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병이 침입하다 ( 431년 04월(음) )

15년(431) 여름 4월에 병(倭兵)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명활성(明活城)098098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닫기을 포위하였는데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註 098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명활성이 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1988년 명활산성 안에서 551년 경 산성의 축조와 관련된 역역동원(力役動員)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경주 명활산성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신라1·가야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41~49쪽 참조.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지명 : 명활성
국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