考」, 『嶺南考古學』 21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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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019019 대보(大輔): 신라 초기에 군국(軍國) 정사를 총괄하던 관직. 명칭으로 볼 때 신라에서 당시에 실제로 쓰였던 관직 이름일 가능성은 낮고, 중국에서 천자를 보좌하던 사보(四輔)의 사례를 참고하여 후대에 윤색된 직명으로 여겨진다. 본서에서는 본 기사에 보이는 탈해 외에 호공, 알지 등이 대보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한편 대보는 고구려 초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에 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년 12월조 참조.닫기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註 001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 제4대 왕이자, 석(昔)씨의 시조. 본서에 따르면, 서기 57년에 즉위하여 80년에 사망하였다.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었다가, 처남인 유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註 002
토해(吐解): 탈해의 다른 이름. ‘吐’는 ‘토함산(吐含山)’의 ‘토’와 같은 글자임이 유의되는데, 탈해와 토함산의 관련성이 깊다는 사실에 구애되어 일부러 ‘吐’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註 003
나이가 62세였다: 탈해이사금의 즉위년이 서기 57년에 해당한다면, 그가 출생한 해는 B.C. 5년이 된다. 그런데 본 기사의 뒷부분을 보면 탈해가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한 시기가 혁거세 재위 39년이라고 한다. 본서의 기년상으로, 혁거세 재위 39년은 B.C. 19년이 되는바, 출생보다 14년 앞서 진한의 해안에 출현한 것이 되어 연대를 둘러싼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註 004
아효(阿孝) 부인: 남해차차웅의 맏딸로서,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5년조에 탈해에게 시집을 간 것으로 나오는 여성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나오고, 같은 책 기이제1의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 전한다.
註 005
다파나국(多婆那國): 위치는 알 수 없음. 본 기사에서는 왜국의 동쪽 1천 리에 있는 나라라고 했으나, 아마도 바로 뒤에 보이는 여국(女國)과 관련지어 나온 후대의 윤색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아버지는 완하국(玩夏國) 함달파왕(含達婆王)인데, 화하국왕(花厦國王)이라고도 한다.”라고 소개하였고, 같은 책 기이제1의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서는 탈해 스스로가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실렸는데 그에 대한 협주로 “한편에서는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국은 혹은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1천 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덧붙여져 있다. 다파나국이라는 명칭은 중국 측 기록인 『위서(魏書)』 권8 세종기(世宗紀) 영평(永平) 원년(508) 3월 기해조에 당시 북위에 조공을 바친 서역(西域)의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나오는 ‘다파나가(多婆那伽)’와도 연관성이 엿보이며, 『삼국유사』에 전하는 부왕(父王)의 이름 ‘함달파’의 ‘달파’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한편 함달파는 불교 경전에서 천룡팔부(天龍八部) 중의 하나로, 수미산(須彌山) 남쪽의 금강굴(金剛窟)에서 살며 제석천(帝釋天)의 음악을 맡아 보는 신이라고 하는 ‘건달파(乾達婆)’와도 음이 유사하여, 불교적 관념에 따른 윤색일 가능성도 크다.
