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국을 정벌하다 ( 32년 04월(음) )

〔15년(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001001 호동(好童) : 대무신왕의 아들. 어머니는 갈사국왕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였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호동이라 하였다. 본문에 나오듯 낙랑왕 최리의 사위가 된 뒤 자신의 아내가 된 그 딸에게 신기한 북과 나팔을 파괴하게 하여 낙랑국을 정복하였다. 얼마 뒤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元妃)가 모함하여 부왕의 의심을 받게 되자 자결하였다고 한다. 유의할 점은 호동의 나이인데 본서의 기년을 신뢰한다면 갈사국은 대무신왕 5년(22) 4월에 세워졌다. 대무신왕과 갈사국왕 손녀의 혼인은 그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하므로, 최리의 낙랑국이 멸망하는 대무신왕 15년(32) 당시 호동의 나이는 많이 잡아도 불과 10살 전후이다. 훗날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닫기이 옥저(沃沮)002002 옥저(沃沮) :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와 두만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한 공동체이다. 흔히 전자를 동옥저(東沃沮) 내지 남옥저(南沃沮), 후자를 북옥저(北沃沮)라 하는데, 이는 고구려를 중심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옥저라고만 지칭할 때는 동옥저를 의미하는 경우가 상당하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에서도 동옥저를 따로 언급하였고, 북옥저는 추가적으로 기술하였다. 기사에서 언급된 옥저의 경우 호동이 낙랑왕 최리와 만난 곳이라는 점이 유의되는데, 최리의 정체를 어떻게 보든 그 나라가 낙랑군과 아예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북옥저보다는 동옥저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가구 수는 5000호(戶), 즉 25,000명 정도였고, 거주 지역은 1천여 리에 달하였다. 언어와 습속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는데, 전역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각 읍락마다 장수(長帥)라는 지역 지배자가 존재하였다. 또 사회 풍속으로는 민며느리 제도와 대목곽장(大木槨葬)이 존재하였다.
옥저는 처음에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았으나,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임둔군(臨屯郡)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토착 세력의 공세와 한(漢)의 대외 기조가 온건 노선으로 변화함에 따라 소속에 변동이 생겼고, 전한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B.C. 75)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에 귀속되었다. 이후 후한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동옥저의 읍락들, 즉 영동(嶺東) 7현(縣)은 후국(侯國)이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태조왕 4년(56) 7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최리 낙랑국과 호동의 전승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옥저 지역의 유력자[大人]를 사자로 삼아 공납을 징수케 하는 등 일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는데, 여러 물품 외에 미녀도 보내져 고구려인의 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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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003003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 : 황룡국왕이나 해두국왕을 황룡왕, 해두왕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낙랑왕은 낙랑국왕(樂浪國王)과 다르지 않다. 본문에 나오는 최리 낙랑국 전승의 경우, 애초 역사성을 결여한 후대의 조작으로 보거나(津田左右吉, 1922), 일찍부터 전개된 낙랑과의 항쟁을 설화적으로 기술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1953). 이러한 견해는 낙랑국과 그 왕 최리를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과 그 장(長)인 태수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94년(146) 8월의 낙랑태수라든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낙랑군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서 낙랑군과 그 대표자를 말할 때의 기술 방식은 본문과 다소 다르다. 따라서 낙랑군과 구별되는 낙랑국이 존재하여 왕의 지배를 받았다고 상정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 측에서 볼 때 태수의 위상이 왕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져 왕이라 칭하였을 수도 있기에,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후한서』에 전하는 당시 낙랑군의 상황은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까지 토착 세력가[土人]인 왕조(王調)가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자칭하며 위세를 떨쳤을 뿐 최리의 존재는 찾을 수 없으며, 중국 측 사서에서 이 무렵 고구려가 낙랑을 위협했다거나 하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에 낙랑군이 서북한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정 아래 평양 일대에 낙랑국이 존재했다고 보는 설(尹乃鉉, 1985)도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고려할 때 서북한 일대에 낙랑군이 두어졌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되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그 면에서 주목되는 점은 호동이 옥저 지역, 즉 오늘날의 함흥 일대에서 최리와 만났다고 기술된 사실이다. 