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우와 유유가 동천왕을 지키다 ( 246년 10월(음) )

〔20년(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王頎)001001 왕기(王頎) : 중국 삼국시대 위의 현도태수(玄菟太守)로서 관구검을 수행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왕기가 옥저 방면으로 동천왕을 추격한 것은 정시(正始) 6년(245)이었다( 『삼국지』 권28 위서 28 관구검전). 『삼국지』에 인용된 『세어(世語)』에는 그는 동래(東萊)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후(263년) 등애(鄧艾)의 부장으로 촉(蜀) 정벌 원정에 참여하였다.닫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002002 남옥저(南沃沮) :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지역으로 비정된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에 보이는 동옥저(東沃沮)와 같은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는 이 지역이 남쪽 방향이므로 ‘남옥저’로 이름한 듯하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가 왕기의 추격을 받고 옥저에서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궁(宮: 동천왕)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하고 남옥저(南沃沮)로부터 8백여 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의 매구(買溝)를 남옥저의 일부로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이병도, 204쪽), 매구(買溝)와 치구루(置溝婁)를 같은 곳으로 보고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池內宏, 264~266쪽). 이상의 기사를 종합하면 동천왕은 함흥 방면인 남옥저로 피신했다가 다시 두만강 하류 일대의 북옥저로 피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각 지명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선 매구(買溝)는 매구루(買溝婁)에서 ‘루(婁)’자가 탈락된 이름인데, 고구려에서 구루(溝婁)는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치(置)’와 ‘책(柵)’은 음운상 서로 통하기 때문에, 치구루(置溝婁)는 곧 책성(柵城)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46년(98) 3월조 참조. 또 매구루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九婁)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盧泰敦, 1989), 광개토왕릉비의 수묘인연호조에 보이는 매구여(買句余)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514쪽)가 있다. 치구루와 매구루를 같은 곳으로 책성(柵城)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치구루는 책성, 매구루(味九婁)는 치구루와 별개의 지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盧泰敦, 1989). 그리고 매구(買溝)와 관련해서는 본서 대무신왕 13년(30) 7월조에 매구곡인(買溝谷人) 상수(尙須) 등이 내투한 기사가 있다. 매구곡에 대해서는 본서 대무신왕 13년(30) 7월조 주석을 참조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泰敦, 1989, 「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3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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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달아나 죽령(竹嶺)003003 죽령(竹嶺) : 여기서의 죽령은 현재의 함경남도 황초령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265쪽). 당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 동옥저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독로강을 따라 낭림산맥을 넘어 황초령에서 함흥 일대로 이어지는 교통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죽령은 황초령이 타당하다.닫기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004004 동부(東部) : 고구려 방위명 5부의 하나이다. 본문의 하부(下部)에 상대되는 상부(上部)의 예로는 본서 권45 열전5 온달전에 ‘상부 고씨(上部高氏)’가 있다. 금석문 자료로는 「충주고구려비」의 전부(前部), 하부(下部), 「농오리 산성석각」의 전부(前部),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의 상부(上部), 「평양성각자성석」 중 ‘한성하후부(漢城下後部)’의 사례가 확인된다. 이로 보아 동·서·남·북·중 이외에 ‘상·하·전·후·중’이라는 방위명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주서(周書)』 권49 열전41 이역 상 백제전『북사(北史)』 권94 열전82 사이상 백제전에 백제 도성에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 가 있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원(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에서 인용한 『고려기』에는 “북부=후부, 동부=상부·좌부(左部), 남부=전부, 서부=우부(右部)”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동·서·남·북·중’이란 방위명부와 ‘상·하·전·후·중’이란 방위명부가 일대일로 대응되고 있음을 전하는 자료이다. 방위부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4월조 참조.
