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의 모용황이 남도로 침략하다 ( 342년 11월(음) )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011011 중국의 渾江 연안에서 고구려 수도인 集安으로 들어가는 두 길 중의 하나이다.닫기로 나오고, 모용한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北道)012012 중국의 요하 하류 지역에서 고구려의 수도 지역인 集安으로 통하는 길은 北道와 南道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각각의 경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도: 瀋陽-渾河 경유하여-상류의 蘇子河 유역-通化-丸都
북도: 開原-淸河 경유-輝發河 상류-臨江-通化-輯安
(箭內亘, 「南北朝時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 1)
2. 북도: 箭內亘이 말하는 남도와 같다.
남도: 遼陽-太子河 유역 경유한다.
(津田左右吉, 「安東都護府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3. 북도: 津田左右吉설과 일치한다.
남도: 骨關-太子河 거슬러 감-興京 경유한다.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 《靑丘學叢》 22)
그러나 ‘北道’와 ‘南道’를 보다 좁은 지역의 개념 즉 渾江 연안에서 고구려 수도인 集安으로 들어가는 두 길의 구분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보는 견해도 있다(《吉林輯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 《考古》 1964-2).
북도: 老嶺 넘어-葦沙河(大淸河)를 따라가는 길
남도: 新開河 협곡을 따라가서-望波嶺과 板嶺을 넘고-麻線溝를 지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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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동생 (武)를 보내 정예병력 5만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방어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도착하여 싸우고 모용황이 큰 무리로써 이어 오니 우리 병력이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013013 중국 전연의 軍國之務의 자문 관직이다.닫기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로 들어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斷熊谷014014 이 부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측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측 자료에 의하여 《삼국사기》의 찬자가 보충한 것으로 생각한다.닫기)으로 들어갔다. 장군015015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晉紀 顯宗成帝 咸康 8년 겨울 10월조에는 ‘輕車將軍’이라 하였다.닫기모여니(慕輿埿)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마침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워서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오지 않았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하는데 한수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은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어 엎드려 있습니다.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남은 불씨를 거둘 것이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인질로 잡아 돌아가서 몸을 묶고 스스로 항복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기를 청하옵니다. 은덕과 신뢰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하였다. 모용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016016 이 부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晉紀 顯宗成帝 咸康 8년 겨울 10월조의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유사한 내용이 《진서(晉書)》 권109 慕容皝傳에 咸康 7년(341)의 사실로, 《위서(魏書)》 권95 慕容元眞조《魏書》 권100 고구려전에 역시 341년인 건국 4년의 사실로, 《양서(梁書)》 권54 고구려전에는 建元 원년(343)의 사실로, 또 《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에도 보인다.닫기

註 011
중국의 渾江 연안에서 고구려 수도인 集安으로 들어가는 두 길 중의 하나이다.
註 012
중국의 요하 하류 지역에서 고구려의 수도 지역인 集安으로 통하는 길은 北道와 南道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각각의 경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도: 瀋陽-渾河 경유하여-상류의 蘇子河 유역-通化-丸都
북도: 開原-淸河 경유-輝發河 상류-臨江-通化-輯安
(箭內亘, 「南北朝時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 1)
2. 북도: 箭內亘이 말하는 남도와 같다.
남도: 遼陽-太子河 유역 경유한다.
(津田左右吉, 「安東都護府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3. 북도: 津田左右吉설과 일치한다.
남도: 骨關-太子河 거슬러 감-興京 경유한다.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 《靑丘學叢》 22)
그러나 ‘北道’와 ‘南道’를 보다 좁은 지역의 개념 즉 渾江 연안에서 고구려 수도인 集安으로 들어가는 두 길의 구분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보는 견해도 있다(《吉林輯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 《考古》 1964-2).
북도: 老嶺 넘어-葦沙河(大淸河)를 따라가는 길
남도: 新開河 협곡을 따라가서-望波嶺과 板嶺을 넘고-麻線溝를 지나는 길
註 013
중국 전연의 軍國之務의 자문 관직이다.
註 014
이 부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측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측 자료에 의하여 《삼국사기》의 찬자가 보충한 것으로 생각한다.
註 015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晉紀 顯宗成帝 咸康 8년 겨울 10월조에는 ‘輕車將軍’이라 하였다.
註 016
이 부분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晉紀 顯宗成帝 咸康 8년 겨울 10월조의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유사한 내용이 《진서(晉書)》 권109 慕容皝傳에 咸康 7년(341)의 사실로, 《위서(魏書)》 권95 慕容元眞조《魏書》 권100 고구려전에 역시 341년인 건국 4년의 사실로, 《양서(梁書)》 권54 고구려전에는 建元 원년(343)의 사실로, 또 《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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