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옥저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다 ( 56년 07월(음) )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001001 동옥저(東沃沮)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큰 바닷가에 접하며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길어 1천리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지금의 함흥평야에서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해안지대로 비정되는데, 함흥평야 일대의 옥저는 남옥저(협의의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의 옥저는 북옥저로 불렸다(이현혜, 56~63쪽). 다만 본서에서는 동명성왕 10년(B.C. 28)에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정벌하였다고 나오는 만큼, 이 기사의 동옥저는 함흥평야 일대의 남옥저를 지칭한다고 이해된다(李丙燾, 228~229쪽).
함흥평야 일대는 본래 임둔국(臨屯國) 지역이었는데, 위만이 흥기한 다음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고조선 멸망 이후 동옥저 지역도 한의 군현에 편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임둔군에 속했다가 전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 임둔군 폐지 이후 현도군에 편입되었다는 견해(李丙燾, 161~176쪽; 기수연, 1999, 186~188쪽), 처음부터 제1현도군에 편입되었다는 견해(池內宏, 191~194쪽; 和田淸, 1955; 김미경, 2002; 윤선태, 2010; 이성제, 2011; 이종록, 2018; 이준성, 2019; 장병진, 2019) 등으로 나뉜다. 한편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B.C. 75)경 제1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방면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낙랑 동부7현 가운데 하나인 부조현(夫租縣)이 그것이다. 이 지역이 낙랑군에 예속되었던 사실은 낙랑군의 치소였던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부조예군(夫租薉君)의 무덤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리순진, 1964; 金基興, 1985). 또한 최근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B.C. 45년의「낙랑군 초원4년 현별호구부(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에도 나오는데, 당시 호(戶)는 1,150, 인구[口]는 5,111명이었다(尹龍九, 291쪽). 한나라는 함흥평야를 비롯한 원산만 일대가 넓고 멀다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리다가, 후한 초인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변군(邊郡)을 크게 축소할 때 동부도위와 부조현 등 7현도 폐지하고 후국(侯國)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한나라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각 세력의 각축전이 차열해졌는데, 이틈을 타서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벌하였다. 그러므로 기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고구려가 태조왕대에 국가체제를 확립한 다음, 동해안 방면에 배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옥저를 정벌하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余昊奎, 25~34쪽). 최근 고구려가 낙랑군과 깊이 연계된 토착세력인 낙랑국을 정벌하면서 동옥저로 진출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이종록, 56~61쪽).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和田淸, 1955, 『東亜史硏究』, 東洋文庫
리순진, 1964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4-4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基興, 1985, 「夫租薉君에 대한 일고찰」, 『韓國史論』 12, 서울대 국사학과
기수연, 1999, 「현도군과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연구」, 『고구려연구』 29
김미경, 2002, 「제1현도군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실학사상연구』 24
余昊奎, 2005, 「高句麗의 국가형성과 漢의 대외정책」, 『군사』54
尹龍九, 2009, 「평양출토 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 연구」, 『목간과문자』 3
윤선태, 2010, 「한사군의 역사지리적 변천과 ‘낙랑군 초원 4년 현별 호구부’」,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이현혜, 2010, 「옥저의 기원과 문화 성격에 대한 고찰」, 『한국상고사학보』 70
이성제, 2011, 「현도군의 개편과 고구려」, 『한국고대사연구』 64
이종록, 2016, 「고구려의 동옥저 정벌과 낙랑군」, 『선사와 고대』 49
이종록, 2018, 「高句麗와 玄菟郡의 관계와 幘溝漊 설치 배경 검토」, 『선사와고대』 55
이준성, 2019, 「고구려의 형성과 정치체제 변동」,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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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002002 성읍(城邑) : 상기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태조왕 4년(56)에 동옥저를 정벌한 다음 성읍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한 다음 기존의 읍락사회를 ‘성읍(城邑)’으로 재편하였다든가(琴京淑, 1995: 2004, 137~141쪽 및 김미경, 53~60쪽), 성 중심의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李鍾旭, 127~128쪽; 장병진, 96~104쪽). 그렇지만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3세기 전반에도 동옥저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므로 태조왕대에 동옥저를 성읍으로 삼거나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로 세력집단을 온존시킨 채 조세를 수취하며 간접 지배했을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27~132쪽; 임기환, 2004, 69~70쪽; 김현숙, 132~137쪽). 한편 초기기사에서 확인되는 ‘성읍으로 삼았다’를 구체적인 지배체제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 후대의 인식이 소급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이종록, 200~201쪽)
〈참고문헌〉
李鍾旭,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
琴京淑, 1995, 「고구려 前期의 정치제도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김미경, 2007,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이종록, 2018, 「北沃沮의 기원과 실체에 관한 高句麗의 두만강 유역 進出」, 『한국고대사연구』 91
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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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003003 창해(滄海) : 본서에는 동명성왕 10년(B.C. 28)에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 태조대왕 4년(56)에 함흥평야 일대의 동옥저[남옥저]를 정벌하였다고 나온다. 이로 보아 창해는 지금의 함경도 앞바다 곧 동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B.C. 128)에 예군남려가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군에 내속하자, 한나라가 요동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창해군(蒼海郡; 滄海郡)’을 설치하려다가 2년 만에 중단한 사실이 있는데(『사기』 권30 평준서8; 『한서』 권6 무제기6 원삭(元朔) 원년조;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예전), 이 기사의 ‘창해’라는 지명은 ‘창해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닫기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004004 살수(薩水) : 지금의 청천강을 지칭한다.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7년(44) 9월조 참조.닫기에 이르렀다.

