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병을 쫓다가 위기에 빠지다 ( 444년 04월(음) )

28년(444) 여름 4월에 병(倭兵)이 금성(金城)114114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닫기을 10일 동안 포위하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내어 그들은 추격하려고 하니 좌우에서 말하였다.
“병가(兵家)의 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115115 《孫子》의 “歸師勿遏 圍師必闕 窮寇勿追”라는 말 중의 ‘窮寇勿追’를 인용한 것이다.닫기 왕께서는 그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11611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山川)에 따르면, 독산은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하는 데 신광현 동쪽 2리의 벌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고 한다. 그 위에 토성이 두 겹으로 있고 안에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산이 왜구의 침입 루트상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록대로 지금의 경북 포항시 신광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닫기 동쪽까지 추격해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왕이 허겁지겁 말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에워쌌는데, 홀연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지척에 있는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적들이
“귀신[음(陰)]이 도와주는구나!”라고 말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註 114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궁성(宮城)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월성(月城)과 함께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중고기 이후에 월성에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에는 부의 동쪽 4리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407척이라고 되어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의 서북쪽 내지 알천[북천]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1992, 220쪽 |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176~178쪽), 박씨 세력의 활동 무대인 나정·알영정 근처, 즉 경주평야 남쪽 지금의 교동 일대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0, 58~59쪽). 금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사 검토는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009, 170~174쪽에 자세하며,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 2009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註 115
《孫子》의 “歸師勿遏 圍師必闕 窮寇勿追”라는 말 중의 ‘窮寇勿追’를 인용한 것이다.
註 11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山川)에 따르면, 독산은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하는 데 신광현 동쪽 2리의 벌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고 한다. 그 위에 토성이 두 겹으로 있고 안에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산이 왜구의 침입 루트상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록대로 지금의 경북 포항시 신광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제분류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색인어
지명 : 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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