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창이 반란을 일으키다
(
822년
03월
)
〔14년(822)〕 3월에 웅천주(熊川州)註 001 도독(都督)註 002 헌창(憲昌)註 003이 아버지 주원(周元)註 004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註 005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만들어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武珍州),註 006 완산주(完山州),註 007 청주(菁州),註 008 사벌주(沙伐州)註 009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國原京),註 010 서원경(西原京),註 011 금관경(金官京)註 012의 사신(仕臣)註 013 및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註 014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켰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註 015은 몸을 빼 추화군(推火郡)註 016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註 017 우두주(牛頭州),註 018 삽량주(歃良州),註 019 패강진(浿江鎭),註 020 북원경(北原京)註 021 등은 김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병사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주원(周元):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의 5세손이다. 본서 권제9 신라본기 제9 혜공왕 13년(777) 10월조의 주석 참조. 『삼국유사』 권2 기이제2 원성왕조에 의하면 김주원은 상재(上宰)이고 원성왕은 차재(次宰)이고, 원성왕이 김주원이 자신의 위에 있다는 언급을 하는 것을 보아서 당시 김주원의 왕위계승 가능성이 높았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의 인물조에는 김주원이 원성왕이 즉위하자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일대인 명주(溟州)로 이주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여졌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 일으켰는데: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부친 김주원(金周元)이 원성왕(元聖王)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났고, 그리고 이후 헌덕왕(憲德王) 형제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에 지방으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즉 김주원계와 원성왕계 사이에서 벌어진 왕위쟁탈전의 연장이었고(崔炳憲, 464~465쪽), 무열왕계의 왕위 부흥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金昌謙, 297~298쪽), 결국 헌덕왕 즉위 이후 중앙 정치무대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진골귀족 세력의 반발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金東洙, 39쪽). 그렇기 때문에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호족들이 할거하는 경향이 촉진되고 왕위쟁탈전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李基東, 157쪽).
그런데 김헌창의 반란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일찍부터 골품제적 귀족사회인 신라의 한계가 노정되면서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측면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金貞淑, 174~176쪽). 김헌창의 반란이 단순한 왕위 탈취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지향했고, 그것이 지역사회의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었다는 것은, 신라 골품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지방인들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하일식, 58~59쪽). 그리고 결국 김헌창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지방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신라 중앙에 집중되었던 정치적‧사회적인 무게 중심이 점차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되며(주보돈, 2008), 후삼국으로의 분열의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黃善榮, 20~25쪽).
〈참고문헌〉
崔炳憲, 1976, 「新羅 下代社會의 動搖」,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金東洙, 1982, 「新羅 憲德·興德王代의 改革政治-특히 興德王 九年에 頒布된 諸規定의 政治的 背景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39
金貞淑, 1984,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 『白山學報』 28
黃善榮, 1998, 「新羅 下代 金憲昌 亂의 性格」, 『釜山史學』 35
金昌謙, 2003, 『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景仁文化社
주보돈, 2008, 「新羅 下代 金憲昌의 亂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51
曺凡煥, 2010, 「新羅 下代 憲德王의 副君 설치와 그 정치적 의미」, 『震檀學報』 110
하일식, 2010,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사회와 지방세력-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韓國中世史硏究』 29
그런데 김헌창의 반란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일찍부터 골품제적 귀족사회인 신라의 한계가 노정되면서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측면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金貞淑, 174~176쪽). 김헌창의 반란이 단순한 왕위 탈취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지향했고, 그것이 지역사회의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었다는 것은, 신라 골품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지방인들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하일식, 58~59쪽). 그리고 결국 김헌창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지방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신라 중앙에 집중되었던 정치적‧사회적인 무게 중심이 점차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되며(주보돈, 2008), 후삼국으로의 분열의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黃善榮, 20~25쪽).
