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 미녀를 바치다 ( 723년 03월(음) )

22년(723년) 봄 3월에 왕이 에 사신을 보내 미녀 2명을 바쳤다. [미녀 가운데] 한 명은 이름이 포정(抱貞)이며 아버지는 나마(奈麻) 천승(天承)이었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정완(貞菀)이며 아버지는 대사(大舍) 충훈(忠訓)이었다.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와 자태를 갖추게 하여 보내었다. 현종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고종 자매로서 가족과 떨어지고 본국과 헤어졌으니 짐은 차마 남겨둘 수가 없구나.” [현종은] 후하게 하사하고는 돌려보냈다.163163 《책부원귀》 권170 帝王部 來遠條, 《신당서》 권220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등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開元 12년 즉 성덕왕 23년이라 하여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당에 바쳤던 抱貞과 貞菀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天承忠訓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9~270쪽)닫기 그런데 정완의 묘비164164 이 碑(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또 그 碑文(비문)의 작자도 未詳(미상)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닫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효성왕 6년인 천보(天寶)165165 당나라 玄宗代의 연호로 742년부터 756년까지 15년간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닫기 원년(742)에 에서 돌아왔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166166 이 구절은 성덕왕 22년 3월조 기사에 대한 異說을 소개하고 편찬자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편찬 방식상 細註로 처리되었어야 할 부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닫기

註 163
《책부원귀》 권170 帝王部 來遠條, 《신당서》 권220 신라전,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등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開元 12년 즉 성덕왕 23년이라 하여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당에 바쳤던 抱貞과 貞菀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天承忠訓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9~270쪽)
註 164
이 碑(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또 그 碑文(비문)의 작자도 未詳(미상)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3쪽)
註 165
당나라 玄宗代의 연호로 742년부터 756년까지 15년간 사용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
註 166
이 구절은 성덕왕 22년 3월조 기사에 대한 異說을 소개하고 편찬자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편찬 방식상 細註로 처리되었어야 할 부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70쪽)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조공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문화>문화재>금석문>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