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이 왕위에 오르다 ( 227년 05월(음) )

동천왕(東川王)001001 동천왕(東川王) : 고구려의 11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227~248년이다. 동양왕(東壤王)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왕호가 동천왕보다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던 본래의 왕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 이름은 교체(郊彘)이다. 산상왕은 왕비인 우씨로부터 자식이 없어 관나부 주통촌 출신 소후에게 아들을 얻었는데, 하늘에 제사지낼 돼지[郊豕]의 일로 소후와 만나게 되었다. 이에 동천왕의 어릴 적 이름을 교체라 한 것이다.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의 성품이 관대하며 인자하다고 하였는데, 후일 관구검의 침공으로 위난을 겪을 때, 동천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활동이나 동천왕의 장례 시 순사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 등이 그의 이런 품성과 관련된 듯하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왕의 모습이나 성격에 관한 기록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동천왕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당시 후한이 분열되어 삼국으로 정립되었던 국제정세를 이용하는 국제적 안목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점은 그 이전 대외관계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실례로 동천왕은 당시 요동의 공손씨 정권과 대립하면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오(吳), 위(魏)와 교섭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서북부로의 진출을 위해 요동군과 낙랑군을 잇는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나 위(魏) 유주자사 관구검의 공격으로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가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대외팽창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동천왕 시기는 고구려 대외관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닫기
동양(東襄)002002 동양(東襄) : 다음 왕들의 분주 왕호가 중양(中壤), 서양(西壤), 호양(好壤)임을 고려하면 여기의 ‘襄’은 ‘壤’의 오식으로 추정된다.닫기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우위거(憂位居)003003 우위거(憂位居)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동천왕 때의 고구려왕의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하였다. 위궁과 ‘우위거(憂位居)’의 글자가 유사한 점에 입각하여 이표기(異表記)로 보는 견해도 있다(임기환, 2016, 「고구려 王系의 성립과정과 시기」, 『한국고대사연구』 83). 관련하여 『삼국지』 고구려전에 발기의 아들로서 동천왕과 사촌인 고추가 ‘박위거(駮位居)’라는 인명이 보여 참고된다.닫기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교체(郊彘)로,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 〔왕궁에〕 들어와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는데, 역사에 그 족성(族姓)이 전해지지 않는다. 선왕 17년(213)에 태자로 세워졌고 이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성을 시험해보고자 왕이 나가 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으니 불쌍하구나.”라고 하였다. 또 시종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으나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註 001
동천왕(東川王) : 고구려의 11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227~248년이다. 동양왕(東壤王)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왕호가 동천왕보다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던 본래의 왕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 이름은 교체(郊彘)이다. 산상왕은 왕비인 우씨로부터 자식이 없어 관나부 주통촌 출신 소후에게 아들을 얻었는데, 하늘에 제사지낼 돼지[郊豕]의 일로 소후와 만나게 되었다. 이에 동천왕의 어릴 적 이름을 교체라 한 것이다.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의 성품이 관대하며 인자하다고 하였는데, 후일 관구검의 침공으로 위난을 겪을 때, 동천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활동이나 동천왕의 장례 시 순사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 등이 그의 이런 품성과 관련된 듯하다. 본서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왕의 모습이나 성격에 관한 기록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동천왕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당시 후한이 분열되어 삼국으로 정립되었던 국제정세를 이용하는 국제적 안목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점은 그 이전 대외관계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실례로 동천왕은 당시 요동의 공손씨 정권과 대립하면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오(吳), 위(魏)와 교섭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서북부로의 진출을 위해 요동군과 낙랑군을 잇는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나 위(魏) 유주자사 관구검의 공격으로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가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대외팽창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동천왕 시기는 고구려 대외관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註 002
동양(東襄) : 다음 왕들의 분주 왕호가 중양(中壤), 서양(西壤), 호양(好壤)임을 고려하면 여기의 ‘襄’은 ‘壤’의 오식으로 추정된다.
註 003
우위거(憂位居)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동이 고구려전에서 동천왕 때의 고구려왕의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하였다. 위궁과 ‘우위거(憂位居)’의 글자가 유사한 점에 입각하여 이표기(異表記)로 보는 견해도 있다(임기환, 2016, 「고구려 王系의 성립과정과 시기」, 『한국고대사연구』 83). 관련하여 『삼국지』 고구려전에 발기의 아들로서 동천왕과 사촌인 고추가 ‘박위거(駮位居)’라는 인명이 보여 참고된다.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