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지락의 대가인 대승이 후한에 의탁하다 ( 47년 10월(음) )

〔4년(47)〕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001001 잠지락부(蠶支落部) : 1세기 중반 원고구려 지역에 있었던 단위정치체이다.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 건무(建武) 23년(47)조에는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 인구수는 1만여 명[2천여 가]으로 되어있다. 당시 만주-한반도에 산재했던 독립 소국의 규모가 대략 2~3천여 가였다는 점에서 잠지락부는 독립 소국을 이루었고(李賢惠, 4~6쪽; 林起煥, 48쪽), 본래 명칭은 ‘잠지락’인데 후대에 ‘부(部)’자가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06~107쪽). 잠지락을 압록강 하류의 小水貊이나(金東旭, 118쪽) 최리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시켜 동옥저(김미경, 50~52쪽) 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당시는 고구려가 동옥저로 진출하기 이전이다. 이 무렵 계루부(桂婁部)가 압록강 중상류에 산재한 각 집단의 대외교섭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초기 국가체제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잠지락은 계루부의 통합에 반발하여 낙랑군에 내속한 압록강 중상류 주변의 단위정치체로 추정된다(여호규, 1996: 2014, 186~187쪽).
〈참고문헌〉
李賢惠, 1976,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 『歷史學報』 69
林起煥, 1987, 「고구려 초기의 地方統治體制」, 『慶熙史學』 14
여호규, 1996,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고구려의 국가형성」, 『역사와 현실』 21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東旭, 2005, 「『三国志』 東夷伝に見える小水貊」, 『朝鮮學報』 196
김미경, 2007,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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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가(大家)002002 대가(大家)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대가(大加)’로 나온다.닫기인 대승(戴升)003003 대승(戴升) : 고구려 잠지락(蠶支落)의 세력가이다. 1세기 중반 무렵 계루부(桂婁部)가 압록강 중상류에 산재한 각 집단의 대외교섭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고구려의 초기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는데, 대승은 이에 반발하여 낙랑군에 내속한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1996,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고구려의 국가형성」, 『역사와 현실』 21: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186~187쪽).닫기 등 1만여 가(家)004004 1만여 가(家)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만여 구(萬餘口)’로 나온다.닫기가 낙랑(樂浪)에 가서 한(漢)에 의탁하였다.005005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인 … 한(漢)에 의탁하였다 : 이 기사가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 건무(建武) 23년조에는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에 이르러 내속하였다”라고 나온다. 본서의 기사와 지명이나 인구수 등이 다른데, 이는 『후한서』 기사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인 듯하다. 다만 『삼국사기』 찬자가 『후한서』기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오류는 『삼국사기』보다 앞선 『구삼국사』나 그 이전의 역사서 편찬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임기환, 24~36쪽; 전덕재, 226쪽). 한편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23년(47)조에는 “고구려가 종인을 거느리고 낙랑에 내속하였다[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고 되어있다.
〈참고문헌〉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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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는 “대가(大加)006006 대가(大加) : 대가의 ‘가(加)’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고구려와 부여에서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신라나 가야에서 우두머리나 지배자를 뜻하던 ‘간지(干支)’, ‘한기(旱岐)’ 등과 통하는 말이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회합을 할 때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책(幘)이라는 모자를 쓴 반면, 소가(小加)는 고깔 모양의 절풍(折風)을 썼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 지배층이 크게 대가와 소가로 구분되었던 것이다(金光洙, 1982: 1983, 146~169쪽). 특히 대가들은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 등의 독자적인 관원조직을 두어 자치권을 행사하는 한편, 휘하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외전쟁이나 복속지역 지배에 참여하여 세력기반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즉, 고구려 초기의 대가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에 참여하였던 계루부 왕실이나 각 나부(那部)의 최상층 지배세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노태돈, 143~199쪽). 한편 대가는 국왕과의 관계에서 세습적 성격을 띤 위계인 상가(相加)나 고추가(古鄒加)만 수여받고 승격이 되는 관등을 사여받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金哲埈, 125~129쪽; 노태돈, 149~152쪽). 이에 반해 상가(相加)는 위계가 아니라 제가회의 의장이나 국상을 지칭하는 직책이며, 대가도 패자(沛者) 등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임기환, 115~125쪽; 琴京淑, 2004, 28~29쪽; 여호규, 207~216쪽), 최근에는 고구려의 가(加)가 고조선의 형(兄)에서 기원했다고 보거나(박대재, 79~88쪽) 중국 전국시대의 유작자(有爵者)처럼 신분적 규정에 의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작적(爵的) 존재로 보기도 한다(이준성, 131~139쪽).
