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을 멸망시키다 ( 37년 (음) )

20년(37)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001001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본문에서 언급된 낙랑을 낙랑군으로 여겨, 낙랑군의 멸망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일이므로 해당 기사를 과장이라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이병도, 1996, 353쪽). 반면 일정한 사실성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때 주목되는 것이 왕조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에 따르면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25)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가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니,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왕조를 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왕굉(王宏)과 양읍(楊邑) 등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에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즉 경시제 집권 말부터 광무제 집권 초기 낙랑에서는 왕조가 위세를 떨치다 곧 제압되었는데, 이 사건을 고구려 측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 해당 기사라는 것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437쪽). 하지만 이 기사는 왕조의 난이 진압된 시점(30)으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로 나올 뿐 아니라, 실제 왕조의 난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한편 이때의 낙랑을 최리의 낙랑국으로 보아 대무신왕 15년(32) 호동 전승 때의 상황에 부연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아마도 본 기사를 최종적인 낙랑국의 멸망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다만 본서 기년에 의거할 때 최리 낙랑국은 이미 5년 전 고구려에 투항하였다고 하며 사건이 일단락한 데 비해, 지금 기사에서는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하여 낙랑국과는 별개의 세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4년(37)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해당 기록은 낙랑의 멸망 결과 나라 사람[國人] 5,000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하는 등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신라 측 전거 자료에서 기인한 기사로 여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임기환, 147쪽). 신라본기 초기 기사 가운데는 주변 세력의 복속이나 포섭을 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낙랑 유민의 수용 전승 역시 그 하나일 텐데, 후대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유리이사금 14년(37)으로 기년이 설정되었고, 이것이 고구려본기에도 실려 지금처럼 남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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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본문에서 언급된 낙랑을 낙랑군으로 여겨, 낙랑군의 멸망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일이므로 해당 기사를 과장이라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이병도, 1996, 353쪽). 반면 일정한 사실성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때 주목되는 것이 왕조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에 따르면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25)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가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니,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왕조를 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왕굉(王宏)과 양읍(楊邑) 등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에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즉 경시제 집권 말부터 광무제 집권 초기 낙랑에서는 왕조가 위세를 떨치다 곧 제압되었는데, 이 사건을 고구려 측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 해당 기사라는 것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437쪽). 하지만 이 기사는 왕조의 난이 진압된 시점(30)으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로 나올 뿐 아니라, 실제 왕조의 난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한편 이때의 낙랑을 최리의 낙랑국으로 보아 대무신왕 15년(32) 호동 전승 때의 상황에 부연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아마도 본 기사를 최종적인 낙랑국의 멸망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다만 본서 기년에 의거할 때 최리 낙랑국은 이미 5년 전 고구려에 투항하였다고 하며 사건이 일단락한 데 비해, 지금 기사에서는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하여 낙랑국과는 별개의 세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4년(37)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해당 기록은 낙랑의 멸망 결과 나라 사람[國人] 5,000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하는 등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신라 측 전거 자료에서 기인한 기사로 여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임기환, 147쪽). 신라본기 초기 기사 가운데는 주변 세력의 복속이나 포섭을 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낙랑 유민의 수용 전승 역시 그 하나일 텐데, 후대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유리이사금 14년(37)으로 기년이 설정되었고, 이것이 고구려본기에도 실려 지금처럼 남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