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에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키다 ( 32년 12월(음) )

〔15년(32) 12월〕 사신을 한(漢)에 보내 조공하였다.001001 사신을 한(漢)에 보내 조공하였다 :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8년 12월조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음을 전한 것에 근거하였다. 현재 전하는 기록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중앙 조정과 교섭한 가장 이른 사례이다.닫기 광무제(光武帝)002002 광무제(光武帝) : 후한의 초대 황제로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며 이름은 유수(劉秀)이다. 전한(前漢) 애제(哀帝) 건평(建平) 원년(B.C. 6) 경제의 막내아들이자 무제의 이복형인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이 말년에 이르러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하였고, 장안과 낙양을 영유하며 정통성을 천명한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적미군(赤眉軍)에게 살해되자(25), 세를 규합하였다. 당시 중원 각지에는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隴西)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있었고, 적미(赤眉)를 비롯한 도적떼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광무제는 이들과의 대결 끝에 건무 12년(36) 마지막 남은 군웅 공손술을 패배시킴으로써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뒤에는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줄이고 수리사업을 확충하여 민생을 안정케 하였으며, 이완된 중앙 집권 체제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57) 63세로 사망하였다.닫기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003003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 이 기사는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의 기술(“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을 전재한 것인데, 『자치통감』 권42 한기(漢紀)34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 8년 12월조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高句麗王遣使朝貢, 帝復其王號”). 그에 비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이때 고구려가 처음으로 왕을 칭했다고 전한다. 『후한서』 고구려전과 『삼국지』 고구려전의 이러한 차이는 왕망이 고구려에 취한 조치에 대한 기술 방식과 연관된다. 『후한서』에서는 왕망이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삼았다”고 하였으므로, 그 기사에 대응시켜 후한 광무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復其王號]”라고 기술한 것이다. 반면 『삼국지』에서는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삼았으며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다”고 하였기에, 이때 고구려가 후한에 사신을 파견해 “처음 알현하며 왕을 칭하였다[始見稱王]”라고 기술한 것이다. 어느 기사가 보다 정확한 사실을 전하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한서』 권99중 열전69중 왕망전에도 “고구려라는 국호[名]를 하구려로 바꾸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삼국지』고구려전의 기술이 사실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즉 후한이 이때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켜준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처음으로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왕을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余昊奎, 2005, 「高句麗의 국가형성과 漢의 대외정책」, 『軍史』 54, 20~22쪽).닫기 이때가 건무(建武)004004 건무(建武) : 후한 광무제의 첫 번째 연호로 25년부터 56년까지 치세 대부분의 기간에 사용되었다.닫기 8년이었다.

註 001
사신을 한(漢)에 보내 조공하였다 :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8년 12월조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음을 전한 것에 근거하였다. 현재 전하는 기록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중앙 조정과 교섭한 가장 이른 사례이다.
註 002
광무제(光武帝) : 후한의 초대 황제로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며 이름은 유수(劉秀)이다. 전한(前漢) 애제(哀帝) 건평(建平) 원년(B.C. 6) 경제의 막내아들이자 무제의 이복형인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이 말년에 이르러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하였고, 장안과 낙양을 영유하며 정통성을 천명한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적미군(赤眉軍)에게 살해되자(25), 세를 규합하였다. 당시 중원 각지에는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隴西)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있었고, 적미(赤眉)를 비롯한 도적떼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광무제는 이들과의 대결 끝에 건무 12년(36) 마지막 남은 군웅 공손술을 패배시킴으로써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뒤에는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줄이고 수리사업을 확충하여 민생을 안정케 하였으며, 이완된 중앙 집권 체제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57) 63세로 사망하였다.
註 003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 이 기사는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의 기술(“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을 전재한 것인데, 『자치통감』 권42 한기(漢紀)34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 8년 12월조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高句麗王遣使朝貢, 帝復其王號”). 그에 비해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이때 고구려가 처음으로 왕을 칭했다고 전한다. 『후한서』 고구려전과 『삼국지』 고구려전의 이러한 차이는 왕망이 고구려에 취한 조치에 대한 기술 방식과 연관된다. 『후한서』에서는 왕망이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삼았다”고 하였으므로, 그 기사에 대응시켜 후한 광무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復其王號]”라고 기술한 것이다. 반면 『삼국지』에서는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삼았으며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다”고 하였기에, 이때 고구려가 후한에 사신을 파견해 “처음 알현하며 왕을 칭하였다[始見稱王]”라고 기술한 것이다. 어느 기사가 보다 정확한 사실을 전하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한서』 권99중 열전69중 왕망전에도 “고구려라는 국호[名]를 하구려로 바꾸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삼국지』고구려전의 기술이 사실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즉 후한이 이때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켜준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처음으로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왕을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余昊奎, 2005, 「高句麗의 국가형성과 漢의 대외정책」, 『軍史』 54, 20~22쪽).
註 004
건무(建武) : 후한 광무제의 첫 번째 연호로 25년부터 56년까지 치세 대부분의 기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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