방위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구당서』 이현의 주석 또는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서 인용한 『고려기』에 나타나는 대로 5개 노부(奴部: 那部)와 5개 방위부를 등치시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나부와 방위부를 구분하여 방위부는 수도 국내성의 지역구분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방위부를 수도 국내성의 지역구분이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지역 범위 비정에는 차이가 있는데, 국내성 내부에 5방위부가 있다는 견해(李鍾旭, 1982;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강진원, 216~218쪽), 국내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5방위부가 구분되었다는 견해(정호섭, 2015), 초기에는 국내지역 전체에 있다가 후에 국내성 내부의 구역 구분으로 기능하였다는 견해(임기환, 2015) 등이 있다. 그리고 방위부를 수도의 지역구분으로 보는 견해 중에는 초기 방위부는 계루부 세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본문의 동천왕대에 활약한 밀우나 유옥구, 유유의 예에서 보듯이 국왕에 충성하는 신료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보았다(임기환, 2004), 그러다 점차 집권체제가 갖추어져 가면서 나부세력들이 수도로 이주하여 방위부로 편제되었다고 보았다(李鍾旭, 1999;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참고문헌〉
李鍾旭,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
李鍾旭, 1999, 『한국의 초기국가』, 아르케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임기환, 2015, 「고구려 國內都城의 형성과 공간구성-문헌 검토를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9
정호섭, 2015, 「고구려사의 전개와 고분의 변천」, 『한국사학보』 56
강진원, 2018, 「고구려 국내도읍기 王城의 추이와 집권력 강화」, 『한국문화』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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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밀우(密友)005005 밀우(密友)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닫기만이 홀로 옆을 지키고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死士]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006006 왕이 샛길로 달아나 : 본서 권45 열전5 밀우·유유전은 이 기사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데, 이 부분에서 “왕이 간신히 탈출하여 갈 수 있었다[王僅得脫而去]”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닫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하부(下部)007007 하부(下部) : 고구려 방위명 5부의 하나이다. 본문의 같은 기사에서 ‘동부(東部)’가 등장한다. 미천왕대까지의 기사에서는 ‘동·서·남·북’이란 방위명부만 나타나고 있는데, 유독 이 기사에서만 ‘동부’와 ‘하부’라는 부명이 같이 사용되고 있음은 주목할 점이다. 다만 동부와 하부가 혼재된 이유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닫기의 유옥구(劉屋句)008008 유옥구(劉屋句)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닫기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진 곳에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왕이 샛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동부 사람 유유(紐由)009009 유유(紐由)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유유(紐由)의 경우에는 밀우나 유옥구와는 달리 ‘동부인(東部人)’이라고 표현하였는데, 혹 유유가 밀우나 유옥구와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닫기가 나서서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대접하면서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힘껏 공격하여 반드시 승리를 거두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寡君]이 큰 나라에 죄를 얻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010010 사구(司寇) : 사구는 중국 주(周)대에 형옥(刑獄)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 중 “司寇正刑明辟以聽獄訟.”라는 기사가 참조된다.닫기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부하들의 음식 거리나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魏)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011011 낙랑(樂浪) : 현재의 평양에 있던 중국의 군현.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예전(濊傳)에 “정시 6년(245),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단단대〕령의 예가 고구려에게 복속하자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니 불내후(不耐侯) 등이 읍락을 가지고 항복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하여 관구검(毌丘儉)이 왕기의 추격군과 별도로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을 남옥저 방면으로 보내 불내(不耐) 등을 복속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池內宏, 270쪽). 즉 유주자사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은 자신이 통솔하던 변군인 낙랑, 대방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위 기사는 낙랑군의 군대가 동예에서 동옥저로 진출하여 동천왕을 압박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2차 침공에서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은 옥저와 동예 방면으로, 왕기는 북옥저 방면으로 진공하여 고구려 세력권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전략으로 파악한다(이승호, 36~38쪽).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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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第一)로 삼았다. 밀우에게 거곡(巨谷)012012 거곡(巨谷)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거곡과 청목곡이 식읍의 단위라는 점에서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곡에 대해서는 본서 고구려본기5 고국천왕 13년(191)조 서압록곡 주석 참조.닫기과 청목곡(靑木谷)013013 청목곡(靑木谷)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거곡과 청목곡이 식읍의 단위라는 점에서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곡에 대해서는 본서 고구려본기5 고국천왕 13년(191) 4월조 참조닫기을 주고, 유옥구에게 압록두눌하원(鴨淥杜訥河原)014014 압록두눌하원(鴨淥杜訥河原) :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전(紐由傳)에는 두눌(杜訥)의 ‘杜’를 ‘豆’라고 하였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고구려본기 중천왕 12년(259)조에는 왕이 두눌 골짜기[杜訥之谷]에서 사냥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두눌곡과 같은 곳일 것이다. 두눌하(杜訥河)는 압록강의 지류일 듯한데, 압록두눌하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두눌하는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두눌하원이 식읍으로 주어진 단위라는 점에서 여기의 원(原)은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원(原)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조 주석 참조.