註 006
왜국(倭國)의 … 1,000리에 있다: 탈해의 모국에 해당하는 다파나국이 본래 왜국의 동북 1,000리에 있다는 전승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앞서 호공도 왜국에서 건너온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보면, 경주 지역에서 탄생하지 않고 외부에서 이주해 온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투적으로 왜국이나 그쪽 방면의 나라 출신으로 부회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탈해가 이끄는 집단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 그가 애초에 김해 지역의 가락국 수로왕과 경쟁하다가 밀려서 추격을 피해 ‘계림(雞林)’ 즉 신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참고하면, 본래 김해의 북쪽이면서 경주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울산 방면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강종훈, 77~78쪽). 참고로 탈해 집단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북방 흉노계 유목민족설(千寬宇, 281~283쪽), 중국 남방계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후 다시 일본 쪽으로 건너갔다가 재귀환한 해양족설(姜仁求, 118~124쪽), 한반도 서북부에서 이주해 온 낙랑 유민설(金泰植, 54~55쪽), 한반도 동북부 옥저 지역에서 남하한 낙랑계 유이민설(문안식, 149~160쪽) 등도 제기 된 바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姜仁求, 2001, 「昔脫解와 吐含山, 그리고 石窟庵」, 『정신문화연구』 82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 『新羅史學報』 1
註 007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서는 ‘적녀국(積女國)’으로 나온다.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 관한 전승은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조 말미에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한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라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 동옥저의 동쪽 바다 즉 동해에 여국(女國)이 있다는 이 기록에 착안하여, 여국왕의 딸이 왕비가 된 다파나국의 위치를 ‘왜국의 동북 1,000리’로 소개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註 008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 난생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주몽), 신라의 시조 혁거세, 금관가야(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설화 요소이다. 난생은 하늘을 나는 조류에게서 볼 수 있는 생식 방식이며, 따라서 시조 난생 설화는 시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게 될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註 009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 자리 잡았던 가야 소국. 흔히 ‘금관가야’로 통칭된다.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삼국유사』에는 대개 ‘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으며,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한’조에서는 ‘구야국(狗邪國)’으로, 『일본서기』에서는 ‘남가라(南加羅)’ 등으로 지칭하였다. 본서의 권1과 권2에서는 그냥 ‘가야(加耶)’라는 이름으로도 자주 나오는데, ‘가야’의 경우 5세기 후반 이후의 사실을 전하는 본서 권3, 권4에서는 주로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고령의 대가야(大加耶)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 구별이 필요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 따르면, 서기 42년에 해당하는 해인 임인년(壬寅年)에 수로왕(首露王)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9간의 추대를 받아 건국하였다고 한다. 서기 532년에 이르러 마지막 왕 구해(仇亥)가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함으로써 나라가 없어졌다. 참고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924)에서는 속성(俗姓)이 ‘신김(新金)’씨로서 흥무대왕(興武大王) 즉 김유신의 후손으로 나오는 진경대사 심희(諱審希)에 대해 “그 조상은 임나왕족(任那王族)이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금관국을 ‘임나’로 인식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註 010
금관국(金官國) … 취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탈해가 탄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雞林)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같은 책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駕洛國記)조에는 탈해가 가락국의 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변신술로 겨루다가 패한 뒤, 계림의 경계로 달아나 들어갔다고 나온다.
註 011
아진포구(阿珍浦口):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신라 영역에 도착한 것을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雞林東 下西知村 阿珍浦)에 이르렀다.”라고 전하면서, 아진포에 대한 협주로 “지금도 상서지, 하서지라는 촌 이름이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하서지’라는 지명은 현재도 ‘경북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下西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울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서리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아진포의 위치를 양남면 지역으로 보지 않고 경북 영일로 보는 설(李丙燾, 26쪽)과 경주 감포로 보는 설(丁仲煥, 68쪽)도 제기된 바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丁仲煥, 2000, 『加羅史硏究』, 혜안
註 012
혁거세(赫居世) … 일이었다: 본서의 기년상으로, 혁거세 재위 39년은 B.C. 19년이 된다. 그런데 앞서 탈해이사금이 즉위했을 때 나이가 62세였다고 전하였다. 본서에 전하는 탈해의 즉위년을 서력기원으로 환산하면 서기 57년에 해당하는바, 그가 출생한 해는 B.C. 5년이 된다. 따라서 본 기사에서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한 시기를 혁거세 재위 39년 즉 B.C. 19년이라고 전한 것과는 배치된다. 이런 차이로 인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사의 기년에 문제가 많음이 지적되었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0쪽).
