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에서 백제를 물리치다 ( 554년 (음) )

〔15년(554)〕 백제왕 명농(明穠)001001 명농(明穠):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이름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6 성왕조에는 이름이 명농(明穠)이었다고 전한다.닫기이 가야[加良]002002 가야[加良]: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연맹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종래에 가야연맹에서 동원한 군사가 어림잡아 18,600명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302쪽).닫기와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003003 관산성(管山城): 현재 충북 옥천군 옥천읍으로 비정된다. 고시산(古尸山), 구례성(仇禮城), 구리성(仇利城), 고리산(古利山), 구타모라(久陀牟羅), 함산성(函山城)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고리산으로도 불리는 관산은 현재의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의 환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梁起錫, 21쪽). 환산성은 현재 군북면 이백리와 환평리·증약리·추소리·항곡리 사이의 해발 581.4m의 고리산(환산)과 그 남쪽 및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곳곳의 산봉우리에 고리 형태로 석축한 6개의 보루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백리산성’ 또는 ‘할배성’이라 불리며, 한동안 고리산성이라고 추정하였던 제1보루에서부터 약 200~900m의 거리를 두고 각기 떨어진 5개의 보루들이 능선 양쪽이 모두 험하고 가파른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환산 전체를 하나의 요새처럼 꾸미고 있고, 그 둘레는 작은 것은 80m에서 큰 것은 200m 정도라고 한다(車勇杰·趙順欽, 63~59쪽). 한편 환산의 보루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함산성(函山城)이라고 이해하고, 관산성은 현재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와 군서면 월전리 사이의 해발 303m의 재건산에 있는 삼성산성으로 보는 견해(문안식, 358~360쪽), 관산성은 일반적인 하나의 성이 아니라 환산의 보루와 삼성산성을 아우르는 보루들의 총칭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김병남)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문안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梁起錫, 2009,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中原文化論叢』 12
車勇杰·趙順欽, 2009, 「管山城 關聯遺蹟의 現狀과 保存方向」, 『中原文化論叢』 12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전투의 의미」, 『전북사학』 36
닫기
을 공격하였다.004004 백제왕 명농(明穠)이 …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본 기록에서는 백제가 신라 관산성을 공격한 것은 진흥왕 15년(544) 7월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진성(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명, 말 8천 필을 빼앗아갔다.”라고 전한다. 종래에 진성을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였던 충남 금산군 진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張彰恩). 진성의 위치가 진산이었는가의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이 기사가 관산성전투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견이 없다. 이에 따른다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은 554년 9월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조에는 554년 12월 9일에 백제가 신라의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전한다.
백제는 553년에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기자, 이에 대해 가야세력과 왜를 끌어들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이 신라에서 백제로 향하는 탄현(炭峴)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백제와 연합한 가야연맹 군대가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장수군 장계면 또는 무주군 무주읍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금산군 금산읍을 거치는 루트를 통해 이동하였는데, 금산읍에서 백제와 대가야 연합군이 공략하기에 가장 수월한 지역이 바로 관산성이었다. 더구나 관산성을 빼앗으면, 추풍령을 넘어 김천과 김천시 개령면을 위협할 수 있고, 북쪽으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을 공략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백제 성왕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관산성을 공격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참고문헌〉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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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005005 우덕(于德): 백제가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자, 신라의 군주(軍主)로서 백제군을 물리치기 위해 참전하였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과 이찬(伊飡) 탐지(耽知)006006 탐지(耽知): 백제가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자, 신라의 군주(軍主)로서 백제군을 물리치기 위해 참전하였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에 참전한 8명의 장군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당시 탐지의 관등은 잡찬(迊飡)이었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대중(大衆)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두미지(豆弥智) 피진간지(彼珎干支: 파진찬)를 탐지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武田幸男, 1979, 「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한편 554년에 왕경(대당(大幢)))과 지방의 사벌(沙伐: 경북 상주시), 실직(悉直: 강원도 삼척시, 또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시),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에 정군단(停軍團)이 주둔하였다고 추정되며, 이 가운데 남천군주(南川軍主)는 김무력(金武力)이었고, 동해안지역의 정군단이 관산성전투에 참여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우덕과 탐지는 대당 또는 사벌정의 군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닫기 등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007007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진성(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명, 말 8천 필을 약탈하여 갔다.”