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다 ( 246년 08월(음) )

20년(246) 가을 8월에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001001 관구검(毌丘儉) : 중국 삼국시대 위의 무장. 233~236년 사이에 유주자사(幽州刺史)에 임명되어 요동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였다. 고구려 정벌 후 예주자사(預州刺史)가 되었으며, 야심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毌丘儉傳) 참조.닫기을 보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002002 현도(玄菟) : 이때의 현도는 이른바 제3현도군으로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에 군의 치소가 있었다. 현도군 일반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59년(111)조 참조.닫기로부터 침략해왔다.003003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 침략해왔다 :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침입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북사(北史)』 권94 열전82 사이 상 고구려 등에서는 정시(正始) 5년(244)으로, 『삼국지』 권4 위서4 삼소제기 제왕방(齊王芳) 및 『자치통감』 권75 위기7(魏紀) 소릉려공(邵陵厲公)에서는 정시 7년(246)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정시 중에 1차 정벌을 단행하고, 정시 6년(245)에 2차로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에서 동천왕 20년(246)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정시 7년설을 취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본기 편찬자들이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하고 있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906년 발견된 「위관구검기공비(魏毌丘儉紀功碑)」에는 관구검이 정시 5년(244)에 침입하여 6년(245)에 돌아간 것으로 판독되고 있다. 이로 보아 관구검의 침입은 정시 5년에 시작하여 6년 5월에 종료되었고, 이듬해인 6년에 관구검이 왕기(王頎)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한 것으로 이해함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池內宏, 254~257쪽). 또한 「위관구검기공비」의 재검토를 통해 1차 침공은 정시 5년(244)~6년(245), 2차 침공은 정시 6년(245) 8월~7년(246) 2월에 종결되었으며, 『위서』 제왕방기나 『자치통감』, 본서 등은 기년의 오류라기보다는 전쟁이 완전 종결된 시점을 기준으로 기입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승호, 39~40쪽).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닫기
왕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004004 비류수(沸流水) : 압록강 지류인 훈 강[渾江]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푸얼강[富爾江]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태돈, 2012, 「고구려 초기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 68, 29쪽). 본문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 유역에서 벌어진 1차 전투에서 크게 무찔렀다.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 참조.닫기 싸워 패배시키니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005005 양맥(梁貊)의 골짜기 : 고구려와 관구검의 군대가 비류수 전투에 이어 2차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毌丘儉傳)에는 “〔고〕구려왕 궁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상에 진군하여 양구에서 크게 싸웠는데 궁이 거듭 패배하여 도망하였다”라고 하여 양국의 군대가 맞붙은 곳을 양구(梁口)라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의 이 문장은 양국이 마치 비류수 유역의 양구(梁口)에서 처음 전투하였고, 관구검이 고구려 군대를 대파한 것처럼 기술하였다. 그렇지만 본문의 기사에서 보듯이 양국은 훈 강으로 비정되는 비류수 가에서 1차전을 벌여 고구려가 승리하였고, 이에 관구검의 군대는 양맥의 골짜기로 퇴각하였다. 양맥(梁貊)은 비류수 유역이 아니라 그 서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실제 양맥은 양수(梁水)에 거주하는 맥(貊)이라는 뜻인데, 양수는 훈 강의 서쪽에 위치한 타이쯔허[太子河] 강을 지칭한다. 양맥 골짜기는 양맥이 거주하던 타이쯔허 강 유역에 위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지』 관구검전의 양구(梁口)는 양맥 골짜기의 입구라는 뜻으로 비류수로 비정되는 훈 강 유역에서 타이쯔허 강으로 진입하던 입구로 타이쯔허 강 상류의 핑딩산[平頂山]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2007, 「고구려 초기 對中戰爭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논총』 15, 43~48쪽: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496~498쪽). 양맥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3년(14) 8월조 참조.닫기에서 싸워 또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魏)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魏)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고, 철기(鐵騎)006006 철기(鐡騎) : 철제 갑옷을 입은 기병을 뜻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철제 갑옷을 착용한 병사와 말 그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장의 철기가 이러한 중장기병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이 자료에 의거하여 3세기 중반부터 중장기병이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전주농, 1959; 박진욱. 1970; 이인철, 1996; 이홍두, 2011)가 있지만, 고구려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자료로 볼 때 중장기병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4세기 초반 이상으로 시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더욱 마구 등의 계통성을 보면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북방유목국가와의 교류 과정에서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정동민, 20~22쪽). 중국 문헌에서 철기(鐵騎)라는 용어는 『후한서』 권73 열전64 공손찬(公孫瓚)에 처음 등장하는데, 중국에서 2세기 후반에 중장기병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철기가 중장기병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분명하다. 하지만 당대 이후에는 중장기병이 쇠퇴하면서 철기가 정예기병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철기는 고구려의 중장기병 관련 유물의 출토상황으로 보아 정예기병이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타당할 듯하다.
〈참고문헌〉
전주농, 1959,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 (2)」, 『문화유산』 1959-1
박진욱, 1970, 「3국 무기의 특성과 그것을 통하여 본 병종 및 전투형식」, 『고고민속론문집』 2
이인철, 1996, 「4~6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軍史』 33
이홍두, 2011, 「고구려 전기의 기마전」, 『역사와 실학』 44
정동민, 2017, 「고구려 기승용 마구의 출토양상과 계통」, 『역사문화연구』 64
닫기
5,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方陣)007007 방진(方陣) : 군대의 진열을 사각형으로 배치하는 진법이다. 방진은 본서 권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6월조 고구려와 수 전쟁에서 수의 군대가 사용한 진법에서도 확인된다.닫기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궤멸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008008 압록원(鴨淥原) : 압록강 일대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닫기으로 달아났다.