이는 낙랑국이 이 근방에 자리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영동 지역에는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는 7개의 현이 존재하였는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광무제 건무 6년(30)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각 현의 토착 세력가, 즉 거수(渠帥)들을 현후(縣侯)를 삼음으로써 후국(侯國)이 성립하게 되었다. 즉 후한 초 영동 일대는 과거 낙랑군 소속의 현이었던 소국들이 존재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최리의 낙랑국 역시 그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임기환, 147~148쪽). 이와 달리 낙랑국은 후국, 즉 소국의 지배자들이 낙랑군을 예우한 결과로 보기도 하나(김성한, 68~69쪽), 그렇게 가정한다면 고구려가 이때 낙랑군을 멸망시킨 것이 되어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国大学文学部
三品彰英, 1953, 「三國史記高句麗本紀の原田批判」, 『大谷大學硏究年報』 6
尹乃鉉, 1985,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 41, 一志社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김성한, 2014, 「한(漢) 군현(郡縣)을 둘러싼 한국고대사의 몇 개 문제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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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북국(北國)004004 북국(北國) : 이 기사의 낙랑국이 고구려 남쪽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닫기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리가〕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의 딸에게 알려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났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 안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나팔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다다른 연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마침내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맞이하여 아들의 처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병장기를 파괴하게 하였다.”라고 한다005005 왕자 호동이 옥저에 … 라고 한다 : 최리 낙랑국과 호동에 얽힌 전승의 대략적인 골자는 고구려가 낙랑군 지역을 지배한 이후부터 고국원왕 25년(355) 전연이 왕을 낙랑(樂浪公)에 봉하기 이전에 생성되었다고 보는 설(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 上』, 龍漢書舍, 85~86쪽)이 제기되었다. 이는 낙랑국을 낙랑군과 다르지 않게 본 것인데, 낙랑국은 옥저 방면의 소국을 가리킨다고 여겨지므로, 기본적인 틀은 해당 지역의 복속 과정과 맞물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닫기

註 001
호동(好童) : 대무신왕의 아들. 어머니는 갈사국왕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였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호동이라 하였다. 본문에 나오듯 낙랑왕 최리의 사위가 된 뒤 자신의 아내가 된 그 딸에게 신기한 북과 나팔을 파괴하게 하여 낙랑국을 정복하였다. 얼마 뒤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元妃)가 모함하여 부왕의 의심을 받게 되자 자결하였다고 한다. 유의할 점은 호동의 나이인데 본서의 기년을 신뢰한다면 갈사국은 대무신왕 5년(22) 4월에 세워졌다. 대무신왕과 갈사국왕 손녀의 혼인은 그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하므로, 최리의 낙랑국이 멸망하는 대무신왕 15년(32) 당시 호동의 나이는 많이 잡아도 불과 10살 전후이다. 훗날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註 002
옥저(沃沮) :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와 두만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한 공동체이다. 흔히 전자를 동옥저(東沃沮) 내지 남옥저(南沃沮), 후자를 북옥저(北沃沮)라 하는데, 이는 고구려를 중심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옥저라고만 지칭할 때는 동옥저를 의미하는 경우가 상당하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에서도 동옥저를 따로 언급하였고, 북옥저는 추가적으로 기술하였다. 기사에서 언급된 옥저의 경우 호동이 낙랑왕 최리와 만난 곳이라는 점이 유의되는데, 최리의 정체를 어떻게 보든 그 나라가 낙랑군과 아예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북옥저보다는 동옥저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가구 수는 5000호(戶), 즉 25,000명 정도였고, 거주 지역은 1천여 리에 달하였다. 언어와 습속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는데, 전역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각 읍락마다 장수(長帥)라는 지역 지배자가 존재하였다. 또 사회 풍속으로는 민며느리 제도와 대목곽장(大木槨葬)이 존재하였다.
