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국이 항복하다 ( 532년 (음) )

19년에 금관국(金官國)084084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가락국(駕洛國)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 또는 본가야(本加耶)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수로(首露)가 건국하여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닫기의 왕인 김구해(金仇亥)085085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양주(良州) 김해소경(金海小京)조《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에는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로 기록되었고,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구형(仇衡) 또는 구충(仇衝)이라고 기록되었다. ‘형(衡)’은 ‘충(衝)’의 오자(誤字)이고, ‘차휴(次休)’는 ‘충(衝)’의 반절(反切)로 보면 ‘해(亥)’는 ‘충(充)’의 와자(訛字)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57쪽).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해는 겸지왕(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구형왕의 능(陵)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실성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닫기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086086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이며,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로 기록된 후에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잡간(迊干)으로,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553년(진흥왕 14)에 아찬(阿湌)으로서 신주 군주(新州 軍主)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聖王)을 전사시키는 등의 공을 세웠다.닫기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087087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繼體) 23년조에 신라에서는 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등(上等)을 대등(大等) 또는 그것에 버금가는 관직의 이칭(異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10쪽 주 68) 참조).닫기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088088 국가에서 왕족이나 공신, 또는 봉작(封爵)을 받은 사람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지역의 수조권(收租權) 또는 수조호(收租戶)이다. 삼국시대의 식읍은 주로 주변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원래 그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식읍으로 주던 것이 일반적이었다.닫기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08908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에 이르렀다.


註 084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가락국(駕洛國)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 또는 본가야(本加耶)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수로(首露)가 건국하여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註 085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양주(良州) 김해소경(金海小京)조《삼국사기》 권41, 열전(列傳)1 김유신전(金庾信傳) 상(上)에는 구해(仇亥) 또는 구차휴(仇次休)로 기록되었고,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구형(仇衡) 또는 구충(仇衝)이라고 기록되었다. ‘형(衡)’은 ‘충(衝)’의 오자(誤字)이고, ‘차휴(次休)’는 ‘충(衝)’의 반절(反切)로 보면 ‘해(亥)’는 ‘충(充)’의 와자(訛字)로 이해하기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57쪽). 《가락국기》에 의하면 구해는 겸지왕(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구형왕의 능(陵)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데, 그 사실성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註 086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이며,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로 기록된 후에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武力智) 잡간(迊干)으로,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는 무력지(另力智) 잡간(迊干)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553년(진흥왕 14)에 아찬(阿湌)으로서 신주 군주(新州 軍主)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聖王)을 전사시키는 등의 공을 세웠다.
註 087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繼體) 23년조에 신라에서는 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등(上等)을 대등(大等) 또는 그것에 버금가는 관직의 이칭(異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10쪽 주 68) 참조).
註 088
국가에서 왕족이나 공신, 또는 봉작(封爵)을 받은 사람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지역의 수조권(收租權) 또는 수조호(收租戶)이다. 삼국시대의 식읍은 주로 주변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원래 그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식읍으로 주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註 089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1위인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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