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 기원전 18년 05월 )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東明王)041041 동명은 여러 사서에 부여의 시조(《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고구려의 시조(《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 백제(《속일본기(續日本記)》) 전해지고 있다. 동명이 부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시조로 나오는 것은 부여족의 족조(族祖)였기 때문이다(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사학회, 1981).닫기의 사당(祠堂)042042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조에는 백제의 역대 왕들이 동명왕묘에 배알한 일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나라를 세운 建國祖인 온조를 모신 사당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워 제사드린 것은 부여족의 族祖인 동명을 시조묘에 모심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조인 온조의 사당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 왕실의 종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격하시키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위례 집단 이래의 종묘를 백제국가의 종묘로 격상시킴도 그만큼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사회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 한편 東明王廟는 廟堂이 아니고 始祖王陵 등 穀靈信仰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삼국사기》 2, 평범사, 1983, 295쪽).닫기을 세웠다.043043 《周書》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의 국왕은 계절마다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시조 구이(仇台)의 사당에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가 온조왕대부터 한성 함락 직전까지는 동명묘를 배알하였고, 웅진 천도 이후 구이묘를 배알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차용걸, 「백제의 제천사지와 정치체제의 변화」, 《한국학보》 11, 1978 | 이종태, 「백제 시조구태묘의 성립과 계승」, 《한국고대사연구》 13, 1998). 즉 고구려가 서울 지역을 점유하면서 한성에 있던 동명묘를 더 이상 배알하기 어렵게 되자 구이묘를 배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 왕실이 웅진 천도 이후 동명묘를 대신하여 구이묘를 새롭게 건립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닫기

註 041
동명은 여러 사서에 부여의 시조(《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고구려의 시조(《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 백제(《속일본기(續日本記)》) 전해지고 있다. 동명이 부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시조로 나오는 것은 부여족의 족조(族祖)였기 때문이다(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사학회, 1981).
註 042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조에는 백제의 역대 왕들이 동명왕묘에 배알한 일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나라를 세운 建國祖인 온조를 모신 사당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워 제사드린 것은 부여족의 族祖인 동명을 시조묘에 모심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조인 온조의 사당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 왕실의 종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격하시키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위례 집단 이래의 종묘를 백제국가의 종묘로 격상시킴도 그만큼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사회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 한편 東明王廟는 廟堂이 아니고 始祖王陵 등 穀靈信仰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삼국사기》 2, 평범사, 1983, 295쪽).
註 043
《周書》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의 국왕은 계절마다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시조 구이(仇台)의 사당에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가 온조왕대부터 한성 함락 직전까지는 동명묘를 배알하였고, 웅진 천도 이후 구이묘를 배알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차용걸, 「백제의 제천사지와 정치체제의 변화」, 《한국학보》 11, 1978 | 이종태, 「백제 시조구태묘의 성립과 계승」, 《한국고대사연구》 13, 1998). 즉 고구려가 서울 지역을 점유하면서 한성에 있던 동명묘를 더 이상 배알하기 어렵게 되자 구이묘를 배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 왕실이 웅진 천도 이후 동명묘를 대신하여 구이묘를 새롭게 건립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주제분류
사회>의례>제사>조상신
정치>왕실>궁궐>殿·門·閣·堂·樓·臺·亭·房
색인어
이름 : 동명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