닫기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015015 구사자(九使者) : 고구려의 관등 이름이다. 대사자(大使者)의 오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구사자(九使者)는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 및 권40 잡지 제9 직관하 고구려관직조에 나온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자료에 의한 것으로, 현재는 전하지 않는 ‘본국고기(本國古記)’가 그 출전이다. 구사자(九使者)가 대사자(大使者)의 오기라면 본서 편찬 이전의 자료에 그러한 오기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다른 자료에 전혀 보이지 않는 대사자보다 높은 관등일 수도 있다.닫기로 삼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016016 대사자(大使者) : 고구려 관등의 하나이다. 대사자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10월조 참조닫기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 위(魏)의 장수가 숙신(肅愼)017017 숙신(肅愼)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10월조 및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11년(280) 10월조 참조.닫기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丸都山)018018 환도산(丸都山) :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산성자산성이 자리 잡은 산이 환도산일 것이다. 1906년 도로공사 중에 「위관구검기공비(魏丘儉紀功碑)」가 발견된 샤오반차링[小板岔嶺]이 이 주변에 위치한다.닫기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019019 불내성(不耐城) : 불내(不耐)는 중국 한대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현재의 강원도 안변(安邊)으로 비정된다.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환도산과 불내성이 인접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란 문장을 본서 편찬자가 잘못 이해하여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라고 기술한 때문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72~473쪽).닫기을 새기고020020 위(魏)의 장수가 …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 관구검(毌丘儉)이 세운 기공비의 하나가 1906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의 샤오반차링[小板岔嶺]에서 발견되었다. 비면의 아래와 왼쪽 부분이 떨어져 나가, 7행만 남아있어 전체 문장은 알 수 없다. 남아있는 부분의 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보고마다 제각각이지만, 최대기준점에서 측정된 결과는 세로 39㎝, 가로 30㎝이다. 글씨는 예서체로 쓰여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遣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판독문은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450쪽 참조). 최근에는 이승호가 실물사진자료와 탁본에 의거하여 다음 판독문을 제시한 바 있다.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遺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魏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行裨將軍領玄▨…▨裨將軍”(이승호, 20쪽).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란 문장에 의거하여 이때 관구검은 환도산과 불내성에 따로 기공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202~203쪽).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Ⅰ』, 駕洛國事蹟開發硏究院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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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갔다.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021021 득래(得來)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의하면 그는 패자(沛者) 관등에 있었으며, 동천왕의 중국 왕조 침공을 반대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굶어죽었다. 이에 후일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를 점령하고 득래의 무덤과 그의 처자를 보호했다고 한다.닫기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이 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고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022022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 본서 고구려본기의 득래 관련 기사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을 전거로 한 것이다.닫기
『괄지지(括地志)』023023 『괄지지(括地志)』 : 당 태종(太宗)의 아들인 복왕(濮王) 태(泰)가 저작랑(著作郞) 소덕언(簫德言), 비서랑(秘書郞) 고윤(顧胤) 등과 함께 지은 거질의 지리 관계의 책이다. 본래 전체 550권, 서략(序略) 5권이었다. 정관(貞觀) 12년(638)에 편찬을 시작하여 5년 만인 정관 16년(642)에 완성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與地志)』라는 앞선 지리지를 계승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 체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괄지지』는 당 현종(玄宗) 때 장수절(張守節)이 『사기정의(史記正義)』를 저술할 때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지명을 비정하는데 요긴하게 활용했으며, 여러 당송대 저작물에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남송(南宋)대에 이르러 그 원전은 망실되어 버리고 그 잔편(殘篇)들만이 후대 여러 서적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해졌다. 청대(淸代)인 1797년에 손성연(孫星衍)이 『괄지지』 일문(逸文)들을 정리하여 집본(輯本) 8권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최초의 『괄지지』 집본이었다.닫기에는 “불내성이 곧 국내성024024 국내성(國內城) : 현재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현성에 비정된다. 중국에서는 이를 국내성이라고 이름한다. 국내성지는 퉁거우하[通溝河]가 압록강(鴨綠江)으로 흘러드는 지안분지[集安盆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석축으로서 성벽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평면은 동서 길이가 남북 길이보다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며 1984년 조사에서는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 총 둘레 2,686m로 보고되었는데, 2000~2003년 조사에서는 서벽 702m, 북벽 730m로 보고하고 있다. 석축은 보통 3~4미터, 동쪽 벽은 2~3미터 가량 높이로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각기 2개, 북문은 4개, 남문은 2개 이상이었다고 파악된다. 내부는 도로망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며, 중앙부에 왕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조사로는 2000~2003년에 국내성 일부 구역에 발굴조사가 시행되고, 그 발굴조사 보고서가 2004년 출간되었다. 국내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조 참조.
