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다 ( 648년 (음) )

〔2년(648)〕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001001 문왕(文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에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무열왕 3년(656)에 이찬(伊湌)으로서 다시 당나라에 갔고, 동왕 5년(658)에는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삼국통일 전쟁에도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5년(665) 2월에 죽었다.닫기을 당(唐)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광록경(光祿卿)002002 광록경(光祿卿): 당나라 9시(寺) 중의 하나인 광록시(光祿寺)의 장관으로 종3품의 벼슬이다. 방국(邦國)의 술과 제사음식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닫기 유형(柳亨)003003 유형(柳亨):『구당서』 권77 열전27 유형(柳亨)조에 포주(蒲州) 출신으로 북위(北魏)의 상서좌복야를 지낸 유경(柳慶)의 손자라고 전한다. 좌위중랑장, 공주자사(邛州刺史), 태상경(太常卿) 등을 역임하고 655년에 죽었다.닫기을 보내어 교외에서 마중하고 위로하게 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004004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일본서기』 권25 효덕천황(孝德天皇) 대화(大化) 3년조에서는 왜를 방문한 김춘추에 관해서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 하였다고 묘사하였다.닫기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005005 석전(釋奠): 국학과 같은 유학 교육기관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제사하는 의식이다. ‘석(釋)’은 ‘설치한다[置]’라는 뜻이고, ‘전(奠)’은 ‘그친다[停]’는 뜻으로, 제수를 올릴 뿐이고 잔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 한편 김춘추가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참관한 것은 석전례의 절차 가운데 하나인 시학(視學)이고, 이후 신라에 시학이 도입됨으로써 국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강론에 참여하고 유능한 국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여 지지기반을 확충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채미하, 2009, 「신라 국왕의 視學과 그 의미」, 『韓國思想史學』 32).닫기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신이 친히 지은 「온탕비(溫湯碑)」와006006 「온탕비(溫湯碑)」 : 당(唐) 태종(太宗)이 여산(驪山)의 온천에 가서 세운 비이다. 『신당서(新唐書)』 권1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高祖)가 무덕 6년(623) 2월 경술(庚戌)에 온탕(溫湯)에 갔다가 임자(壬子)에 사냥하고, 갑인(甲寅)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온탕비(溫湯碑)」는 이 사실을 기록한 비명일 것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닫기 「진사비(晉祠碑)」007007 「진사비(晉祠碑)」 :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진사(晉祠)에 관해서 지은 비이다. 진사는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시[太原縣]의 서남쪽 현옹산(懸甕山) 기슭의 진수(晉水)가 발원하는 곳에 있는 사당인데, 여기서 진(晉)나라의 시조 당숙우(唐叔虞)를 제사지냈다.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태원 출신이었으므로 거병(擧兵) 후 이 사당에 제사를 하였으며, 태종이 정관 2년(628)에 이곳에 가서 비(碑)를 세우고 진사의 명(銘)을 지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닫기 및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008008 『진서(晉書)』: 당(唐) 태종(太宗) 때 방현령(房玄齡)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편찬한 정사(正史)로, 서진(西晉) 4대 54년과 동진(東晉) 11대 120년간의 일을 기록하였다. 진(晉)~육조(六朝) 시기에 편찬된 여러 종의 진사(晉史) 중에서 저명한 18가(家)의 진사를 모으고 장영서의 『진서(晉書)』를 위주로 삼아 태종 때 다시 편찬했으므로 ‘새로 편찬한 진서’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 선무기(宣武紀)와 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 2명의 열전(列傳)에 붙은 사론(史論)은 태종이 직접 지은한 것이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닫기를 내려주었다.
