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외가 침략해오고,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다 ( 296년 08월(음) )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故國原)001001 고국원(故國原) : 이 기사의 고국원은 고국원왕이 죽은 후 묻힌 ‘고국의 들[故國之原]’(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1년조)과 이름이 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고국원에 ‘서천의 들[西川之原]’에 묻힌 서천왕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기사를 문면 그대로 이해하면 고국원(故國原)과 서천원(西川原)은 동일한 곳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본기에서 확인되는 왕의 장지명 표기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본기의 고국원이라는 지명을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나누어보고 고국원왕의 장지명은 협의의 개념이고, 서천왕의 무덤을 포함하는 본문의 고국원은 국내성 전체를 가리키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9). 또 서천왕의 왕릉을 포함하는 이 지역이 산상왕 때 환도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도읍지로서 ‘국원(國原)’이었고, 환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이곳은 옛 도읍이란 뜻의 ‘고국원’으로 불렸다는 견해가 있다(余昊奎, 2005; 권순홍, 2015: 2019). 한편 고국원이라는 지명은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余昊奎, 2005, 「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38
임기환, 2009,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 비정」, 『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8.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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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002002 서천왕의 무덤 : 서천왕묘에 대해서는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23년(292)조 참조.닫기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는 병마(兵馬)가 우수하고 강하여 우리의 강역을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高奴子)는 현명하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일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면, 고노자 말고는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003003 신성(新城) : 모용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이 기사의 신성은 서천왕대 보이는 동북대진인 신성과는 다른 서북쪽의 신성일 것이다. 즉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5년(335)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築國北新城]”라는 기사에 보이는 신성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국원왕 때 처음 신성 축성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봉상왕 때에는 아직 축성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거점으로서 기능을 충분히 수행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신성은 고구려 지역에서 요동 일대로 진출하는 교통로상의 중요한 거점으로 고국원왕대 이후 전연(前燕), 후연(後燕)과의 전쟁 과정에서 쟁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서북쪽의 신성은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 고이산산성(高爾山山城)에 비정된다. 신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5년(335) 정월조 참조.닫기태수004004 태수(太守) : 고구려 지방 관명의 하나. 태수(太守)는 본래 중국식 지방관직명으로 군(郡)급 지방관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중국식 관직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고노자가 소형(小兄)으로 신성재(宰)를 역임하다가 대형(大兄)으로 승진한 뒤에 다시 신성태수(太守)로 승진한 사례를 보면, 태수는 재보다 상위의 지방관직으로서 대형급 관등을 가진 자들이 임명되는 관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노자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에는 지방통치를 위한 지방관이 ‘재(宰)-태수(太守)’로 구성된 최소 2단계 통치조직을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가 중국식 관명인 재와 태수를 그래도 사용하였는지, 혹은 다른 고유의 관직명이 있었는데 후일 중국식 관직명으로 표현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본래 중국에서 재는 현급 지방관이고 태수는 군급 지방관인데, 고구려의 경우에도 재와 태수의 위계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동북의 신성재를 역임한 북부 소형 고노자는 다시 서북의 신성태수를 역임하게 되는데 이 두 지역 모두 고구려에 복속된 지역으로서, 늦어도 이 무렵에는 고구려는 복속지역의 주요 거점에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방관 파견 초기에는 주요 거점지역에만 지방관이 파견 통치하는 거점 지배형태였을 것이다(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280쪽).닫기로 삼았는데 백성을 잘 다스려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다.

註 001
고국원(故國原) : 이 기사의 고국원은 고국원왕이 죽은 후 묻힌 ‘고국의 들[故國之原]’(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1년조)과 이름이 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고국원에 ‘서천의 들[西川之原]’에 묻힌 서천왕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기사를 문면 그대로 이해하면 고국원(故國原)과 서천원(西川原)은 동일한 곳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본기에서 확인되는 왕의 장지명 표기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본기의 고국원이라는 지명을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나누어보고 고국원왕의 장지명은 협의의 개념이고, 서천왕의 무덤을 포함하는 본문의 고국원은 국내성 전체를 가리키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9). 또 서천왕의 왕릉을 포함하는 이 지역이 산상왕 때 환도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도읍지로서 ‘국원(國原)’이었고, 환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이곳은 옛 도읍이란 뜻의 ‘고국원’으로 불렸다는 견해가 있다(余昊奎, 2005; 권순홍, 2015: 2019). 한편 고국원이라는 지명은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余昊奎, 2005, 「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38
임기환, 2009,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 비정」, 『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권순홍, 2015,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태조왕대의 왕실교체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8.
권순홍, 2019,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註 002
서천왕의 무덤 : 서천왕묘에 대해서는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23년(292)조 참조.
註 003
신성(新城) : 모용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이 기사의 신성은 서천왕대 보이는 동북대진인 신성과는 다른 서북쪽의 신성일 것이다. 즉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5년(335)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築國北新城]”라는 기사에 보이는 신성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국원왕 때 처음 신성 축성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봉상왕 때에는 아직 축성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거점으로서 기능을 충분히 수행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신성은 고구려 지역에서 요동 일대로 진출하는 교통로상의 중요한 거점으로 고국원왕대 이후 전연(前燕), 후연(後燕)과의 전쟁 과정에서 쟁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서북쪽의 신성은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 고이산산성(高爾山山城)에 비정된다. 신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5년(335) 정월조 참조.
註 004
태수(太守) : 고구려 지방 관명의 하나. 태수(太守)는 본래 중국식 지방관직명으로 군(郡)급 지방관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중국식 관직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고노자가 소형(小兄)으로 신성재(宰)를 역임하다가 대형(大兄)으로 승진한 뒤에 다시 신성태수(太守)로 승진한 사례를 보면, 태수는 재보다 상위의 지방관직으로서 대형급 관등을 가진 자들이 임명되는 관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노자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에는 지방통치를 위한 지방관이 ‘재(宰)-태수(太守)’로 구성된 최소 2단계 통치조직을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가 중국식 관명인 재와 태수를 그래도 사용하였는지, 혹은 다른 고유의 관직명이 있었는데 후일 중국식 관직명으로 표현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본래 중국에서 재는 현급 지방관이고 태수는 군급 지방관인데, 고구려의 경우에도 재와 태수의 위계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동북의 신성재를 역임한 북부 소형 고노자는 다시 서북의 신성태수를 역임하게 되는데 이 두 지역 모두 고구려에 복속된 지역으로서, 늦어도 이 무렵에는 고구려는 복속지역의 주요 거점에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방관 파견 초기에는 주요 거점지역에만 지방관이 파견 통치하는 거점 지배형태였을 것이다(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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