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가가 숙신을 정벌하다 ( 280년 10월(음) )

11년(280) 겨울 10월에 숙신(肅愼)001001 숙신(肅愼) : 숙신은 직신(稷愼)·식신(息愼)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 선진(先秦)시기 문헌에 등장하는 숙신은 주나라의 북방, 동북방 변경에 거주하는 종족으로 알려졌으나, 그 실체와 위치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선진시기 숙신 관련 기사들은 중국에서 성군(聖君)이 나타나면, 주변 민족들이 그 덕을 흠모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례로 서주(西周) 무왕대(武王代)에 숙신이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에 동방의 이민족이 헌상한 물품 중에 호시와 석노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사들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보다는, 중원인들의 이상적 관념이나 중화사상을 드러내는 기사로 보인다(池內宏, 433쪽). 따라서 이들 문헌 기록을 통해 숙신의 실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대(漢代)까지도 숙신의 실체나 그들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려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3세기 조위(曹魏)대에 돌연 숙신의 공헌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호시와 석노를 공헌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위대에는 읍루(邑婁)를 숙신(肅愼)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나타나 확립되었는데, 대체로 『위략(魏略)』의 단계에서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식의 결과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읍루전에서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다.”라고 하여 후한 시기에 부여, 고구려, 북옥저 등과 접해 있던 읍루를 고대 선진문헌에 나타나는 숙신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읍루전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지만, 같은 책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어 그를 추격하게 하니 옥저를 지나 1천여 리를 가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어, 읍루를 숙신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 중 등장하는 숙신 역시 읍루를 중국 고대 문헌의 숙신으로 이해하여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천왕 11년(280)조에 숙신을 부여의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은 『삼국지』 읍루전에서 부여의 동방에 위치하고 부여에 예속되었다는 읍루와 그 위치 등에서 서로 통한다. 「광개토왕릉비」 영락 8년조에도 숙신(肅愼) 혹은 식신(息愼) 등으로 판독되는 대상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본문에 등장하는 숙신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여호규, 23~24쪽)
〈참고문헌〉
池內宏, 1935, 「肅愼考」, 『滿鮮史硏究-上世 第1冊』, 吉川弘文館
여호규, 2009,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高句麗 天下의 공간 범위에 주변 族屬에 대한 인식」, 『역사문화연구』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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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침략해 와서 변경의 백성을 살해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나라의 일을 잘못 이어받아 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을 떨치지 못하여 이웃의 적이 우리 강역을 어지럽히는 데 이르렀다. 지략이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쳐서 깨뜨리고 싶으니, 그대들은 뛰어난 지략과 특이한 계략이 있어 장수가 될 만한 재주가 있는 자를 각기 천거하라.”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왕의 동생 달가(達賈)002002 달가(達賈) : ‘달고’라고도 읽을 수 있다. 중천왕의 아들로서 서천왕 때 숙신을 정벌하는 공을 세워 안국군(安國君)에 봉하여졌으나 봉상왕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왕 때 같은 이름의 인물이 있었으나(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20년(72) 2월조), 양자는 다른 사람이다.닫기가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감히 대장(大將)으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에 달가를 보내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뛰어난 지략으로 불의에 쳐서 단로성(檀盧城)003003 단로성(檀盧城) : 숙신의 성(城)의 하나. 그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닫기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004004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 달가가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다는 이 문장에 착안하여 단로성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집단을 형성한 숙신 세력을 상정하기도 한다(이정빈, 2019, 「양맥·숙신의 난(難), 변경에서 본 3세기 후반 동아시아와 고구려」, 『한국사연구』 187).닫기 6백여 가(家)를 부여005005 부여 : 고구려의 북방에 위치한 국가. 본문의 부여는 동명성왕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부여는 아니고, 태조왕대 기사에 등장하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봉헌을 하는 부여와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서 태조대왕 25년(77) 10월조, 53년(105) 정월조 참조.닫기 남쪽의 오천(烏川)006006 오천(烏川) : 고구려의 동북방, 부여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 고구려에 복속된 숙신(읍루) 6백여 가를 이주한 곳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닫기으로 옮기고, 부락 6~7곳에서 항복을 받아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007007 안국군(安國君) : ‘군(君)’이란 중국식 봉군제에 의한 작호인데, 당시 고구려가 중국식 작호제를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봉군제에 해당되는 고구려 독자의 제도가 후대에 봉군제의 용어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 이를 왕족에게 일정한 지역이나 종족을 지배할 권한을 분봉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하일식, 131~132쪽). 안국군이라는 군호를 ‘안국(安國)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79쪽). 봉군(封君)의 또 다른 사례로는 신대왕이 차대왕의 아들을 양국군으로 책봉한 사실이 있다.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정월조 참조.
