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10월 22일에 유신(庾信)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인문(仁問)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伊湌)과 장군(將軍) 등을 모두 각간(角干)으로 삼았고, 소판(蘇判)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大幢) 소감(小監)본득(本得)은 사천(蛇川)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漢山州) 소감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平壤城)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였던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선극(宣極)은 평양성대문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모두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 1천 섬을 내렸다. 서당(誓幢) 당주(幢主)김둔산(金遁山)은 평양군영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의 관등과 조 7백 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北門)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주었고, 군사(軍師)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렸다. 가군사(假軍師)비열홀(卑列忽)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高干)의 관등과 벼 5백 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의 사찬(沙湌)구율(求律)은 사천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 나아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그는]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