註 001
관구검(毌丘儉) : 중국 삼국시대 위의 무장. 233~236년 사이에 유주자사(幽州刺史)에 임명되어 요동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였다. 고구려 정벌 후 예주자사(預州刺史)가 되었으며, 야심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毌丘儉傳) 참조.
註 002
현도(玄菟) : 이때의 현도는 이른바 제3현도군으로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에 군의 치소가 있었다. 현도군 일반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59년(111)조 참조.
註 003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 침략해왔다 :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침입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 『북사(北史)』 권94 열전82 사이 상 고구려 등에서는 정시(正始) 5년(244)으로, 『삼국지』 권4 위서4 삼소제기 제왕방(齊王芳) 및 『자치통감』 권75 위기7(魏紀) 소릉려공(邵陵厲公)에서는 정시 7년(246)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정시 중에 1차 정벌을 단행하고, 정시 6년(245)에 2차로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에서 동천왕 20년(246)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정시 7년설을 취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본기 편찬자들이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하고 있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906년 발견된 「위관구검기공비(魏毌丘儉紀功碑)」에는 관구검이 정시 5년(244)에 침입하여 6년(245)에 돌아간 것으로 판독되고 있다. 이로 보아 관구검의 침입은 정시 5년에 시작하여 6년 5월에 종료되었고, 이듬해인 6년에 관구검이 왕기(王頎)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한 것으로 이해함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池內宏, 254~257쪽). 또한 「위관구검기공비」의 재검토를 통해 1차 침공은 정시 5년(244)~6년(245), 2차 침공은 정시 6년(245) 8월~7년(246) 2월에 종결되었으며, 『위서』 제왕방기나 『자치통감』, 본서 등은 기년의 오류라기보다는 전쟁이 완전 종결된 시점을 기준으로 기입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승호, 39~40쪽).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註 004
비류수(沸流水) : 압록강 지류인 훈 강[渾江]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푸얼강[富爾江]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태돈, 2012, 「고구려 초기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연구』 68, 29쪽). 본문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 유역에서 벌어진 1차 전투에서 크게 무찔렀다.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 참조.
註 005
양맥(梁貊)의 골짜기 : 고구려와 관구검의 군대가 비류수 전투에 이어 2차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毌丘儉傳)에는 “〔고〕구려왕 궁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상에 진군하여 양구에서 크게 싸웠는데 궁이 거듭 패배하여 도망하였다”라고 하여 양국의 군대가 맞붙은 곳을 양구(梁口)라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의 이 문장은 양국이 마치 비류수 유역의 양구(梁口)에서 처음 전투하였고, 관구검이 고구려 군대를 대파한 것처럼 기술하였다. 그렇지만 본문의 기사에서 보듯이 양국은 훈 강으로 비정되는 비류수 가에서 1차전을 벌여 고구려가 승리하였고, 이에 관구검의 군대는 양맥의 골짜기로 퇴각하였다. 양맥(梁貊)은 비류수 유역이 아니라 그 서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실제 양맥은 양수(梁水)에 거주하는 맥(貊)이라는 뜻인데, 양수는 훈 강의 서쪽에 위치한 타이쯔허[太子河] 강을 지칭한다. 양맥 골짜기는 양맥이 거주하던 타이쯔허 강 유역에 위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지』 관구검전의 양구(梁口)는 양맥 골짜기의 입구라는 뜻으로 비류수로 비정되는 훈 강 유역에서 타이쯔허 강으로 진입하던 입구로 타이쯔허 강 상류의 핑딩산[平頂山]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여호규, 2007, 「고구려 초기 對中戰爭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논총』 15, 43~48쪽: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496~498쪽). 양맥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3년(14) 8월조 참조.
註 006
철기(鐡騎) : 철제 갑옷을 입은 기병을 뜻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철제 갑옷을 착용한 병사와 말 그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장의 철기가 이러한 중장기병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이 자료에 의거하여 3세기 중반부터 중장기병이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전주농, 1959; 박진욱. 1970; 이인철, 1996; 이홍두, 2011)가 있지만, 고구려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자료로 볼 때 중장기병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4세기 초반 이상으로 시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더욱 마구 등의 계통성을 보면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북방유목국가와의 교류 과정에서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정동민, 20~22쪽). 중국 문헌에서 철기(鐵騎)라는 용어는 『후한서』 권73 열전64 공손찬(公孫瓚)에 처음 등장하는데, 중국에서 2세기 후반에 중장기병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철기가 중장기병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분명하다. 하지만 당대 이후에는 중장기병이 쇠퇴하면서 철기가 정예기병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철기는 고구려의 중장기병 관련 유물의 출토상황으로 보아 정예기병이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타당할 듯하다.
〈참고문헌〉
전주농, 1959,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 (2)」, 『문화유산』 1959-1
박진욱, 1970, 「3국 무기의 특성과 그것을 통하여 본 병종 및 전투형식」, 『고고민속론문집』 2
이인철, 1996, 「4~6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軍史』 33
이홍두, 2011, 「고구려 전기의 기마전」, 『역사와 실학』 44
정동민, 2017, 「고구려 기승용 마구의 출토양상과 계통」, 『역사문화연구』 64
註 007
방진(方陣) : 군대의 진열을 사각형으로 배치하는 진법이다. 방진은 본서 권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3년(612) 6월조 고구려와 수 전쟁에서 수의 군대가 사용한 진법에서도 확인된다.
註 008
압록원(鴨淥原) : 압록강 일대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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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