〈참고문헌〉
集安县文物保管所, 1984, 「集安高句丽国內城址的调査与试掘」, 『文物』 1984~1, 文物出版社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馆 编著, 2004, 『国內城』, 文物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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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성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즉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가까이 접하였을 것이다. 『양서(梁書)』025025 『양서(梁書)』 : 중국의 당 요사렴(姚思廉)이 찬수한 중국 양(梁)의 역사책이다. 본기 6권, 열전 50권이며 지(志)와 표(表)가 없다. 앞서 진대(陳代)에 요사렴의 아버지 요찰(姚察)이 『양서』를 편찬하였는데 망실(亡失)되었다. 본문에서 인용한 내용은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에 나온다. 그러나 『양서』 이 부분의 내용은 본문에서 인용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고구려본기 인용 기사의 내용은 위나라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 고구려전에는 두 사건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양서』 고구려전의 문장과 상관없이 두 사건이 인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닫기에는 “사마의(司馬懿)026026 사마의(司馬懿) : 중국 삼국시대 위의 대신.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12년조(238) 참조.닫기가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027027 서안평(西安平) : 서안평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8월조 참조.닫기을 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침략해왔다.”라고 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시정을 건의한 것은 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028028 『통감(通鑑)』에는 … 이는 잘못이다 : 『자치통감』 권75 위기(魏紀)7 소릉려공(邵陵厲公) 정시 7년(46)에 “〔고〕구려의 신하 득래가 위궁에게 수차례 간하였으나 위궁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며 말하기를…”라고 하였다. 『자치통감』의 이 기록을 잘못이라 하는 것은 본서의 찬자가 위궁(位宮)을 산상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득래 관련 기록이 나오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도 “구려왕(句驪王) 궁(宮)”때의 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치통감』 기록과 서로 통한다. 따라서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자치통감』 기록이 오류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삼국지』 관구검전의 기록도 오류라고 판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닫기

註 001
왕기(王頎) : 중국 삼국시대 위의 현도태수(玄菟太守)로서 관구검을 수행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왕기가 옥저 방면으로 동천왕을 추격한 것은 정시(正始) 6년(245)이었다( 『삼국지』 권28 위서 28 관구검전). 『삼국지』에 인용된 『세어(世語)』에는 그는 동래(東萊)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후(263년) 등애(鄧艾)의 부장으로 촉(蜀) 정벌 원정에 참여하였다.
註 002
남옥저(南沃沮) :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지역으로 비정된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에 보이는 동옥저(東沃沮)와 같은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는 이 지역이 남쪽 방향이므로 ‘남옥저’로 이름한 듯하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가 왕기의 추격을 받고 옥저에서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궁(宮: 동천왕)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하고 남옥저(南沃沮)로부터 8백여 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의 매구(買溝)를 남옥저의 일부로 현재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이병도, 204쪽), 매구(買溝)와 치구루(置溝婁)를 같은 곳으로 보고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池內宏, 264~266쪽). 이상의 기사를 종합하면 동천왕은 함흥 방면인 남옥저로 피신했다가 다시 두만강 하류 일대의 북옥저로 피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각 지명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선 매구(買溝)는 매구루(買溝婁)에서 ‘루(婁)’자가 탈락된 이름인데, 고구려에서 구루(溝婁)는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치(置)’와 ‘책(柵)’은 음운상 서로 통하기 때문에, 치구루(置溝婁)는 곧 책성(柵城)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46년(98) 3월조 참조. 또 매구루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九婁)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盧泰敦, 1989), 광개토왕릉비의 수묘인연호조에 보이는 매구여(買句余)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514쪽)가 있다. 치구루와 매구루를 같은 곳으로 책성(柵城)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치구루는 책성, 매구루(味九婁)는 치구루와 별개의 지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盧泰敦, 1989). 그리고 매구(買溝)와 관련해서는 본서 대무신왕 13년(30) 7월조에 매구곡인(買溝谷人) 상수(尙須) 등이 내투한 기사가 있다. 매구곡에 대해서는 본서 대무신왕 13년(30) 7월조 주석을 참조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盧泰敦, 1989, 「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3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註 003
죽령(竹嶺) : 여기서의 죽령은 현재의 함경남도 황초령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265쪽). 당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 동옥저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독로강을 따라 낭림산맥을 넘어 황초령에서 함흥 일대로 이어지는 교통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죽령은 황초령이 타당하다.