〈참고문헌〉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金光洙, 1982, 「고구려 전반기의 ‘加’ 계급」, 『建大史學』 6
金光洙, 1983,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박대재, 2015, 「고조선의 정치체제」, 『동북아역사논총』 47
이준성, 2019, 「고구려의 형성과 정치체제 변동」,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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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대승 등 1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註 001
잠지락부(蠶支落部) : 1세기 중반 원고구려 지역에 있었던 단위정치체이다.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 건무(建武) 23년(47)조에는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 인구수는 1만여 명[2천여 가]으로 되어있다. 당시 만주-한반도에 산재했던 독립 소국의 규모가 대략 2~3천여 가였다는 점에서 잠지락부는 독립 소국을 이루었고(李賢惠, 4~6쪽; 林起煥, 48쪽), 본래 명칭은 ‘잠지락’인데 후대에 ‘부(部)’자가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06~107쪽). 잠지락을 압록강 하류의 小水貊이나(金東旭, 118쪽) 최리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시켜 동옥저(김미경, 50~52쪽) 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당시는 고구려가 동옥저로 진출하기 이전이다. 이 무렵 계루부(桂婁部)가 압록강 중상류에 산재한 각 집단의 대외교섭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초기 국가체제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잠지락은 계루부의 통합에 반발하여 낙랑군에 내속한 압록강 중상류 주변의 단위정치체로 추정된다(여호규, 1996: 2014, 186~187쪽).
〈참고문헌〉
李賢惠, 1976,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 『歷史學報』 69
林起煥, 1987, 「고구려 초기의 地方統治體制」, 『慶熙史學』 14
여호규, 1996,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고구려의 국가형성」, 『역사와 현실』 21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金東旭, 2005, 「『三国志』 東夷伝に見える小水貊」, 『朝鮮學報』 196
김미경, 2007,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註 002
대가(大家)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대가(大加)’로 나온다.
註 003
대승(戴升) : 고구려 잠지락(蠶支落)의 세력가이다. 1세기 중반 무렵 계루부(桂婁部)가 압록강 중상류에 산재한 각 집단의 대외교섭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고구려의 초기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는데, 대승은 이에 반발하여 낙랑군에 내속한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1996,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고구려의 국가형성」, 『역사와 현실』 21: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186~187쪽).
註 004
1만여 가(家) :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만여 구(萬餘口)’로 나온다.
註 005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인 … 한(漢)에 의탁하였다 : 이 기사가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 건무(建武) 23년조에는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에 이르러 내속하였다”라고 나온다. 본서의 기사와 지명이나 인구수 등이 다른데, 이는 『후한서』 기사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인 듯하다. 다만 『삼국사기』 찬자가 『후한서』기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오류는 『삼국사기』보다 앞선 『구삼국사』나 그 이전의 역사서 편찬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임기환, 24~36쪽; 전덕재, 226쪽). 한편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23년(47)조에는 “고구려가 종인을 거느리고 낙랑에 내속하였다[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고 되어있다.
〈참고문헌〉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註 006
대가(大加) : 대가의 ‘가(加)’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고구려와 부여에서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신라나 가야에서 우두머리나 지배자를 뜻하던 ‘간지(干支)’, ‘한기(旱岐)’ 등과 통하는 말이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따르면 회합을 할 때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책(幘)이라는 모자를 쓴 반면, 소가(小加)는 고깔 모양의 절풍(折風)을 썼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 지배층이 크게 대가와 소가로 구분되었던 것이다(金光洙, 1982: 1983, 146~169쪽). 특히 대가들은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 등의 독자적인 관원조직을 두어 자치권을 행사하는 한편, 휘하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외전쟁이나 복속지역 지배에 참여하여 세력기반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즉, 고구려 초기의 대가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에 참여하였던 계루부 왕실이나 각 나부(那部)의 최상층 지배세력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노태돈, 143~199쪽). 한편 대가는 국왕과의 관계에서 세습적 성격을 띤 위계인 상가(相加)나 고추가(古鄒加)만 수여받고 승격이 되는 관등을 사여받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金哲埈, 125~129쪽; 노태돈, 149~152쪽). 이에 반해 상가(相加)는 위계가 아니라 제가회의 의장이나 국상을 지칭하는 직책이며, 대가도 패자(沛者) 등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임기환, 115~125쪽; 琴京淑, 2004, 28~29쪽; 여호규, 207~216쪽), 최근에는 고구려의 가(加)가 고조선의 형(兄)에서 기원했다고 보거나(박대재, 79~88쪽) 중국 전국시대의 유작자(有爵者)처럼 신분적 규정에 의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작적(爵的) 존재로 보기도 한다(이준성, 131~139쪽).
〈참고문헌〉
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金光洙, 1982, 「고구려 전반기의 ‘加’ 계급」, 『建大史學』 6
金光洙, 1983,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박대재, 2015, 「고조선의 정치체제」, 『동북아역사논총』 47
이준성, 2019, 「고구려의 형성과 정치체제 변동」,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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