註 001
동옥저(東沃沮)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큰 바닷가에 접하며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길어 1천리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지금의 함흥평야에서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해안지대로 비정되는데, 함흥평야 일대의 옥저는 남옥저(협의의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의 옥저는 북옥저로 불렸다(이현혜, 56~63쪽). 다만 본서에서는 동명성왕 10년(B.C. 28)에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를 정벌하였다고 나오는 만큼, 이 기사의 동옥저는 함흥평야 일대의 남옥저를 지칭한다고 이해된다(李丙燾, 228~229쪽).
함흥평야 일대는 본래 임둔국(臨屯國) 지역이었는데, 위만이 흥기한 다음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고조선 멸망 이후 동옥저 지역도 한의 군현에 편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임둔군에 속했다가 전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 임둔군 폐지 이후 현도군에 편입되었다는 견해(李丙燾, 161~176쪽; 기수연, 1999, 186~188쪽), 처음부터 제1현도군에 편입되었다는 견해(池內宏, 191~194쪽; 和田淸, 1955; 김미경, 2002; 윤선태, 2010; 이성제, 2011; 이종록, 2018; 이준성, 2019; 장병진, 2019) 등으로 나뉜다. 한편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B.C. 75)경 제1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방면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낙랑 동부7현 가운데 하나인 부조현(夫租縣)이 그것이다. 이 지역이 낙랑군에 예속되었던 사실은 낙랑군의 치소였던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부조예군(夫租薉君)의 무덤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리순진, 1964; 金基興, 1985). 또한 최근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B.C. 45년의「낙랑군 초원4년 현별호구부(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에도 나오는데, 당시 호(戶)는 1,150, 인구[口]는 5,111명이었다(尹龍九, 291쪽). 한나라는 함흥평야를 비롯한 원산만 일대가 넓고 멀다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리다가, 후한 초인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변군(邊郡)을 크게 축소할 때 동부도위와 부조현 등 7현도 폐지하고 후국(侯國)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한나라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각 세력의 각축전이 차열해졌는데, 이틈을 타서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벌하였다. 그러므로 기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고구려가 태조왕대에 국가체제를 확립한 다음, 동해안 방면에 배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옥저를 정벌하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余昊奎, 25~34쪽). 최근 고구려가 낙랑군과 깊이 연계된 토착세력인 낙랑국을 정벌하면서 동옥저로 진출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이종록, 56~61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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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 2018, 「高句麗와 玄菟郡의 관계와 幘溝漊 설치 배경 검토」, 『선사와고대』 55
이준성, 2019, 「고구려의 형성과 정치체제 변동」,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註 002
성읍(城邑) : 상기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태조왕 4년(56)에 동옥저를 정벌한 다음 성읍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한 다음 기존의 읍락사회를 ‘성읍(城邑)’으로 재편하였다든가(琴京淑, 1995: 2004, 137~141쪽 및 김미경, 53~60쪽), 성 중심의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李鍾旭, 127~128쪽; 장병진, 96~104쪽). 그렇지만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3세기 전반에도 동옥저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므로 태조왕대에 동옥저를 성읍으로 삼거나 지방관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로 세력집단을 온존시킨 채 조세를 수취하며 간접 지배했을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27~132쪽; 임기환, 2004, 69~70쪽; 김현숙, 132~137쪽). 한편 초기기사에서 확인되는 ‘성읍으로 삼았다’를 구체적인 지배체제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 후대의 인식이 소급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이종록, 200~201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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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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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2007, 「高句麗 前期의 對外關係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이종록, 2018, 「北沃沮의 기원과 실체에 관한 高句麗의 두만강 유역 進出」, 『한국고대사연구』 91
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註 003
창해(滄海) : 본서에는 동명성왕 10년(B.C. 28)에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 태조대왕 4년(56)에 함흥평야 일대의 동옥저[남옥저]를 정벌하였다고 나온다. 이로 보아 창해는 지금의 함경도 앞바다 곧 동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B.C. 128)에 예군남려가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군에 내속하자, 한나라가 요동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창해군(蒼海郡; 滄海郡)’을 설치하려다가 2년 만에 중단한 사실이 있는데(『사기』 권30 평준서8; 『한서』 권6 무제기6 원삭(元朔) 원년조;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예전), 이 기사의 ‘창해’라는 지명은 ‘창해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註 004
살수(薩水) : 지금의 청천강을 지칭한다.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7년(44) 9월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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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