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 343년 07월(음) )

가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018018 이 부분을 ‘(平壤) 동쪽의 黃城’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平壤을 國內 즉 지금의 集安으로 여기고 黃城을 그 동쪽에 있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東台子遺蹟으로 본다. 그러나 평양을 지금의 자강도 강계로 보고 동황성은 그곳에 있는 성명이라 여기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70~373쪽 참조). 또는 이것을 지금의 평양으로 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 《국사관논총》 48, 1993).닫기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019019 평양의 동남방에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平壤 東黃城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 근처로 보고 고려시대 당시 西京(平壤)에 木覓山에 있는 城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장수왕대에 도읍한 곳은 지금의 평양 대성구역의 大城山 밑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국여지승람》 권51 平壤府에 “九龍山: 在府北二十里 或云 大城山 或云 魯陽山…木覓山: 在府東四里 有黃城古址 一名 絅山”라는 기록에 의하면 木覓山과 大城山은 별개의 산이었다. 《동국여지승람》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木覓山城=黃山 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黃山을 후에 고구려가 도읍한 곳으로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닫기 중에 있다. (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020020 《진서(晉書)》 권7 康帝 建元 원년(343) 12월조에 《高句驪遣使朝獻》 이라 하였다.닫기

註 018
이 부분을 ‘(平壤) 동쪽의 黃城’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平壤을 國內 즉 지금의 集安으로 여기고 黃城을 그 동쪽에 있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東台子遺蹟으로 본다. 그러나 평양을 지금의 자강도 강계로 보고 동황성은 그곳에 있는 성명이라 여기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70~373쪽 참조). 또는 이것을 지금의 평양으로 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 《국사관논총》 48, 1993).
註 019
평양의 동남방에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平壤 東黃城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 근처로 보고 고려시대 당시 西京(平壤)에 木覓山에 있는 城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장수왕대에 도읍한 곳은 지금의 평양 대성구역의 大城山 밑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국여지승람》 권51 平壤府에 “九龍山: 在府北二十里 或云 大城山 或云 魯陽山…木覓山: 在府東四里 有黃城古址 一名 絅山”라는 기록에 의하면 木覓山과 大城山은 별개의 산이었다. 《동국여지승람》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木覓山城=黃山 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黃山을 후에 고구려가 도읍한 곳으로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註 020
《진서(晉書)》 권7 康帝 建元 원년(343) 12월조에 《高句驪遣使朝獻》 이라 하였다.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정치>외교>사신>조공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지명 : 평양, 서경, 목멱산
국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