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12512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쪽).닫기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침범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126126 경애왕 4년(927)에 신라에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은 連式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127127 고려의 구원병을 인솔한 사람은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朱) 등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닫기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을 공격해 들어갔다.128128 견훤이 신라 왕도에 쳐들어간 실제적인 목적은 경애왕이 추진하고 있던 고려와의 결합을 무산시키고 신덕·경명·경애의 3대에 걸친 박씨 왕위의 정통성 때문이었으며, 견훤이 손쉽게 도성의 주연장소에까지 침입하여 경애왕일파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왕실 내부의 박씨계와 김씨계의 분열 결과 김씨 왕족의 동조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신라의 멸망과 견훤》, 《충북사학》 2, 1989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384쪽).닫기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129129 현재의 경북 경주시 배동(拜洞) 남산 서쪽에 있던 연회 장소이다. 현재 정자는 없고 포어(鮑魚) 형태의 수구(水溝)만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 경상북도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 유흥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55쪽).닫기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땅을 기면서 노복이 되기를 구걸했으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공사(公私)의 재물 모두 빼앗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130130 원문은 족제(族弟)로 되어 있다. 집안의 아우뻘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고려사》 권1에서는 김부(金傅)를 경애왕의 ‘표제(表弟)’라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김부가 박씨인 경명왕, 경애왕과 이종형제 간으로 모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장동익, 「김부의 책상부고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론집》 3, 역사교육학회, 1982, 59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닫기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註 12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그런데 《고려사》 권57 지리 1 영주(永州)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에 신라시대의 임고군(臨皐郡)과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을 합하여 설치한 것으로, 일명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고 한 점에서 현재의 경북 영천 지방이 곧 고울부였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0쪽).
註 126
경애왕 4년(927)에 신라에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은 連式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
註 127
고려의 구원병을 인솔한 사람은 시중(侍中) 공훤(公萱),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朱) 등이었다(《고려사》 권1, 태조 10년 9월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쪽).
註 128
견훤이 신라 왕도에 쳐들어간 실제적인 목적은 경애왕이 추진하고 있던 고려와의 결합을 무산시키고 신덕·경명·경애의 3대에 걸친 박씨 왕위의 정통성 때문이었으며, 견훤이 손쉽게 도성의 주연장소에까지 침입하여 경애왕일파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왕실 내부의 박씨계와 김씨계의 분열 결과 김씨 왕족의 동조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신라의 멸망과 견훤》, 《충북사학》 2, 1989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3~384쪽).
註 129
현재의 경북 경주시 배동(拜洞) 남산 서쪽에 있던 연회 장소이다. 현재 정자는 없고 포어(鮑魚) 형태의 수구(水溝)만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 경상북도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 유흥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이재호, 《삼국사기》 1, 솔, 1997, 455쪽).
註 130
원문은 족제(族弟)로 되어 있다. 집안의 아우뻘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고려사》 권1에서는 김부(金傅)를 경애왕의 ‘표제(表弟)’라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김부가 박씨인 경명왕, 경애왕과 이종형제 간으로 모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장동익, 「김부의 책상부고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론집》 3, 역사교육학회, 1982, 59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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