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이 쳐들오자 이를 물리치다 ( 459년 04월(음) )

여름 4월에 인(倭人)13113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닫기이 병선(兵船)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月城)132132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닫기을 포위하였는데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이 비오는 것과 같았다. 왕성을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였고, [이에]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 북쪽으로 추격하여 바다 어구에 이르니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註 131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倭人) 및 왜군(倭軍)의 실체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왜인의 침략은 주로 식량과 사람의 약탈을 위해 게릴라식의 전술을 구사한 해적 행위였다(旗田巍, 《三國史記 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 《日本文化と朝鮮》 2, 朝鮮文化社 編, 1975김기섭 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왜-》, 이론과 실천, 1994, 109~118쪽 | 이종욱,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정체」, 《한국사 시민강좌》 11, 일조각, 1992, 44~66쪽). 왜(倭)의 실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연민수, 「5세기 이전의 신라의 대외관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340~370쪽 참조.
註 132
신라 왕성(王城)으로서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했고,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했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월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다. 다만 파사왕대 건조된 월성은 경주시 북천(北川) 남안(南岸)의 성동동에 있었고, 인왕동의 반월성은 문무왕이 왕궁을 짓게 됨에 따라 탈해왕릉이 문무왕 20년(680)에 이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남천우, 「인왕동 왕궁의 건조시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123, 1989《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72~75쪽). 월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참조.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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