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공이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 667년 10월02일(음) )

〔7년(667)〕 겨울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平壤城) 북쪽 200리 거리에 도착하였다. 〔영공이〕 이동혜(尒同兮)001001 이동혜촌(尒同兮村):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에는 숭선군(嵩善郡), 즉 일선군(一善郡)의 속현으로 이동혜현(尒同兮縣)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79쪽).닫기 촌주(村主)002002 촌주(村主): 신라에서 촌을 다스리는 유력자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신라에서 촌주제가 언제 성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 '촌주'라는 직명을 가진 자가 등장하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평왕 13년(591)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慶州 南山新城碑)」)에 외위(外位)를 수여받은 ‘군상촌주(郡上村主)’, ‘군중상인(郡中上人)’이 나오는데, 여기서 상인은 촌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으로 보건대, 촌주가 나두(邏頭)와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같은 지방관을 도와 군의 수취와 역역동원, 군역징발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촌주는 모든 촌락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촌락에 1명씩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직역(職役)에 대한 경제적 반대급부로 '촌주위답'(村主位畓)이라는 토지가 주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신라 하대(下代)에 진촌주(眞村主)는 5두품, 차촌주(次村主)는 4두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밖에 856년에 조성된 (「규흥사종명(竅興寺鐘銘)」)에는 삼중사간(三重沙干)의 중위를 지닌 상촌주(上村主)와 함께 제2촌주·제3촌주 등의 구분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성왕(眞聖王) 3년(889)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때 전사한 촌주 우련(祐連)의 지위를 그의 10여 세 된 아들에게 잇게 한 사례로 보아 촌주의 지위는 세습되기도 했음을 살필 수 있다. 촌주 가운데 일부는 나말여초에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金光洙, 1979,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韓國史硏究』 23
李鍾旭, 1980,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歷史學報』 86
李宇泰. 1981, 「新羅의 村과 村主-三國時代를 중심으로-」, 『韓國史論』 7, 서울대 국사학과
金周成, 1983, 「新羅 下代의 地方官司와 村主」, 『韓國史硏究』 41
姜鳳龍, 2002, 「金石文과 村落文書를 통해서 본 新羅의 村制」,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23
닫기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003003 촌주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 촌주는 지방인으로서 외위(外位)가 수여되는 것이 기본인데, 이동혜촌 촌주 강심은 경위(京位)인 대나마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7세기에 접어들어 전쟁이 치열해지고 장기화되면서 지방인에게 외위만을 지급하던 기존의 포상 방법에 한계가 드러나자, 특수한 경우 군공을 세운 지방인에 대한 포상으로 경위(京位)를 지급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문무왕 14년(674)에 기존에 지방인에게 주어졌던 외위를 아예 경위로 전환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지며 외위는 소멸하고 관등은 경위로 단일화된다. 여기에 보이는 강심의 사례 또한 그 중간 과정을 반영한다고 하겠다.닫기을 뽑아 보내니, 〔강심이〕 거란(契丹)004004 거란(契丹): 내몽골 흥안령(興安嶺) 기슭의 송막(松漠) 지역에서 발흥한 종족 집단이다. 거란의 계통에 대해서는 퉁구스족, 동호족, 선비족, 몽골족, 몽골과 퉁구스의 혼합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우문(宇文)·고막해(庫莫奚)와 함께 선비(鮮卑)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유목을 위주로 하다가 점차 농업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주변 강대 민족의 성쇠에 따라서 변동을 겪었다(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닫기 기병(騎兵)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阿珍含城)005005 아진함성(阿珍含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에 따르면, 한주(漢主)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 중 안협현(安峽縣)은 본래 고구려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이었다고 하는데, 아진함성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아진압현의 위치는 현재의 북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으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17쪽).닫기을 거쳐 한성(漢城)006006 한성(漢城):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특별시를 가리킨다.닫기에 도착하였다. 편지를 전하여 출병할 시기를 독촉하므로 대왕이 이를 따랐다.

註 001
이동혜촌(尒同兮村):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에는 숭선군(嵩善郡), 즉 일선군(一善郡)의 속현으로 이동혜현(尒同兮縣)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79쪽).
註 002
촌주(村主): 신라에서 촌을 다스리는 유력자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신라에서 촌주제가 언제 성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 '촌주'라는 직명을 가진 자가 등장하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평왕 13년(591)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慶州 南山新城碑)」)에 외위(外位)를 수여받은 ‘군상촌주(郡上村主)’, ‘군중상인(郡中上人)’이 나오는데, 여기서 상인은 촌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으로 보건대, 촌주가 나두(邏頭)와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같은 지방관을 도와 군의 수취와 역역동원, 군역징발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촌주는 모든 촌락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촌락에 1명씩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직역(職役)에 대한 경제적 반대급부로 '촌주위답'(村主位畓)이라는 토지가 주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신라 하대(下代)에 진촌주(眞村主)는 5두품, 차촌주(次村主)는 4두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밖에 856년에 조성된 (「규흥사종명(竅興寺鐘銘)」)에는 삼중사간(三重沙干)의 중위를 지닌 상촌주(上村主)와 함께 제2촌주·제3촌주 등의 구분이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성왕(眞聖王) 3년(889)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때 전사한 촌주 우련(祐連)의 지위를 그의 10여 세 된 아들에게 잇게 한 사례로 보아 촌주의 지위는 세습되기도 했음을 살필 수 있다. 촌주 가운데 일부는 나말여초에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金光洙, 1979,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韓國史硏究』 23
李鍾旭, 1980,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歷史學報』 86
李宇泰. 1981, 「新羅의 村과 村主-三國時代를 중심으로-」, 『韓國史論』 7, 서울대 국사학과
金周成, 1983, 「新羅 下代의 地方官司와 村主」, 『韓國史硏究』 41
姜鳳龍, 2002, 「金石文과 村落文書를 통해서 본 新羅의 村制」,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23
註 003
촌주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 촌주는 지방인으로서 외위(外位)가 수여되는 것이 기본인데, 이동혜촌 촌주 강심은 경위(京位)인 대나마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7세기에 접어들어 전쟁이 치열해지고 장기화되면서 지방인에게 외위만을 지급하던 기존의 포상 방법에 한계가 드러나자, 특수한 경우 군공을 세운 지방인에 대한 포상으로 경위(京位)를 지급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문무왕 14년(674)에 기존에 지방인에게 주어졌던 외위를 아예 경위로 전환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지며 외위는 소멸하고 관등은 경위로 단일화된다. 여기에 보이는 강심의 사례 또한 그 중간 과정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註 004
거란(契丹): 내몽골 흥안령(興安嶺) 기슭의 송막(松漠) 지역에서 발흥한 종족 집단이다. 거란의 계통에 대해서는 퉁구스족, 동호족, 선비족, 몽골족, 몽골과 퉁구스의 혼합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우문(宇文)·고막해(庫莫奚)와 함께 선비(鮮卑)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유목을 위주로 하다가 점차 농업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주변 강대 민족의 성쇠에 따라서 변동을 겪었다(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註 005
아진함성(阿珍含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에 따르면, 한주(漢主)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 중 안협현(安峽縣)은 본래 고구려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이었다고 하는데, 아진함성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아진압현의 위치는 현재의 북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으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17쪽).
註 006
한성(漢城):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특별시를 가리킨다.
주제분류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