어느 날 〔김춘추를〕 연회 자리에 불러 사사로이 만나서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고 묻기를, “경(卿)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엎드려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범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천조(天朝)의 군사를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않으신다면 저희 나라[敝邑]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니, 그렇다면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정을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한 장복(章服)009009 장복(章服): 관복(官服) 혹은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의례복(儀禮服) 등의 공식 복장을 뜻한다.닫기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010010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제1 태종춘추공조『삼국유사』 권제4 의해(義解)제5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의 공복을 가져와 신라에서 시행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김춘추 세력과 자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대당 관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경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南東信, 1992, 「慈藏의 佛敎思想과 佛敎治國策」, 『韓國史硏究』 76). 그러나 자장이 불교 외에 당의 문물이 신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닫기 이에 내전(內殿)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詔勅)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011011 특진(特進): 당나라 정2품의 문산관(文散官) 벼슬이다. 한편「김인문비(金仁問碑)」 단편(斷片)을 보면, 김춘추가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관작을 받은 때가 정관(貞觀) 21년(647)이라고 하여 본서의 기록보다 1년 빠르게 되어 있다.닫기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012012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당나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좌무위(左武衛)에 속한 종3품의 무관직(武官職)으로, 무위는 궁궐을 호위하는 부대의 하나이다. 당나라에서는 좌·우무위를 두고, 대장군(大將軍) 각 1명, 장군 각 2명을 두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닫기으로 삼았다.013013 춘추가 또한 …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9 태종(太宗) 정관(貞觀) 22년(648) 12월 계미조,『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4 외신부(外臣部) 포이(褒異) 태종 정관 22년 12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본국으로 돌아올 때 〔태종은〕 3품(品) 이상에게 조칙으로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니, 우대하는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014014 본국으로 … 극진히 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4 외신부(外臣部) 포이(褒異) 태종 정관(貞觀) 23년(649) 2월 계사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닫기 춘추가 아뢰기를, “신에게 아들이 일곱015015 아들이 일곱 :『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들로 문명왕후(文明王后) 소생의 법민(法敏)·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이 있고, 그 외에 서자인 개지문(皆知文)·거득령(車得令)·마득(馬得), 그리고 딸 5명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무열왕(武烈王) 2년(655)조에는 노차와 지경 사이에 인태(仁泰)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일곱 아들’은 문명왕후 소생만을 칭했을 가능성이 높다.닫기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聖明]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016016 숙위(宿衛): 원래 숙위는 고대 중국 왕조의 궁정을 수비하는 친위대인데, 중원 왕조 내부의 관료체계를 외국까지 확대 적용하여 이들의 왕자나 귀족 자제들이 숙위를 맡도록 하였다. 숙위는 종주국의 이해만 대변한 것이 아니고, 현지에 체류하면서 요즘의 외국 주재 대사와 같은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 시기의 신라 숙위는 체재 중에 국학에서 수학하거나 신라의 학생들을 인솔해가서 당 조정에 국학 입학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김창석, 288~289쪽). 진덕왕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의 아들 문왕(文王)이 처음 숙위로 임명된 이후 경문왕 16년(876) 김인(金因)에 이르기까지 총 16명의 신라 숙위가 확인된다(申瀅植, 359~379쪽).
〈참고문헌〉
申瀅植, 1984, 「新羅의 宿衛外交」,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김창석, 2016 「신라 문화의 국제성」, 『신라의 대외관계와 문화교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닫기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017017 대감(大監): 관직인지 사람 이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병부(兵部)의 차관, 시위부(侍衛府)의 장군 다음의 군관, 6정군단의 차관급의 군관을 대감이라고 불렀다.닫기 ▨▨에게 〔머물면서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高句麗)의 순라병을 만났다. 김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018018 온군해(溫君解): 김춘추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하는 도중에 고구려 순라군에게 김춘추 대신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대아찬(大阿湌)으로 추증된 것으로 미루어 진골(眞骨)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쪽에 앉으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註 001
문왕(文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에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무열왕 3년(656)에 이찬(伊湌)으로서 다시 당나라에 갔고, 동왕 5년(658)에는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삼국통일 전쟁에도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5년(665) 2월에 죽었다.
註 002
광록경(光祿卿): 당나라 9시(寺) 중의 하나인 광록시(光祿寺)의 장관으로 종3품의 벼슬이다. 방국(邦國)의 술과 제사음식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
註 003
유형(柳亨):『구당서』 권77 열전27 유형(柳亨)조에 포주(蒲州) 출신으로 북위(北魏)의 상서좌복야를 지낸 유경(柳慶)의 손자라고 전한다. 좌위중랑장, 공주자사(邛州刺史), 태상경(太常卿) 등을 역임하고 655년에 죽었다.
註 004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일본서기』 권25 효덕천황(孝德天皇) 대화(大化) 3년조에서는 왜를 방문한 김춘추에 관해서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 하였다고 묘사하였다.
註 005
석전(釋奠): 국학과 같은 유학 교육기관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제사하는 의식이다. ‘석(釋)’은 ‘설치한다[置]’라는 뜻이고, ‘전(奠)’은 ‘그친다[停]’는 뜻으로, 제수를 올릴 뿐이고 잔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 한편 김춘추가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참관한 것은 석전례의 절차 가운데 하나인 시학(視學)이고, 이후 신라에 시학이 도입됨으로써 국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강론에 참여하고 유능한 국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여 지지기반을 확충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채미하, 2009, 「신라 국왕의 視學과 그 의미」, 『韓國思想史學』 32).
註 006
「온탕비(溫湯碑)」 : 당(唐) 태종(太宗)이 여산(驪山)의 온천에 가서 세운 비이다. 『신당서(新唐書)』 권1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高祖)가 무덕 6년(623) 2월 경술(庚戌)에 온탕(溫湯)에 갔다가 임자(壬子)에 사냥하고, 갑인(甲寅)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온탕비(溫湯碑)」는 이 사실을 기록한 비명일 것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4쪽).