註 004
동부(東部) : 고구려 방위명 5부의 하나이다. 본문의 하부(下部)에 상대되는 상부(上部)의 예로는 본서 권45 열전5 온달전에 ‘상부 고씨(上部高氏)’가 있다. 금석문 자료로는 「충주고구려비」의 전부(前部), 하부(下部), 「농오리 산성석각」의 전부(前部),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의 상부(上部), 「평양성각자성석」 중 ‘한성하후부(漢城下後部)’의 사례가 확인된다. 이로 보아 동·서·남·북·중 이외에 ‘상·하·전·후·중’이라는 방위명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주서(周書)』 권49 열전41 이역 상 백제전『북사(北史)』 권94 열전82 사이상 백제전에 백제 도성에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 가 있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원(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에서 인용한 『고려기』에는 “북부=후부, 동부=상부·좌부(左部), 남부=전부, 서부=우부(右部)”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동·서·남·북·중’이란 방위명부와 ‘상·하·전·후·중’이란 방위명부가 일대일로 대응되고 있음을 전하는 자료이다. 방위부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4월조 참조.
방위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구당서』 이현의 주석 또는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서 인용한 『고려기』에 나타나는 대로 5개 노부(奴部: 那部)와 5개 방위부를 등치시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나부와 방위부를 구분하여 방위부는 수도 국내성의 지역구분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방위부를 수도 국내성의 지역구분이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지역 범위 비정에는 차이가 있는데, 국내성 내부에 5방위부가 있다는 견해(李鍾旭, 1982;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강진원, 216~218쪽), 국내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5방위부가 구분되었다는 견해(정호섭, 2015), 초기에는 국내지역 전체에 있다가 후에 국내성 내부의 구역 구분으로 기능하였다는 견해(임기환, 2015) 등이 있다. 그리고 방위부를 수도의 지역구분으로 보는 견해 중에는 초기 방위부는 계루부 세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본문의 동천왕대에 활약한 밀우나 유옥구, 유유의 예에서 보듯이 국왕에 충성하는 신료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보았다(임기환, 2004), 그러다 점차 집권체제가 갖추어져 가면서 나부세력들이 수도로 이주하여 방위부로 편제되었다고 보았다(李鍾旭, 1999; 임기환, 2004; 여호규, 2014)
〈참고문헌〉
李鍾旭,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
李鍾旭, 1999, 『한국의 초기국가』, 아르케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임기환, 2015, 「고구려 國內都城의 형성과 공간구성-문헌 검토를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9
정호섭, 2015, 「고구려사의 전개와 고분의 변천」, 『한국사학보』 56
강진원, 2018, 「고구려 국내도읍기 王城의 추이와 집권력 강화」, 『한국문화』 82
註 005
밀우(密友)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註 006
왕이 샛길로 달아나 : 본서 권45 열전5 밀우·유유전은 이 기사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데, 이 부분에서 “왕이 간신히 탈출하여 갈 수 있었다[王僅得脫而去]”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註 007
하부(下部) : 고구려 방위명 5부의 하나이다. 본문의 같은 기사에서 ‘동부(東部)’가 등장한다. 미천왕대까지의 기사에서는 ‘동·서·남·북’이란 방위명부만 나타나고 있는데, 유독 이 기사에서만 ‘동부’와 ‘하부’라는 부명이 같이 사용되고 있음은 주목할 점이다. 다만 동부와 하부가 혼재된 이유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註 008
유옥구(劉屋句)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註 009
유유(紐由)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로서, 본 기사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유유(紐由)의 경우에는 밀우나 유옥구와는 달리 ‘동부인(東部人)’이라고 표현하였는데, 혹 유유가 밀우나 유옥구와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註 010
사구(司寇) : 사구는 중국 주(周)대에 형옥(刑獄)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 중 “司寇正刑明辟以聽獄訟.”라는 기사가 참조된다.