옥저는 처음에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았으나,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임둔군(臨屯郡)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토착 세력의 공세와 한(漢)의 대외 기조가 온건 노선으로 변화함에 따라 소속에 변동이 생겼고, 전한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B.C. 75)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에 귀속되었다. 이후 후한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동옥저의 읍락들, 즉 영동(嶺東) 7현(縣)은 후국(侯國)이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태조왕 4년(56) 7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최리 낙랑국과 호동의 전승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옥저 지역의 유력자[大人]를 사자로 삼아 공납을 징수케 하는 등 일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는데, 여러 물품 외에 미녀도 보내져 고구려인의 첩이 되었다.
註 003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 : 황룡국왕이나 해두국왕을 황룡왕, 해두왕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낙랑왕은 낙랑국왕(樂浪國王)과 다르지 않다. 본문에 나오는 최리 낙랑국 전승의 경우, 애초 역사성을 결여한 후대의 조작으로 보거나(津田左右吉, 1922), 일찍부터 전개된 낙랑과의 항쟁을 설화적으로 기술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1953). 이러한 견해는 낙랑국과 그 왕 최리를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과 그 장(長)인 태수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94년(146) 8월의 낙랑태수라든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낙랑군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서 낙랑군과 그 대표자를 말할 때의 기술 방식은 본문과 다소 다르다. 따라서 낙랑군과 구별되는 낙랑국이 존재하여 왕의 지배를 받았다고 상정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 측에서 볼 때 태수의 위상이 왕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져 왕이라 칭하였을 수도 있기에,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후한서』에 전하는 당시 낙랑군의 상황은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까지 토착 세력가[土人]인 왕조(王調)가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자칭하며 위세를 떨쳤을 뿐 최리의 존재는 찾을 수 없으며, 중국 측 사서에서 이 무렵 고구려가 낙랑을 위협했다거나 하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에 낙랑군이 서북한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정 아래 평양 일대에 낙랑국이 존재했다고 보는 설(尹乃鉉, 1985)도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고려할 때 서북한 일대에 낙랑군이 두어졌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되기에 따르기 주저된다. 그 면에서 주목되는 점은 호동이 옥저 지역, 즉 오늘날의 함흥 일대에서 최리와 만났다고 기술된 사실이다. 이는 낙랑국이 이 근방에 자리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영동 지역에는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는 7개의 현이 존재하였는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광무제 건무 6년(30)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각 현의 토착 세력가, 즉 거수(渠帥)들을 현후(縣侯)를 삼음으로써 후국(侯國)이 성립하게 되었다. 즉 후한 초 영동 일대는 과거 낙랑군 소속의 현이었던 소국들이 존재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최리의 낙랑국 역시 그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임기환, 147~148쪽). 이와 달리 낙랑국은 후국, 즉 소국의 지배자들이 낙랑군을 예우한 결과로 보기도 하나(김성한, 68~69쪽), 그렇게 가정한다면 고구려가 이때 낙랑군을 멸망시킨 것이 되어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国大学文学部
三品彰英, 1953, 「三國史記高句麗本紀の原田批判」, 『大谷大學硏究年報』 6
尹乃鉉, 1985,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 41, 一志社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김성한, 2014, 「한(漢) 군현(郡縣)을 둘러싼 한국고대사의 몇 개 문제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97
註 004
북국(北國) : 이 기사의 낙랑국이 고구려 남쪽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註 005
왕자 호동이 옥저에 … 라고 한다 : 최리 낙랑국과 호동에 얽힌 전승의 대략적인 골자는 고구려가 낙랑군 지역을 지배한 이후부터 고국원왕 25년(355) 전연이 왕을 낙랑(樂浪公)에 봉하기 이전에 생성되었다고 보는 설(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 上』, 龍漢書舍, 85~86쪽)이 제기되었다. 이는 낙랑국을 낙랑군과 다르지 않게 본 것인데, 낙랑국은 옥저 방면의 소국을 가리킨다고 여겨지므로, 기본적인 틀은 해당 지역의 복속 과정과 맞물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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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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