라고 전한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12월조에서는 554년 12월 9일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의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백제 성왕의 태자 여창(餘昌)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고 전한다. 두 기록을 통해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음을 알 수 있다. 군주 우덕과 탐지 등이 관산성에 주둔한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공격하였다가 전세가 불리해졌음을 볼 수 있다.닫기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008008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 554년에 신주(新州)의 주치(州治)는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이었고, 여기에 정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에(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94~100쪽 및 105쪽), 김무력의 정확한 직임은 신주군주가 아니라 남천군주였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후대에 남천군주를 신주군주로 고친 것으로 이해된다.닫기이 주병(州兵)009009 주병(州兵): 본서 권제47 열전제7 해론조에 “다음해 신미년(611) 겨울 10월에 백제에서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여 100여 일이 지나자 진평왕(眞平王)은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州)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상주·하주·신주의 군사는 주(州) 단위로 편성한 행군군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기록의 주병 역시 신주를 단위로 편성한 행군군단으로 볼 수 있는데, 종래에 주 단위로 편성된 행군군단은 주치에 주둔한 정군단과 군(郡) 단위로 편성된 외여갑당(外餘甲幢)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닫기을 이끌고 나아가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비장(裨將)010010 비장(裨將): ‘비(裨)’는 ‘돕다’ 또는 ‘보좌하다’는 뜻이므로, 비장은 어떤 군단의 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경위(京位)를 보유한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 ‘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와 더불어 외위(外位)를 보유한 ‘추문촌당주사인(鄒文村幢主使人)’,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이 나온다. 비장은 바로 당주사인(幢主使人)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짐작되며, 삼년산군 고간(高干) 도도(都刀)는 삼년산군을 단위로 편성한 외여갑당의 사령관, 즉 당주(幢主)를 보좌한 당주사인이었는데, 후대에 이것을 비장이라고 고쳐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닫기인 삼년산군(三年山郡)011011 삼년산군(三年山郡):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으로 비정된다. 경덕왕 때에 삼년군(三年郡)으로 고쳤다,닫기의 고간(高干)012012 고간(高干): 신라 외위(外位) 제3등급의 관등이다. 문무왕 14년(674)에 외위를 폐지하면서, 고간의 외위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경위 제9등급인 급찬(級飡)을 수여하였다.닫기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013013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32년(554) 7월조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겨울 12월조에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 또는 곡지(谷智)가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을 죽였으며, 신라는 성왕의 두골(頭骨)을 북청(北廳: 도당(都堂))의 계단 아래에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게 돌려주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노비인 고도가 성왕의 목을 벤 공으로 고간의 외위를 수여받은 것으로 이해한다(金甲童; 梁起錫). 한편 도도와 고도를 동일 인물로 보고, 지방의 재지지배자인 도도(고도)를 지방민을 천시하는 관념 때문에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朱甫暾). 이 밖에 고도를 삼년산군 고간 도도가 데리고 간 노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참고문헌〉
朱甫暾, 1986, 「新羅 中古期 村落構造에 대하여(1)-外位와 地方民 身分制」, 『慶北史學』 9;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
金甲童, 1999, 「新羅와 百濟의 管山城 戰鬪」, 『白山學報』 52
梁起錫, 2009,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中原文化論叢』 12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닫기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014014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좌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260) 정월조 참조.닫기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015015 이에 여러 군대들이 …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겨울 12월조에서는 백제 성왕이 죽임을 당한 이후에 신라군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포위하자,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 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이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전한다. 이외에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下)조에 문무대왕이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성왕)이 고리산(古利山: 관산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 승세를 타서 그 왕 및 재상(宰相) 네 사람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다.’고 언급하였다는 내용도 보인다. 신라는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할 수 있었고,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당항성(党項城)을 확보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한다. 『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에 신라 사신이 당나라 고조(高祖)에게 ‘지난 날 백제가 고려(고구려)를 치러 갈 적에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신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서로 공격하여 치게 되었으며, 〔그 후〕 신라가 백제의 왕을 잡아가 죽였으므로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내용이 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는 관산성전투 이후 성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고 볼 수 있다.닫기

註 001
명농(明穠):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이름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6 성왕조에는 이름이 명농(明穠)이었다고 전한다.