註 007
「진사비(晉祠碑)」 :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진사(晉祠)에 관해서 지은 비이다. 진사는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시[太原縣]의 서남쪽 현옹산(懸甕山) 기슭의 진수(晉水)가 발원하는 곳에 있는 사당인데, 여기서 진(晉)나라의 시조 당숙우(唐叔虞)를 제사지냈다.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태원 출신이었으므로 거병(擧兵) 후 이 사당에 제사를 하였으며, 태종이 정관 2년(628)에 이곳에 가서 비(碑)를 세우고 진사의 명(銘)을 지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
註 008
『진서(晉書)』: 당(唐) 태종(太宗) 때 방현령(房玄齡) 등이 칙명(勅命)을 받아 편찬한 정사(正史)로, 서진(西晉) 4대 54년과 동진(東晉) 11대 120년간의 일을 기록하였다. 진(晉)~육조(六朝) 시기에 편찬된 여러 종의 진사(晉史) 중에서 저명한 18가(家)의 진사를 모으고 장영서의 『진서(晉書)』를 위주로 삼아 태종 때 다시 편찬했으므로 ‘새로 편찬한 진서’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 선무기(宣武紀)와 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 2명의 열전(列傳)에 붙은 사론(史論)은 태종이 직접 지은한 것이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
註 009
장복(章服): 관복(官服) 혹은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의례복(儀禮服) 등의 공식 복장을 뜻한다.
註 010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제1 태종춘추공조『삼국유사』 권제4 의해(義解)제5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의 공복을 가져와 신라에서 시행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것은 김춘추 세력과 자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대당 관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경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南東信, 1992, 「慈藏의 佛敎思想과 佛敎治國策」, 『韓國史硏究』 76). 그러나 자장이 불교 외에 당의 문물이 신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註 011
특진(特進): 당나라 정2품의 문산관(文散官) 벼슬이다. 한편「김인문비(金仁問碑)」 단편(斷片)을 보면, 김춘추가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관작을 받은 때가 정관(貞觀) 21년(647)이라고 하여 본서의 기록보다 1년 빠르게 되어 있다.
註 012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당나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좌무위(左武衛)에 속한 종3품의 무관직(武官職)으로, 무위는 궁궐을 호위하는 부대의 하나이다. 당나라에서는 좌·우무위를 두고, 대장군(大將軍) 각 1명, 장군 각 2명을 두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65쪽).
註 013
춘추가 또한 …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9 태종(太宗) 정관(貞觀) 22년(648) 12월 계미조,『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4 외신부(外臣部) 포이(褒異) 태종 정관 22년 12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註 014
본국으로 … 극진히 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신당서(新唐書)』 권220 신라전,『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4 외신부(外臣部) 포이(褒異) 태종 정관(貞觀) 23년(649) 2월 계사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註 015
아들이 일곱 :『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들로 문명왕후(文明王后) 소생의 법민(法敏)·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이 있고, 그 외에 서자인 개지문(皆知文)·거득령(車得令)·마득(馬得), 그리고 딸 5명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무열왕(武烈王) 2년(655)조에는 노차와 지경 사이에 인태(仁泰)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일곱 아들’은 문명왕후 소생만을 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註 016
숙위(宿衛): 원래 숙위는 고대 중국 왕조의 궁정을 수비하는 친위대인데, 중원 왕조 내부의 관료체계를 외국까지 확대 적용하여 이들의 왕자나 귀족 자제들이 숙위를 맡도록 하였다. 숙위는 종주국의 이해만 대변한 것이 아니고, 현지에 체류하면서 요즘의 외국 주재 대사와 같은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 시기의 신라 숙위는 체재 중에 국학에서 수학하거나 신라의 학생들을 인솔해가서 당 조정에 국학 입학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김창석, 288~289쪽). 진덕왕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의 아들 문왕(文王)이 처음 숙위로 임명된 이후 경문왕 16년(876) 김인(金因)에 이르기까지 총 16명의 신라 숙위가 확인된다(申瀅植, 359~379쪽).
〈참고문헌〉
申瀅植, 1984, 「新羅의 宿衛外交」,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김창석, 2016 「신라 문화의 국제성」, 『신라의 대외관계와 문화교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註 017
대감(大監): 관직인지 사람 이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병부(兵部)의 차관, 시위부(侍衛府)의 장군 다음의 군관, 6정군단의 차관급의 군관을 대감이라고 불렀다.
註 018
온군해(溫君解): 김춘추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하는 도중에 고구려 순라군에게 김춘추 대신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대아찬(大阿湌)으로 추증된 것으로 미루어 진골(眞骨)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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