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다 ( 44년 09월(음) )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001001 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으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를 흐르는 강이다. 낙랑군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하천이기도 하다. 살수의 ‘살(薩)’이 청백(淸白)을 뜻하는 ‘햘(Hsial)’을 표기한 것이라는 설(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353쪽)도 있다.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4년(56) 7월조에 따르면 고구려의 남쪽 경역이 살수까지 이르렀다고 한다.닫기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002002 한나라의 광무제가 …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 본 기사의 사실성을 긍정하여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으로 이완된 낙랑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하지만 왕조의 난이 진압된 지 14년이나 지난 시점일 뿐 아니라 광무제의 전국 통일(36)로부터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더구나 현재 전하는 중국 측 사서에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없어 문제가 된다. 이에 해당 기사는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을 토벌하고자 왕준을 보냈던 사건을 개서(改書)한 것으로, 낙랑군 재건과 대무신왕의 죽음을 연계하기 위하여 사망 연도에 맞춰 기년을 조정하였다고 보는 설(井上秀雄, 90쪽)도 있다. 다만 「광개토왕릉비」나 본서의 기술을 볼 때 대무신왕은 고구려 왕실에서 중요한 군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말년에 땅을 잃고 곧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식의 전승을 만들어냈을지 의문이다.
이 기사를 이해함에 눈여겨볼 기록은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20년(44)조에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군]에 이르러 내부(來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낙랑군의 영향력이 한반도 중·남부에 미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하는 『후한서』는 후한의 멸망으로부터 두 세기도 더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사실을 온전히 전해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출병까지는 아니더라도 광무제 집권 후반기에 낙랑군의 통치 체제를 복구·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동이 한국의 내부는 그 결과로 보인다(임기환, 149쪽). 이러한 후한의 조처가 위 기사와 같이 고구려 국내 전승 기록의 남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 上』, 龍漢書舍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닫기

註 001
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으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를 흐르는 강이다. 낙랑군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하천이기도 하다. 살수의 ‘살(薩)’이 청백(淸白)을 뜻하는 ‘햘(Hsial)’을 표기한 것이라는 설(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353쪽)도 있다.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4년(56) 7월조에 따르면 고구려의 남쪽 경역이 살수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註 002
한나라의 광무제가 …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 본 기사의 사실성을 긍정하여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으로 이완된 낙랑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하지만 왕조의 난이 진압된 지 14년이나 지난 시점일 뿐 아니라 광무제의 전국 통일(36)로부터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더구나 현재 전하는 중국 측 사서에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없어 문제가 된다. 이에 해당 기사는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을 토벌하고자 왕준을 보냈던 사건을 개서(改書)한 것으로, 낙랑군 재건과 대무신왕의 죽음을 연계하기 위하여 사망 연도에 맞춰 기년을 조정하였다고 보는 설(井上秀雄, 90쪽)도 있다. 다만 「광개토왕릉비」나 본서의 기술을 볼 때 대무신왕은 고구려 왕실에서 중요한 군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말년에 땅을 잃고 곧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식의 전승을 만들어냈을지 의문이다.
이 기사를 이해함에 눈여겨볼 기록은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20년(44)조에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군]에 이르러 내부(來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낙랑군의 영향력이 한반도 중·남부에 미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하는 『후한서』는 후한의 멸망으로부터 두 세기도 더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사실을 온전히 전해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출병까지는 아니더라도 광무제 집권 후반기에 낙랑군의 통치 체제를 복구·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동이 한국의 내부는 그 결과로 보인다(임기환, 149쪽). 이러한 후한의 조처가 위 기사와 같이 고구려 국내 전승 기록의 남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참고문헌〉
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 上』, 龍漢書舍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임기환, 2004,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韓國古代史硏究』 34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행정>군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