註 002
가야[加良]: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연맹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종래에 가야연맹에서 동원한 군사가 어림잡아 18,600명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302쪽).
註 003
관산성(管山城): 현재 충북 옥천군 옥천읍으로 비정된다. 고시산(古尸山), 구례성(仇禮城), 구리성(仇利城), 고리산(古利山), 구타모라(久陀牟羅), 함산성(函山城)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고리산으로도 불리는 관산은 현재의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의 환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梁起錫, 21쪽). 환산성은 현재 군북면 이백리와 환평리·증약리·추소리·항곡리 사이의 해발 581.4m의 고리산(환산)과 그 남쪽 및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곳곳의 산봉우리에 고리 형태로 석축한 6개의 보루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백리산성’ 또는 ‘할배성’이라 불리며, 한동안 고리산성이라고 추정하였던 제1보루에서부터 약 200~900m의 거리를 두고 각기 떨어진 5개의 보루들이 능선 양쪽이 모두 험하고 가파른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환산 전체를 하나의 요새처럼 꾸미고 있고, 그 둘레는 작은 것은 80m에서 큰 것은 200m 정도라고 한다(車勇杰·趙順欽, 63~59쪽). 한편 환산의 보루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함산성(函山城)이라고 이해하고, 관산성은 현재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와 군서면 월전리 사이의 해발 303m의 재건산에 있는 삼성산성으로 보는 견해(문안식, 358~360쪽), 관산성은 일반적인 하나의 성이 아니라 환산의 보루와 삼성산성을 아우르는 보루들의 총칭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김병남)도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문안식, 2006,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梁起錫, 2009,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中原文化論叢』 12
車勇杰·趙順欽, 2009, 「管山城 關聯遺蹟의 現狀과 保存方向」, 『中原文化論叢』 12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전투의 의미」, 『전북사학』 36
註 004
백제왕 명농(明穠)이 …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본 기록에서는 백제가 신라 관산성을 공격한 것은 진흥왕 15년(544) 7월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진성(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명, 말 8천 필을 빼앗아갔다.”라고 전한다. 종래에 진성을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였던 충남 금산군 진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張彰恩). 진성의 위치가 진산이었는가의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이 기사가 관산성전투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견이 없다. 이에 따른다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은 554년 9월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조에는 554년 12월 9일에 백제가 신라의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전한다.
백제는 553년에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기자, 이에 대해 가야세력과 왜를 끌어들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이 신라에서 백제로 향하는 탄현(炭峴)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백제와 연합한 가야연맹 군대가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장수군 장계면 또는 무주군 무주읍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금산군 금산읍을 거치는 루트를 통해 이동하였는데, 금산읍에서 백제와 대가야 연합군이 공략하기에 가장 수월한 지역이 바로 관산성이었다. 더구나 관산성을 빼앗으면, 추풍령을 넘어 김천과 김천시 개령면을 위협할 수 있고, 북쪽으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을 공략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백제 성왕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관산성을 공격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참고문헌〉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
註 005
우덕(于德): 백제가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자, 신라의 군주(軍主)로서 백제군을 물리치기 위해 참전하였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06
탐지(耽知): 백제가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자, 신라의 군주(軍主)로서 백제군을 물리치기 위해 참전하였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에 참전한 8명의 장군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당시 탐지의 관등은 잡찬(迊飡)이었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대중(大衆)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두미지(豆弥智) 피진간지(彼珎干支: 파진찬)를 탐지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武田幸男, 1979, 「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한편 554년에 왕경(대당(大幢)))과 지방의 사벌(沙伐: 경북 상주시), 실직(悉直: 강원도 삼척시, 또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시),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에 정군단(停軍團)이 주둔하였다고 추정되며, 이 가운데 남천군주(南川軍主)는 김무력(金武力)이었고, 동해안지역의 정군단이 관산성전투에 참여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우덕과 탐지는 대당 또는 사벌정의 군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註 007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진성(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명, 말 8천 필을 약탈하여 갔다.”라고 전한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12월조에서는 554년 12월 9일에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의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백제 성왕의 태자 여창(餘昌)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고 전한다. 두 기록을 통해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음을 알 수 있다. 군주 우덕과 탐지 등이 관산성에 주둔한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공격하였다가 전세가 불리해졌음을 볼 수 있다.
