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다 ( 기원전 6년 05월 )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001001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동쪽과 북쪽에 각각 낙랑과 말갈이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서 편찬자에게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존재한 것으로 인식된 배경은 접전을 벌인 곳이 주로 백제의 북쪽 또는 동북쪽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기록상의 실수가 아니라 말갈이 백제의 북쪽이나 동북쪽을 주로 침입했기 때문에 “북유말갈(北有靺鞨)”로 서술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또한 “동유낙랑(東有樂浪)”은 춘천의 토착 집단 즉, 군현의 부용 세력으로 있던 맥국을 낙랑으로 호칭한 것과 관련이 있다(丁若鏞, 「疆域考2-樂浪別考」, 『與猶堂全書』). 평양의 낙랑군은 춘천의 토착 세력을 내세워 분치(分治)하였는데, 춘천 지역의 맥인들이 낙랑을 자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金起燮, 1991). 온조왕 8년(B.C. 11) 가을 7월조의 낙랑사신의 발언이나 온조왕 11년(B.C. 8) 가을 7월에 독산책과 구천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는 기사와 연관시켜 백제의 동쪽에 ‘대낙랑군체제’ 하에서 낙랑군이 직접 관할하였던 영서예의 예가 있었기 때문에 이 표현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尹善泰, 18~21쪽). 한편 낙랑을 비롯한 중국 군현이 백제의 북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평안도와 황해도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과 모순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鄭求福 外, 1997).
〈참고문헌〉
金起燮, 1991, 「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보이는 靺鞨과 樂浪의 位置에 대한 再檢討」, 『淸溪史學』 8, 청계사학회
鄭求福 外, 1997, 『譯註 三國史記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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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002002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 온조왕에 대해서는 우태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고, 주몽과 소서노가 혼인한 뒤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후자를 따른다면 국모는 소서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닫기 형세가 스스로 편안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003003 한수 남쪽을 보니 … 도읍을 정하여 :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에는 온조 집단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온조 집단이 처음에 한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 즉위년조의 기사와 상치된다. 하북위례성을 세검정이나(李丙燾, 493~495쪽) 중랑천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었으나(崔夢龍·權五榮, 1985), 근거자료는 부족하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崔夢龍·權五榮, 1985,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正音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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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註 001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동쪽과 북쪽에 각각 낙랑과 말갈이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서 편찬자에게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존재한 것으로 인식된 배경은 접전을 벌인 곳이 주로 백제의 북쪽 또는 동북쪽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기록상의 실수가 아니라 말갈이 백제의 북쪽이나 동북쪽을 주로 침입했기 때문에 “북유말갈(北有靺鞨)”로 서술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또한 “동유낙랑(東有樂浪)”은 춘천의 토착 집단 즉, 군현의 부용 세력으로 있던 맥국을 낙랑으로 호칭한 것과 관련이 있다(丁若鏞, 「疆域考2-樂浪別考」, 『與猶堂全書』). 평양의 낙랑군은 춘천의 토착 세력을 내세워 분치(分治)하였는데, 춘천 지역의 맥인들이 낙랑을 자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金起燮, 1991). 온조왕 8년(B.C. 11) 가을 7월조의 낙랑사신의 발언이나 온조왕 11년(B.C. 8) 가을 7월에 독산책과 구천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는 기사와 연관시켜 백제의 동쪽에 ‘대낙랑군체제’ 하에서 낙랑군이 직접 관할하였던 영서예의 예가 있었기 때문에 이 표현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尹善泰, 18~21쪽). 한편 낙랑을 비롯한 중국 군현이 백제의 북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평안도와 황해도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과 모순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鄭求福 外, 1997).
〈참고문헌〉
金起燮, 1991, 「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보이는 靺鞨과 樂浪의 位置에 대한 再檢討」, 『淸溪史學』 8, 청계사학회
鄭求福 外, 1997, 『譯註 三國史記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註 002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 온조왕에 대해서는 우태의 소생이라는 설도 있고, 주몽과 소서노가 혼인한 뒤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후자를 따른다면 국모는 소서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註 003
한수 남쪽을 보니 … 도읍을 정하여 :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 18)조에는 온조 집단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온조 집단이 처음에 한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 즉위년조의 기사와 상치된다. 하북위례성을 세검정이나(李丙燾, 493~495쪽) 중랑천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었으나(崔夢龍·權五榮, 1985), 근거자료는 부족하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崔夢龍·權五榮, 1985,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正音文化社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색인어
지명 : 낙랑, 한수
국명 : 말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