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 668년 10월22일(음) )

겨울 10월 22일에 유신(庾信)309309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310310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위인 각간보다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대각간(大角干)을 받았던 김유신(金庾信)이 문무왕 8년(668)에 처음으로 받았다.닫기을, 인문(仁問)311311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에게 대각간(大角干)312312 신라 17관등의 제1위인 각간(角干)보다도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金庾信)에게만 특별히 내렸다.닫기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伊湌)31331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과 장군(將軍) 등을 모두 각간(角干)31431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으로 삼았고, 소판(蘇判)31531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찬(迊湌)의 다른 이름으로 잡판(迊判), 잡간(迊干)으로도 부른다.닫기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大幢)316316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소감(小監)317317 신라의 무관인 소감(少監)의 잘못이다. 소감은 진흥왕 32년(562)에 제감(弟監)과 같이 처음 두어졌다. 6정(六停)·9서당(九誓幢)을 비롯하여 10정(十停)·5주서(五州誓) 등에도 배속되었는데 그 수는 모두 372명에 이르렀다.닫기본득(本得)은 사천(蛇川)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漢山州) 소감318318 少監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한 무관직으로, 停과 誓幢 등에서 기병과 보병을 통솔했으며 관등이 大舍 이하인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武官條에 의하면, 大幢에는 15명의 少監이 있었다고 한다.닫기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平壤城)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였던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319319 黑嶽縣의 현령이라는 의미인 듯한데, 흑악현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닫기선극(宣極)은 평양성대문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모두 일길찬(一吉湌)320320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일길간(一吉干)·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닫기의 관등을 주고 조(租) 1천 섬을 내렸다. 서당(誓幢)321321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로 편성되었다.닫기 당주(幢主)322322 신라의 군사조직인 당(幢)의 우두머리를 말한다.닫기김둔산(金遁山)은 평양군영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323323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의 관등과 조 7백 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324324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北門)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325325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2위로 경위(京位)의 사찬(沙湌)에 상당하였다.닫기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주었고, 군사(軍師)326326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부양(斧壤)327327 지금의 강원 평강 일대를 말한다닫기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렸다. 가군사(假軍師)328328 《삼국사기》의 잡지 직관조에는 보이지 않는 관직이다. 명칭으로 보아 그 기능은 軍師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임시직인 점에서는 다르다고 하겠다. 군사와 마찬가지로 지방민에게 준 관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닫기비열홀(卑列忽)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高干)329329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3위로 경위(京位)의 급찬(級湌)에 상당하였다.닫기의 관등과 벼 5백 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330330 지금의 충남 아산 일대를 말한다.닫기의 사찬(沙湌)331331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구율(求律)은 사천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 나아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그는]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는 못했다.

註 309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註 310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위인 각간보다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대각간(大角干)을 받았던 김유신(金庾信)이 문무왕 8년(668)에 처음으로 받았다.
註 311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
註 312
신라 17관등의 제1위인 각간(角干)보다도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金庾信)에게만 특별히 내렸다.
註 31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
註 31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
註 31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찬(迊湌)의 다른 이름으로 잡판(迊判), 잡간(迊干)으로도 부른다.
註 316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
註 317
신라의 무관인 소감(少監)의 잘못이다. 소감은 진흥왕 32년(562)에 제감(弟監)과 같이 처음 두어졌다. 6정(六停)·9서당(九誓幢)을 비롯하여 10정(十停)·5주서(五州誓) 등에도 배속되었는데 그 수는 모두 372명에 이르렀다.
註 318
少監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한 무관직으로, 停과 誓幢 등에서 기병과 보병을 통솔했으며 관등이 大舍 이하인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武官條에 의하면, 大幢에는 15명의 少監이 있었다고 한다.
註 319
黑嶽縣의 현령이라는 의미인 듯한데, 흑악현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註 320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일길간(一吉干)·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
註 321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로 편성되었다.
註 322
신라의 군사조직인 당(幢)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註 323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
註 324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註 325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2위로 경위(京位)의 사찬(沙湌)에 상당하였다.
註 326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註 327
지금의 강원 평강 일대를 말한다
註 328
《삼국사기》의 잡지 직관조에는 보이지 않는 관직이다. 명칭으로 보아 그 기능은 軍師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임시직인 점에서는 다르다고 하겠다. 군사와 마찬가지로 지방민에게 준 관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註 329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3위로 경위(京位)의 급찬(級湌)에 상당하였다.
註 330
지금의 충남 아산 일대를 말한다.
註 331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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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군사조직>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