註 011
낙랑(樂浪) : 현재의 평양에 있던 중국의 군현.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예전(濊傳)에 “정시 6년(245),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단단대〕령의 예가 고구려에게 복속하자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니 불내후(不耐侯) 등이 읍락을 가지고 항복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하여 관구검(毌丘儉)이 왕기의 추격군과 별도로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을 남옥저 방면으로 보내 불내(不耐) 등을 복속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池內宏, 270쪽). 즉 유주자사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은 자신이 통솔하던 변군인 낙랑, 대방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위 기사는 낙랑군의 군대가 동예에서 동옥저로 진출하여 동천왕을 압박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2차 침공에서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은 옥저와 동예 방면으로, 왕기는 북옥저 방면으로 진공하여 고구려 세력권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전략으로 파악한다(이승호, 36~38쪽).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註 012
거곡(巨谷)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거곡과 청목곡이 식읍의 단위라는 점에서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곡에 대해서는 본서 고구려본기5 고국천왕 13년(191)조 서압록곡 주석 참조.
註 013
청목곡(靑木谷)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거곡과 청목곡이 식읍의 단위라는 점에서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곡에 대해서는 본서 고구려본기5 고국천왕 13년(191) 4월조 참조
註 014
압록두눌하원(鴨淥杜訥河原) :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전(紐由傳)에는 두눌(杜訥)의 ‘杜’를 ‘豆’라고 하였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고구려본기 중천왕 12년(259)조에는 왕이 두눌 골짜기[杜訥之谷]에서 사냥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두눌곡과 같은 곳일 것이다. 두눌하(杜訥河)는 압록강의 지류일 듯한데, 압록두눌하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두눌하는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두눌하원이 식읍으로 주어진 단위라는 점에서 여기의 원(原)은 자연지리 지명이 아니라 통치단위 등 행정적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원(原)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조 주석 참조.
註 015
구사자(九使者) : 고구려의 관등 이름이다. 대사자(大使者)의 오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구사자(九使者)는 본서 권45 열전5 밀우(密友)·유유(紐由)전 및 권40 잡지 제9 직관하 고구려관직조에 나온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자료에 의한 것으로, 현재는 전하지 않는 ‘본국고기(本國古記)’가 그 출전이다. 구사자(九使者)가 대사자(大使者)의 오기라면 본서 편찬 이전의 자료에 그러한 오기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다른 자료에 전혀 보이지 않는 대사자보다 높은 관등일 수도 있다.
註 016
대사자(大使者) : 고구려 관등의 하나이다. 대사자에 대해서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10월조 참조
註 017
숙신(肅愼)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69년(121) 10월조 및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11년(280) 10월조 참조.
註 018
환도산(丸都山) :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산성자산성이 자리 잡은 산이 환도산일 것이다. 1906년 도로공사 중에 「위관구검기공비(魏丘儉紀功碑)」가 발견된 샤오반차링[小板岔嶺]이 이 주변에 위치한다.
註 019
불내성(不耐城) : 불내(不耐)는 중국 한대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현재의 강원도 안변(安邊)으로 비정된다.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환도산과 불내성이 인접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란 문장을 본서 편찬자가 잘못 이해하여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라고 기술한 때문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3-주석편(상)-』,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72~473쪽).
註 020
위(魏)의 장수가 …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 관구검(毌丘儉)이 세운 기공비의 하나가 1906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의 샤오반차링[小板岔嶺]에서 발견되었다. 비면의 아래와 왼쪽 부분이 떨어져 나가, 7행만 남아있어 전체 문장은 알 수 없다. 남아있는 부분의 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보고마다 제각각이지만, 최대기준점에서 측정된 결과는 세로 39㎝, 가로 30㎝이다. 글씨는 예서체로 쓰여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遣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裨將軍”(판독문은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450쪽 참조). 최근에는 이승호가 실물사진자료와 탁본에 의거하여 다음 판독문을 제시한 바 있다.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遺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魏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行裨將軍領玄▨…▨裨將軍”(이승호, 20쪽).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란 문장에 의거하여 이때 관구검은 환도산과 불내성에 따로 기공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202~203쪽).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Ⅰ』, 駕洛國事蹟開發硏究院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註 021
득래(得來) : 고구려 동천왕 때의 인물.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 의하면 그는 패자(沛者) 관등에 있었으며, 동천왕의 중국 왕조 침공을 반대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굶어죽었다. 이에 후일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를 점령하고 득래의 무덤과 그의 처자를 보호했다고 한다.
