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가 태어나고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다 ( 65년 03월(음) )

9년 봄 3월19519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는, 알지가 始林에 출현한 사실을 永平 3년(서기 60) 庚申 8월 4일의 일로 기록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밤에 왕이 금성(金城)196196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 서쪽의 시림(始林)197197 閼知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숲으로 현재의 경주시 반월성 서쪽에 있다.닫기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19819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서는,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호공이 밤에 月城 西里를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아뢰었다고 하였다.닫기 날이 밝자 호공(瓠公)199199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닫기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200200 김알지의 탄생 설화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도 남아 있다. 세부적인 면에서 《삼국사기》와는 좀 다른데, 먼저 알지 발견의 시점이 서기 60년으로 되어 있어 5년의 차이가 난다. 발견의 주체도 왕이 아닌 호공이 월성 서쪽 마을을 가다가 시림에서 직접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곧 《삼국사기》에 탈해왕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면, 《삼국유사》에서는 호공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닫기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에 일러
“이는 어찌 하늘이 내게 내려준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둬 길렀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201201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 후에 알지의 7세손 미추가 김씨로서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다.닫기라 했다.202202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에 따르면, 혁거세의 고사(故事)와 같았으므로 그 말로 인해 알지(閼智)라고 이름하였고, 알지는 곧 우리말[鄕言]로 어린아이[小兒]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닫기 그가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203203 鳩林이라고도 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始林이었던 것을 알지가 거기서 탄생한 것을 계기로 시림의 이름을 바꾸어 鷄林이라 하고, 나라 이름도 역시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알지의 탄생을 계기로 나라 이름을 鷄林으로 바꾸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대하여, 경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씨 세력이 鷄林國이라는 하나의 소국을 성립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계림국고」, 《역사교육론집》 13·14 합집, 1990, 182~184쪽).닫기으로 고치고 이것으로 국호를 삼았다.

註 195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는, 알지가 始林에 출현한 사실을 永平 3년(서기 60) 庚申 8월 4일의 일로 기록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196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註 197
閼知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숲으로 현재의 경주시 반월성 서쪽에 있다.
註 198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서는,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호공이 밤에 月城 西里를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아뢰었다고 하였다.
註 199
호공은 혁거세에 의해 중용되어 탈해이사금 2년(58)에는 대보(大輔)의 자리까지 오르고 탈해왕대에 김알지(金閼智)를 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탈해의 꾀임으로 살던 집을 빼앗긴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 권1, 기이2, 제사탈해왕(第四脫解王)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참조. 호공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호공이 혁거세와 같이 박씨족이었지만 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天神族) 관념을 표방한데 반해 호공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곧 호공은 애초에 혁거세의 박씨 왕실과 계통이 달랐는데 박씨 왕실에 중용되면서 후대에 박씨족으로 관념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년대로라면 호공이 혁거세 38년(서기전 20)에 등장하여 탈해왕 9년(65)까지 존재하게 되어 인간의 수명으로서는 불합리한 점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호공을 개별 인물로 단정하기보다는 박씨 호공족을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할 여지도 있다(장창은, 「신라 박씨왕실의 분기와 석씨족의 집권과정」, 《신라사학보》 창간호, 신라사학회, 2004, 49~50쪽).
註 200
김알지의 탄생 설화는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도 남아 있다. 세부적인 면에서 《삼국사기》와는 좀 다른데, 먼저 알지 발견의 시점이 서기 60년으로 되어 있어 5년의 차이가 난다. 발견의 주체도 왕이 아닌 호공이 월성 서쪽 마을을 가다가 시림에서 직접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곧 《삼국사기》에 탈해왕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면, 《삼국유사》에서는 호공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
註 201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삼국유사》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 후에 알지의 7세손 미추가 김씨로서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다.
註 202
《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알지 탈해왕대에 따르면, 혁거세의 고사(故事)와 같았으므로 그 말로 인해 알지(閼智)라고 이름하였고, 알지는 곧 우리말[鄕言]로 어린아이[小兒]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註 203
鳩林이라고도 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始林이었던 것을 알지가 거기서 탄생한 것을 계기로 시림의 이름을 바꾸어 鷄林이라 하고, 나라 이름도 역시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알지의 탄생을 계기로 나라 이름을 鷄林으로 바꾸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대하여, 경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씨 세력이 鷄林國이라는 하나의 소국을 성립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계림국고」, 《역사교육론집》 13·14 합집, 1990, 182~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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