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의관을 착용하다 ( 649년 01월(음) )

3년(649) 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001001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했으나 이는 관료의 전통적인 복장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김춘추가 가져온 당의 복식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식으로 개정하였다.『일본서기』 권25 효덕천황(孝德天皇) 백치(白雉) 2년(651)조에는 신라의 사절단이 당나라의 복식을 입고 축자(筑紫)에 이르자 일본 조정이 반발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종래에 본서 권제33 잡지제2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冠制)는 법흥왕대 품주(稟主) 조직 내에서 금하대등(衿荷大等)과 그 이하의 관직자들이 썼던 관을 규정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당나라의 의관제(衣冠制)를 수용하여 신라의 의관제를 개정한 진덕왕대에 성골(聖骨)이 소멸됨과 동시에 비로소 두품제가(頭品制)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골품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에 의거하여 자비청황색(紫緋靑黃色)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를 정비하였다는 견해(木村誠)가 있었다. 이밖에 금하와 상당, 적위가 모두 사원성전(寺院成典)의 관리였다는 사실,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행정관서의 관직체계가 진덕왕대에 비로소 정비된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와 자비청황색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는 당나라의 의관제를 수용한 진덕여왕대에 정비되었고, 진골과 6~4두품이라는 법제적인 신분을 기본으로 하는 골품제 역시 이때 완비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전덕재, 2000).
〈참고문헌〉
木村誠, 1976, 「6世紀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 『歷史學硏究』 428
전덕재, 2000, 「7세기 중반 관직에 대한 관등규정의 정비와 골품제의 확립」, 『한국 고대의 신분제와 관등제』,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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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했으나 이는 관료의 전통적인 복장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김춘추가 가져온 당의 복식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식으로 개정하였다.『일본서기』 권25 효덕천황(孝德天皇) 백치(白雉) 2년(651)조에는 신라의 사절단이 당나라의 복식을 입고 축자(筑紫)에 이르자 일본 조정이 반발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종래에 본서 권제33 잡지제2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冠制)는 법흥왕대 품주(稟主) 조직 내에서 금하대등(衿荷大等)과 그 이하의 관직자들이 썼던 관을 규정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당나라의 의관제(衣冠制)를 수용하여 신라의 의관제를 개정한 진덕왕대에 성골(聖骨)이 소멸됨과 동시에 비로소 두품제가(頭品制)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골품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에 의거하여 자비청황색(紫緋靑黃色)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를 정비하였다는 견해(木村誠)가 있었다. 이밖에 금하와 상당, 적위가 모두 사원성전(寺院成典)의 관리였다는 사실,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행정관서의 관직체계가 진덕왕대에 비로소 정비된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와 자비청황색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는 당나라의 의관제를 수용한 진덕여왕대에 정비되었고, 진골과 6~4두품이라는 법제적인 신분을 기본으로 하는 골품제 역시 이때 완비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전덕재, 2000).
〈참고문헌〉
木村誠, 1976, 「6世紀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 『歷史學硏究』 428
전덕재, 2000, 「7세기 중반 관직에 대한 관등규정의 정비와 골품제의 확립」, 『한국 고대의 신분제와 관등제』, 아카넷
주제분류
사회>사회조직>신분>복식(옷·관모·혁대·장식구·신발·가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