註 022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 본서 고구려본기의 득래 관련 기사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을 전거로 한 것이다.
註 023
『괄지지(括地志)』 : 당 태종(太宗)의 아들인 복왕(濮王) 태(泰)가 저작랑(著作郞) 소덕언(簫德言), 비서랑(秘書郞) 고윤(顧胤) 등과 함께 지은 거질의 지리 관계의 책이다. 본래 전체 550권, 서략(序略) 5권이었다. 정관(貞觀) 12년(638)에 편찬을 시작하여 5년 만인 정관 16년(642)에 완성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與地志)』라는 앞선 지리지를 계승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 체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괄지지』는 당 현종(玄宗) 때 장수절(張守節)이 『사기정의(史記正義)』를 저술할 때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지명을 비정하는데 요긴하게 활용했으며, 여러 당송대 저작물에 인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남송(南宋)대에 이르러 그 원전은 망실되어 버리고 그 잔편(殘篇)들만이 후대 여러 서적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해졌다. 청대(淸代)인 1797년에 손성연(孫星衍)이 『괄지지』 일문(逸文)들을 정리하여 집본(輯本) 8권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최초의 『괄지지』 집본이었다.
註 024
국내성(國內城) : 현재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현성에 비정된다. 중국에서는 이를 국내성이라고 이름한다. 국내성지는 퉁거우하[通溝河]가 압록강(鴨綠江)으로 흘러드는 지안분지[集安盆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석축으로서 성벽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평면은 동서 길이가 남북 길이보다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이며 1984년 조사에서는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 총 둘레 2,686m로 보고되었는데, 2000~2003년 조사에서는 서벽 702m, 북벽 730m로 보고하고 있다. 석축은 보통 3~4미터, 동쪽 벽은 2~3미터 가량 높이로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각기 2개, 북문은 4개, 남문은 2개 이상이었다고 파악된다. 내부는 도로망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며, 중앙부에 왕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조사로는 2000~2003년에 국내성 일부 구역에 발굴조사가 시행되고, 그 발굴조사 보고서가 2004년 출간되었다. 국내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조 참조.
〈참고문헌〉
集安县文物保管所, 1984, 「集安高句丽国內城址的调査与试掘」, 『文物』 1984~1, 文物出版社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馆 编著, 2004, 『国內城』, 文物出版社
註 025
『양서(梁書)』 : 중국의 당 요사렴(姚思廉)이 찬수한 중국 양(梁)의 역사책이다. 본기 6권, 열전 50권이며 지(志)와 표(表)가 없다. 앞서 진대(陳代)에 요사렴의 아버지 요찰(姚察)이 『양서』를 편찬하였는데 망실(亡失)되었다. 본문에서 인용한 내용은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에 나온다. 그러나 『양서』 이 부분의 내용은 본문에서 인용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고구려본기 인용 기사의 내용은 위나라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 고구려전에는 두 사건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양서』 고구려전의 문장과 상관없이 두 사건이 인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註 026
사마의(司馬懿) : 중국 삼국시대 위의 대신.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12년조(238) 참조.
註 027
서안평(西安平) : 서안평에 대해서는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94년(146) 8월조 참조.
註 028
『통감(通鑑)』에는 … 이는 잘못이다 : 『자치통감』 권75 위기(魏紀)7 소릉려공(邵陵厲公) 정시 7년(46)에 “〔고〕구려의 신하 득래가 위궁에게 수차례 간하였으나 위궁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며 말하기를…”라고 하였다. 『자치통감』의 이 기록을 잘못이라 하는 것은 본서의 찬자가 위궁(位宮)을 산상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득래 관련 기록이 나오는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도 “구려왕(句驪王) 궁(宮)”때의 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치통감』 기록과 서로 통한다. 따라서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자치통감』 기록이 오류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삼국지』 관구검전의 기록도 오류라고 판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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