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옮기다 ( 782년 02월(음) )

2월에 왕이 한산주382382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京畿道 河南市와 廣州郡 및 서울특별시 江東區·松坡區 일대이다. 이 곳은 원래 백제의 河南慰禮城 수도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가, 475년의 백제 수도 함락에 따라 고구려가 이 곳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551년에 백제 성왕이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나, 진흥왕 14년(553)에 신라가 이를 다시 빼앗아 新州(하남시)를 설치하였다. 同王 18년(557)에 新州를 폐지하고 漢山州로 개칭하였으며, 同王 29년(568)에 漢山州를 폐지하고 南川州(이천시)를 설치하였다. 진평왕 26년(604)에 다시 南川州를 폐지하고 다시 漢山州(하남시)를 설치하였다. 문무왕 15년(675) 買肖城(양주군 주내면으로 추정) 및 七重城(파주시 적성면) 전투에서 신라가 唐軍을 물리친 후, 同王 16년(676) 나당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漢山州의 북쪽 경계는 대략 兎山郡(금천군 토산면)·富平郡(철원군 김화읍) 線에 머물러 있었으나, 차츰 그 北限界線이 올라갔다. 즉 효소왕 3년(694)에 松岳城(개성시)과 牛岑城(금천군 우봉면)을 쌓았고, 성덕왕 12년(703)에 開城(개풍군 서면 개성리)을 쌓았다. 성덕왕 34년(735)에 당 玄宗이 신라에게 浿江(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고 한 후, 경덕왕 7년(748)에 大谷城(평산군 평산면) 등 14郡縣을 설치하고, 同王 16년(757)에 이름을 漢州로 고치고 1州, 1小京, 27郡, 46縣을 領屬케 하였다. 同王 21년(762)에 五谷城(서흥군 서흥면), 巖城(봉산군 동선면 선령리), 漢城城(신천군 문무면 고현리), 獐塞城(수안군 수안면), 池城城(해주시), 德谷城(곡산군 곡산면)의 6城을 쌓고 太守를 두었다. 헌덕왕이 取城郡(황주군 황주읍)과 土山縣(중화군 상원면)등 3縣을 설치하고 同王 18년(826)에 浿江長城을 쌓음으로써 漢州의 경계가 완성되었다. 경덕왕이 漢山州에서 漢州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에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권10의 선덕왕·원성왕·소성왕·헌덕왕·흥덕왕《삼국사기》 권12의 효공왕대의 기사에서는 모두 漢山州의 명칭이 나오고, 《삼국사기》 권11의 정강왕·진성왕대의 기사에서는 漢州의 명칭이 쓰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흥왕 및 진평왕이 설치한 州가 北漢山州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漢山州의 誤記로서 모두 廣州 일대를 가리킨다는 연구가 있다(李丙燾, 《(僞)北漢山州의 置廢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704~709쪽).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 漢城軍主의 이름이 보이므로, 신라 통일기의 漢州 및 고려의 廣州를 비롯하여 진흥왕대의 漢山州도 현재의 하남시 및 광주군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은 틀림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2-234쪽).닫기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383383 《與地勝覽(여지승람)》 권51 平壤(평양) 古跡(고적), 浿江鎭條(패강진조)에 《삼국사기》의 이 기사와, 헌덕왕 18년 조의 “命牛岑太守白永, 築浿江長城”이란 기사를 인용한 후 “或云鎭在黃海道牛峯縣之浿江”이라 하였음과 같이 이때의 浿江鎭은 牛峯縣(우봉현 : 지금의 김천 방면)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3쪽).닫기으로 옮겼다.384384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浿江鎭典條에 의하면, 宣德王 2년에 浿江鎭典의 頭上大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해에 한산주의 주민을 패강진으로 이주시킨 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한산주 백성의 이주를 계기로 패강진은 영구적인 鎭이 되었다(藤田亮策, 「新羅九州五京攷」, 《朝鮮學論考》, 1963, 363쪽 | 이기동, 「신라 하대의 패강진」,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216~220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닫기