註 008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 554년에 신주(新州)의 주치(州治)는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이었고, 여기에 정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에(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94~100쪽 및 105쪽), 김무력의 정확한 직임은 신주군주가 아니라 남천군주였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후대에 남천군주를 신주군주로 고친 것으로 이해된다.
註 009
주병(州兵): 본서 권제47 열전제7 해론조에 “다음해 신미년(611) 겨울 10월에 백제에서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여 100여 일이 지나자 진평왕(眞平王)은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州)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상주·하주·신주의 군사는 주(州) 단위로 편성한 행군군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기록의 주병 역시 신주를 단위로 편성한 행군군단으로 볼 수 있는데, 종래에 주 단위로 편성된 행군군단은 주치에 주둔한 정군단과 군(郡) 단위로 편성된 외여갑당(外餘甲幢)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
註 010
비장(裨將): ‘비(裨)’는 ‘돕다’ 또는 ‘보좌하다’는 뜻이므로, 비장은 어떤 군단의 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경위(京位)를 보유한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 ‘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와 더불어 외위(外位)를 보유한 ‘추문촌당주사인(鄒文村幢主使人)’,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이 나온다. 비장은 바로 당주사인(幢主使人)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짐작되며, 삼년산군 고간(高干) 도도(都刀)는 삼년산군을 단위로 편성한 외여갑당의 사령관, 즉 당주(幢主)를 보좌한 당주사인이었는데, 후대에 이것을 비장이라고 고쳐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011
삼년산군(三年山郡):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으로 비정된다. 경덕왕 때에 삼년군(三年郡)으로 고쳤다,
註 012
고간(高干): 신라 외위(外位) 제3등급의 관등이다. 문무왕 14년(674)에 외위를 폐지하면서, 고간의 외위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경위 제9등급인 급찬(級飡)을 수여하였다.
註 013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32년(554) 7월조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겨울 12월조에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 또는 곡지(谷智)가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을 죽였으며, 신라는 성왕의 두골(頭骨)을 북청(北廳: 도당(都堂))의 계단 아래에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게 돌려주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노비인 고도가 성왕의 목을 벤 공으로 고간의 외위를 수여받은 것으로 이해한다(金甲童; 梁起錫). 한편 도도와 고도를 동일 인물로 보고, 지방의 재지지배자인 도도(고도)를 지방민을 천시하는 관념 때문에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朱甫暾). 이 밖에 고도를 삼년산군 고간 도도가 데리고 간 노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참고문헌〉
朱甫暾, 1986, 「新羅 中古期 村落構造에 대하여(1)-外位와 地方民 身分制」, 『慶北史學』 9;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
金甲童, 1999, 「新羅와 百濟의 管山城 戰鬪」, 『白山學報』 52
梁起錫, 2009, 「管山城 戰鬪의 樣相과 影響」, 『中原文化論叢』 12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註 014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좌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260) 정월조 참조.
註 015
이에 여러 군대들이 …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554) 겨울 12월조에서는 백제 성왕이 죽임을 당한 이후에 신라군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포위하자,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 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이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전한다. 이외에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下)조에 문무대왕이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성왕)이 고리산(古利山: 관산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 승세를 타서 그 왕 및 재상(宰相) 네 사람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다.’고 언급하였다는 내용도 보인다. 신라는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침으로써 한강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할 수 있었고,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당항성(党項城)을 확보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한다. 『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에 신라 사신이 당나라 고조(高祖)에게 ‘지난 날 백제가 고려(고구려)를 치러 갈 적에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신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서로 공격하여 치게 되었으며, 〔그 후〕 신라가 백제의 왕을 잡아가 죽였으므로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내용이 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는 관산성전투 이후 성왕의 복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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