〈참고문헌〉
崔炳憲, 1976, 「新羅 下代社會의 動搖」,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金東洙, 1982, 「新羅 憲德·興德王代의 改革政治-특히 興德王 九年에 頒布된 諸規定의 政治的 背景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39
金貞淑, 1984,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 『白山學報』 28
黃善榮, 1998, 「新羅 下代 金憲昌 亂의 性格」, 『釜山史學』 35
金昌謙, 2003, 『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景仁文化社
주보돈, 2008, 「新羅 下代 金憲昌의 亂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51
曺凡煥, 2010, 「新羅 下代 憲德王의 副君 설치와 그 정치적 의미」, 『震檀學報』 110
하일식, 2010,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사회와 지방세력-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韓國中世史硏究』 29
註) 001
註) 003
註) 004
주원(周元):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의 5세손이다. 본서 권제9 신라본기 제9 혜공왕 13년(777) 10월조의 주석 참조. 『삼국유사』 권2 기이제2 원성왕조에 의하면 김주원은 상재(上宰)이고 원성왕은 차재(次宰)이고, 원성왕이 김주원이 자신의 위에 있다는 언급을 하는 것을 보아서 당시 김주원의 왕위계승 가능성이 높았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의 인물조에는 김주원이 원성왕이 즉위하자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일대인 명주(溟州)로 이주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여졌다고 전해진다.
註) 005
아버지 … 일으켰는데: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부친 김주원(金周元)이 원성왕(元聖王)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났고, 그리고 이후 헌덕왕(憲德王) 형제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에 지방으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즉 김주원계와 원성왕계 사이에서 벌어진 왕위쟁탈전의 연장이었고(崔炳憲, 464~465쪽), 무열왕계의 왕위 부흥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金昌謙, 297~298쪽), 결국 헌덕왕 즉위 이후 중앙 정치무대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진골귀족 세력의 반발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金東洙, 39쪽). 그렇기 때문에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호족들이 할거하는 경향이 촉진되고 왕위쟁탈전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李基東, 157쪽).
그런데 김헌창의 반란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일찍부터 골품제적 귀족사회인 신라의 한계가 노정되면서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측면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金貞淑, 174~176쪽). 김헌창의 반란이 단순한 왕위 탈취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지향했고, 그것이 지역사회의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었다는 것은, 신라 골품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지방인들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하일식, 58~59쪽). 그리고 결국 김헌창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지방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신라 중앙에 집중되었던 정치적‧사회적인 무게 중심이 점차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되며(주보돈, 2008), 후삼국으로의 분열의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黃善榮, 20~25쪽).
〈참고문헌〉
崔炳憲, 1976, 「新羅 下代社會의 動搖」,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金東洙, 1982, 「新羅 憲德·興德王代의 改革政治-특히 興德王 九年에 頒布된 諸規定의 政治的 背景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39
金貞淑, 1984,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 『白山學報』 28
黃善榮, 1998, 「新羅 下代 金憲昌 亂의 性格」, 『釜山史學』 35
金昌謙, 2003, 『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景仁文化社
주보돈, 2008, 「新羅 下代 金憲昌의 亂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51
曺凡煥, 2010, 「新羅 下代 憲德王의 副君 설치와 그 정치적 의미」, 『震檀學報』 110
하일식, 2010,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사회와 지방세력-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韓國中世史硏究』 29
그런데 김헌창의 반란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일찍부터 골품제적 귀족사회인 신라의 한계가 노정되면서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측면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金貞淑, 174~176쪽). 김헌창의 반란이 단순한 왕위 탈취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지향했고, 그것이 지역사회의 상당한 호응을 끌어내었다는 것은, 신라 골품제 사회에 반감을 가진 지방인들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하일식, 58~59쪽). 그리고 결국 김헌창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지방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신라 중앙에 집중되었던 정치적‧사회적인 무게 중심이 점차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되며(주보돈, 2008), 후삼국으로의 분열의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黃善榮, 20~25쪽).
〈참고문헌〉
崔炳憲, 1976, 「新羅 下代社會의 動搖」,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金東洙, 1982, 「新羅 憲德·興德王代의 改革政治-특히 興德王 九年에 頒布된 諸規定의 政治的 背景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39
金貞淑, 1984,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 『白山學報』 28
黃善榮, 1998, 「新羅 下代 金憲昌 亂의 性格」, 『釜山史學』 35
金昌謙, 2003, 『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景仁文化社
주보돈, 2008, 「新羅 下代 金憲昌의 亂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51
曺凡煥, 2010, 「新羅 下代 憲德王의 副君 설치와 그 정치적 의미」, 『震檀學報』 110
하일식, 2010,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사회와 지방세력-향촌 지배세력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 『韓國中世史硏究』 29
註) 006
註) 007
註) 008
註) 009
註)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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