註 382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京畿道 河南市와 廣州郡 및 서울특별시 江東區·松坡區 일대이다. 이 곳은 원래 백제의 河南慰禮城 수도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가, 475년의 백제 수도 함락에 따라 고구려가 이 곳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551년에 백제 성왕이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나, 진흥왕 14년(553)에 신라가 이를 다시 빼앗아 新州(하남시)를 설치하였다. 同王 18년(557)에 新州를 폐지하고 漢山州로 개칭하였으며, 同王 29년(568)에 漢山州를 폐지하고 南川州(이천시)를 설치하였다. 진평왕 26년(604)에 다시 南川州를 폐지하고 다시 漢山州(하남시)를 설치하였다. 문무왕 15년(675) 買肖城(양주군 주내면으로 추정) 및 七重城(파주시 적성면) 전투에서 신라가 唐軍을 물리친 후, 同王 16년(676) 나당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漢山州의 북쪽 경계는 대략 兎山郡(금천군 토산면)·富平郡(철원군 김화읍) 線에 머물러 있었으나, 차츰 그 北限界線이 올라갔다. 즉 효소왕 3년(694)에 松岳城(개성시)과 牛岑城(금천군 우봉면)을 쌓았고, 성덕왕 12년(703)에 開城(개풍군 서면 개성리)을 쌓았다. 성덕왕 34년(735)에 당 玄宗이 신라에게 浿江(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고 한 후, 경덕왕 7년(748)에 大谷城(평산군 평산면) 등 14郡縣을 설치하고, 同王 16년(757)에 이름을 漢州로 고치고 1州, 1小京, 27郡, 46縣을 領屬케 하였다. 同王 21년(762)에 五谷城(서흥군 서흥면), 巖城(봉산군 동선면 선령리), 漢城城(신천군 문무면 고현리), 獐塞城(수안군 수안면), 池城城(해주시), 德谷城(곡산군 곡산면)의 6城을 쌓고 太守를 두었다. 헌덕왕이 取城郡(황주군 황주읍)과 土山縣(중화군 상원면)등 3縣을 설치하고 同王 18년(826)에 浿江長城을 쌓음으로써 漢州의 경계가 완성되었다. 경덕왕이 漢山州에서 漢州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에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권10의 선덕왕·원성왕·소성왕·헌덕왕·흥덕왕《삼국사기》 권12의 효공왕대의 기사에서는 모두 漢山州의 명칭이 나오고, 《삼국사기》 권11의 정강왕·진성왕대의 기사에서는 漢州의 명칭이 쓰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흥왕 및 진평왕이 설치한 州가 北漢山州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漢山州의 誤記로서 모두 廣州 일대를 가리킨다는 연구가 있다(李丙燾, 《(僞)北漢山州의 置廢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704~709쪽).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 漢城軍主의 이름이 보이므로, 신라 통일기의 漢州 및 고려의 廣州를 비롯하여 진흥왕대의 漢山州도 현재의 하남시 및 광주군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은 틀림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2-234쪽).
註 383
《與地勝覽(여지승람)》 권51 平壤(평양) 古跡(고적), 浿江鎭條(패강진조)에 《삼국사기》의 이 기사와, 헌덕왕 18년 조의 “命牛岑太守白永, 築浿江長城”이란 기사를 인용한 후 “或云鎭在黃海道牛峯縣之浿江”이라 하였음과 같이 이때의 浿江鎭은 牛峯縣(우봉현 : 지금의 김천 방면)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43쪽).
註 384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浿江鎭典條에 의하면, 宣德王 2년에 浿江鎭典의 頭上大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해에 한산주의 주민을 패강진으로 이주시킨 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한산주 백성의 이주를 계기로 패강진은 영구적인 鎭이 되었다(藤田亮策, 「新羅九州五京攷」, 《朝鮮學論考》, 1963, 363쪽 | 이기동, 「신라 하대의 패강진」,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216~220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9쪽).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