註 013
까치 ‘작(鵲)’의 … 씨(氏)를 삼고: 석(昔)이라는 성씨의 유래를 ‘까치 작(鵲)’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이 기사와 더불어, 호공의 집을 탈취한 전승과 연결 지어 “옛날[昔]에 내 집이었다고 하여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昔)’이라고 하였다.”라는 다른 전승도 실어놓았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든 후대인들이 한자의 의미를 따서 부회한 것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석’에 가까운 발음의 고유어를 음차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註 014
궤짝을 열고 … 마땅하다: ‘탈해(脫解)’의 한자가 ‘벗다’와 ‘풀다’의 의미를 지니는 것에 구애되어, 꾸며진 이야기일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토해(吐解)’라는 이칭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말로 전승되던 이름을 어느 시기엔가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판단된다.
註 015
양산(楊山): 애초에 6촌 가운데 하나였던 알천 양산촌의 ‘양산(楊山)’을 가리킨다. 훗날 월성(月城)이 되는 호공(瓠公)의 거처가 양산 아래에 있었다는 이 전승은 월성과 양산이 거리상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註 016
호공(瓠公):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 2월조에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온다. 본 기사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이사금이 즉위한 후, 2년 정월에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전하며, 9년 3월에는 금성의 서쪽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인 알지를 처음 발견하였다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 2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註 017
속임수를 써서 … 살았는데: 이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 자세하게 나온다.
註 018
월성(月城): 신라의 궁성(宮城)으로, 현재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월성은 원래 호공(瓠公)의 집이었는데 탈해(脫解)가 길지(吉地)라고 여겨 빼앗아 거주한 곳이다. 파사이사금 22년(101)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하고, 왕이 옮겨가 살았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 왕이 명활성으로 이거했다가, 소지마립간 9년(487)에 월성을 수리[葺]하고 이듬해 다시 월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은 기본적으로 월성에 기거하였다. 본서 지리지를 보면 월성은 ‘재성(在城)’으로도 불렸으며 둘레가 1,023보라고 되어 있다. 아울러 ‘신월성(新月城)’의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어서 그 둘레가 1,838보였다는 기사가 이어지는데, 신월성과 만월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본 기사와 지리지에서의 월성 혹은 신월성을 지금의 ‘경주 월성’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경주 월성은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문천)’을 끼고 축조된 토성(土城) 유적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 남쪽 편 구릉에 부딪혀 서쪽으로 꺾어져 흐르는데, 성은 남천을 감싸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의 평면이 반달 모양으로 인식되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렸다. 성벽의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이다.
경주 월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80년 무렵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2014년부터는 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껏 월성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신라 유물은 4세기의 것이다. 본서에 나오는 월성의 축조 연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월성이 신라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대체로 그 무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소지마립간이 월성을 수리했다고 하는 5세기에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축조되고, 그 북쪽으로 수혈 해자가 개착되었다. 셋째,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수혈 해자가 석축 해자로 개축되었는데, 이는 통일 이후 해자의 군사적 기능과 함께 조경적 요소가 중시되었음을 시사한다(李相俊, 1997; 박성현, 2018).
한편 신라본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고 하고, 같은 왕 19년(679)에는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월성 해자 북편에 대한 조사에서 제의용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확인되어 궁역이 월성 북쪽 방면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지에 나오는 만월성은 통일기에 확대된 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전덕재, 226~228쪽; 박방룡, 186쪽).
〈참고문헌〉
李相俊, 1997, 「慶州 月城의 變遷過程에 대한 小考」, 『嶺南考古學』 21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 20
註 019
대보(大輔): 신라 초기에 군국(軍國) 정사를 총괄하던 관직. 명칭으로 볼 때 신라에서 당시에 실제로 쓰였던 관직 이름일 가능성은 낮고, 중국에서 천자를 보좌하던 사보(四輔)의 사례를 참고하여 후대에 윤색된 직명으로 여겨진다. 본서에서는 본 기사에 보이는 탈해 외에 호공, 알지 등이 대보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한편 대보는 고구려 초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에 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년 12월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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