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 562년 09월(음) )

9월에 가야(加耶)149149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었던 대가야(大加耶)이다.닫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150150 내물왕(奈勿王)의 9세손이고, 아버지는 급찬(級湌) 구리지(仇梨知)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낭도들을 이끌고 대가야(大加耶)의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웠다. 17세 때 사우(死友) 무관랑(武官郞)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따라 죽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 참조.닫기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栴檀門)151151 대가야(大加耶) 왕성(王城)의 성문 이름의 하나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에는 ‘전단양(栴檀梁)’이라고 하였는데, 가야의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닫기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戰功)을 논할 때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백 명152152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에는 포로 300명으로 기록되었다.닫기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서 포로는 풀어 주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註 149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었던 대가야(大加耶)이다.
註 150
내물왕(奈勿王)의 9세손이고, 아버지는 급찬(級湌) 구리지(仇梨知)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낭도들을 이끌고 대가야(大加耶)의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웠다. 17세 때 사우(死友) 무관랑(武官郞)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따라 죽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 참조.
註 151
대가야(大加耶) 왕성(王城)의 성문 이름의 하나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에는 ‘전단양(栴檀梁)’이라고 하였는데, 가야의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註 152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4 사다함전(斯多含傳)에는 포로 300명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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