〈참고문헌〉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2-번역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하일식, 2006,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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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고 내외의 병마 업무를 맡아보게 하고 겸하여 양맥008008 양맥(梁貊) : 타이쯔허[太子河] 강 상류에 거주하였던 맥족의 하나. 본서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유리왕 33년(14)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신대왕대 국상 명림답부가 내외의 병마의 일을 밭고 동시에 양맥부락을 통솔한 바가 있다. 양맥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3년(14) 8월조 참조.닫기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註 001
숙신(肅愼) : 숙신은 직신(稷愼)·식신(息愼)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 선진(先秦)시기 문헌에 등장하는 숙신은 주나라의 북방, 동북방 변경에 거주하는 종족으로 알려졌으나, 그 실체와 위치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선진시기 숙신 관련 기사들은 중국에서 성군(聖君)이 나타나면, 주변 민족들이 그 덕을 흠모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례로 서주(西周) 무왕대(武王代)에 숙신이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에 동방의 이민족이 헌상한 물품 중에 호시와 석노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사들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보다는, 중원인들의 이상적 관념이나 중화사상을 드러내는 기사로 보인다(池內宏, 433쪽). 따라서 이들 문헌 기록을 통해 숙신의 실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대(漢代)까지도 숙신의 실체나 그들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려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3세기 조위(曹魏)대에 돌연 숙신의 공헌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호시와 석노를 공헌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위대에는 읍루(邑婁)를 숙신(肅愼)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나타나 확립되었는데, 대체로 『위략(魏略)』의 단계에서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식의 결과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읍루전에서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다.”라고 하여 후한 시기에 부여, 고구려, 북옥저 등과 접해 있던 읍루를 고대 선진문헌에 나타나는 숙신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읍루전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지만, 같은 책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어 그를 추격하게 하니 옥저를 지나 1천여 리를 가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어, 읍루를 숙신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 중 등장하는 숙신 역시 읍루를 중국 고대 문헌의 숙신으로 이해하여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천왕 11년(280)조에 숙신을 부여의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은 『삼국지』 읍루전에서 부여의 동방에 위치하고 부여에 예속되었다는 읍루와 그 위치 등에서 서로 통한다. 「광개토왕릉비」 영락 8년조에도 숙신(肅愼) 혹은 식신(息愼) 등으로 판독되는 대상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본문에 등장하는 숙신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여호규, 23~24쪽)
〈참고문헌〉
池內宏, 1935, 「肅愼考」, 『滿鮮史硏究-上世 第1冊』, 吉川弘文館
여호규, 2009,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高句麗 天下의 공간 범위에 주변 族屬에 대한 인식」, 『역사문화연구』 32
註 002
달가(達賈) : ‘달고’라고도 읽을 수 있다. 중천왕의 아들로서 서천왕 때 숙신을 정벌하는 공을 세워 안국군(安國君)에 봉하여졌으나 봉상왕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왕 때 같은 이름의 인물이 있었으나(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20년(72) 2월조), 양자는 다른 사람이다.
註 003
단로성(檀盧城) : 숙신의 성(城)의 하나. 그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註 004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으며 : 달가가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였다는 이 문장에 착안하여 단로성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집단을 형성한 숙신 세력을 상정하기도 한다(이정빈, 2019, 「양맥·숙신의 난(難), 변경에서 본 3세기 후반 동아시아와 고구려」, 『한국사연구』 187).
註 005
부여 : 고구려의 북방에 위치한 국가. 본문의 부여는 동명성왕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부여는 아니고, 태조왕대 기사에 등장하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봉헌을 하는 부여와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서 태조대왕 25년(77) 10월조, 53년(105) 정월조 참조.
註 006
오천(烏川) : 고구려의 동북방, 부여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 고구려에 복속된 숙신(읍루) 6백여 가를 이주한 곳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註 007
안국군(安國君) : ‘군(君)’이란 중국식 봉군제에 의한 작호인데, 당시 고구려가 중국식 작호제를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봉군제에 해당되는 고구려 독자의 제도가 후대에 봉군제의 용어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 이를 왕족에게 일정한 지역이나 종족을 지배할 권한을 분봉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하일식, 131~132쪽). 안국군이라는 군호를 ‘안국(安國)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79쪽). 봉군(封君)의 또 다른 사례로는 신대왕이 차대왕의 아들을 양국군으로 책봉한 사실이 있다.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정월조 참조.
〈참고문헌〉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2-번역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하일식, 2006,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
註 008
양맥(梁貊) : 타이쯔허[太子河] 강 상류에 거주하였던 맥족의 하나. 본서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유리왕 33년(14)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신대왕대 국상 명림답부가 내외의 병마의 일을 밭고 동시에 양맥부락을 통솔한 바가 있다. 양맥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왕 33년(14) 8월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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