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신라왕으로 삼다 ( 565년 02월(음) )

26년(565) 봄 2월에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001001 무성황제(武成皇帝): 북제(北齊)의 제4대 황제로 이름은 고담(高湛)이고, 시호(諡號)는 무성(武成)이며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효소제(孝昭帝)의 유명(遺命)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562년에서 565년까지 4년 동안 재위하다가 태자 위(緯)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다.닫기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002002 사지절(使持節): 중국 고대 장군이 소지하는 부절(符節), 즉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사지절을 부여받은 장군은 자신이 거느리는 관리 가운데 질(秩)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자의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닫기 동이교위(東夷校尉)003003 동이교위(東夷校尉): 동이교위는 한(漢)나라에서 설치한 이래, 서진(西晉) 때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운용된 직책이며, 보통 중국 동북부의 세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위(北魏) 때에 조정에서 파견한 동이교위(東夷校尉)와 고구려왕의 책봉호로서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이 존재했고, 이후 안장왕(安臧王)이 산관(散官)인 동이교위를 책봉받은 이후, 565년까지 고구려왕만이 동이교위를 책봉받았다(윤용구). 그런데 일반적으로 북위에서 고구려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동이(東夷) 세계에서 고구려의 우위를 공인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되자, 북제가 565년에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를 동이 세계를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하면서 신라왕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상우).
〈참고문헌〉
윤용구, 2005, 「고대중국의 東夷觀과 고구려: 東夷校尉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55
전상우, 2018,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외정책 변화와 新羅 阿旦城 공격」, 『韓國古代史硏究』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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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공(樂浪郡公)004004 낙랑군공(樂浪郡公): 진흥왕이 처음으로 낙랑군공을 책봉받은 이후 중국 왕조에서 신라왕에게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다.닫기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005005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가 …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제서(北齊書)』 권7 제기(帝紀)제7 하청(河清) 4년(565) 2월 갑인(甲寅)조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라고 전하며, 동일한 내용은 『북사(北史)』 권8 제본기하(齊本紀下)제8 하청 4년 2월조에도 전한다. 한편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3 외신부(外臣部) 봉책(冊封)조에는 “무성(武成) 하청 4년 2월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동이교위와 영동교위는 동일한 관작으로 보인다.
『북제서』의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대외적으로 김씨(金氏) 성(姓)을 칭했을 뿐만 아니라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진흥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당대에 ‘진흥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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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무성황제(武成皇帝): 북제(北齊)의 제4대 황제로 이름은 고담(高湛)이고, 시호(諡號)는 무성(武成)이며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효소제(孝昭帝)의 유명(遺命)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562년에서 565년까지 4년 동안 재위하다가 태자 위(緯)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다.
註 002
사지절(使持節): 중국 고대 장군이 소지하는 부절(符節), 즉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사지절을 부여받은 장군은 자신이 거느리는 관리 가운데 질(秩)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자의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註 003
동이교위(東夷校尉): 동이교위는 한(漢)나라에서 설치한 이래, 서진(西晉) 때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운용된 직책이며, 보통 중국 동북부의 세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위(北魏) 때에 조정에서 파견한 동이교위(東夷校尉)와 고구려왕의 책봉호로서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이 존재했고, 이후 안장왕(安臧王)이 산관(散官)인 동이교위를 책봉받은 이후, 565년까지 고구려왕만이 동이교위를 책봉받았다(윤용구). 그런데 일반적으로 북위에서 고구려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동이(東夷) 세계에서 고구려의 우위를 공인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되자, 북제가 565년에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를 동이 세계를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하면서 신라왕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상우).
〈참고문헌〉
윤용구, 2005, 「고대중국의 東夷觀과 고구려: 東夷校尉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55
전상우, 2018,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외정책 변화와 新羅 阿旦城 공격」, 『韓國古代史硏究』 89
註 004
낙랑군공(樂浪郡公): 진흥왕이 처음으로 낙랑군공을 책봉받은 이후 중국 왕조에서 신라왕에게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註 005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가 …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제서(北齊書)』 권7 제기(帝紀)제7 하청(河清) 4년(565) 2월 갑인(甲寅)조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라고 전하며, 동일한 내용은 『북사(北史)』 권8 제본기하(齊本紀下)제8 하청 4년 2월조에도 전한다. 한편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3 외신부(外臣部) 봉책(冊封)조에는 “무성(武成) 하청 4년 2월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동이교위와 영동교위는 동일한 관작으로 보인다.
『북제서』의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대외적으로 김씨(金氏) 성(姓)을 칭했을 뿐만 아니라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진흥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당대에 ‘진흥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제분류
정치>외교>문서>내용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