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 300년 03월(음) )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 망제(望祭)를 지냈다.270270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5년(138)조에도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비록 그 사실성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태백산이 신라의 사전(祀典) 체제에서 중사(中祀) 5악(五岳) 중 하나로 편제되어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제사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군사 목적도 담보하고 있다. 특히 중사의 제장(祭場)은 국토 주위를 둘러가며 국경을 이루는 양상을 보여 국토 방위의 목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분석되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318~322쪽). 결국 태백산은 신라 초기부터 왕실에 의해 각별한 관심을 받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닫기 낙랑(樂浪)271271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함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닫기과 대방(帶方)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272272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美川王)조에 따르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닫기

註 270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5년(138)조에도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비록 그 사실성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태백산이 신라의 사전(祀典) 체제에서 중사(中祀) 5악(五岳) 중 하나로 편제되어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제사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군사 목적도 담보하고 있다. 특히 중사의 제장(祭場)은 국토 주위를 둘러가며 국경을 이루는 양상을 보여 국토 방위의 목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분석되었다(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318~322쪽). 결국 태백산은 신라 초기부터 왕실에 의해 각별한 관심을 받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註 271
낙랑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 중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08년에서 서기 313년이다. 이 시기에 낙랑과 신라가 직접 충돌할 정도로 교섭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낙랑과 신라와의 관련성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곧 낙랑군은 4세기 초까지 신라에게 중국의 선진 문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군현(漢郡縣)의 약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에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진한 사람들은 낙랑의 유이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변진의 철을 매개로 낙랑군·대방군과 교역함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김길식, 「삼한지역 출토 낙랑계 문물」, 《낙랑》, 국립중앙박물관 편, 솔, 2001, 247쪽). 신라와 낙랑의 종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문창로, 「신라와 낙랑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참조.
註 272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美川王)조에 따르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주제분류
사회>의례>제사>천지신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