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 246년 08월(음) )

〔13년(246)〕 가을 8월에 (魏)나라001001 위(魏)나라 : 2세기 말엽에 중국 후한(後漢)의 재상 조조(曹操)가 기틀을 마련하고 220년에 그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로부터 양위 받아 세운 나라로서, 조위(曹魏)라고도 한다. 처음의 수도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쉬창[許昌]이었으나 조비가 문황제(文皇帝)로 즉위한 뒤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이후 하북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며 촉(蜀)·오(吳)와 함께 삼국시대를 형성하였다가 265년 제5대 원황제(元皇帝)가 권신 사마염(司馬炎)에게 선양함으로써 진(晉)나라로 바뀌었다.닫기 유주자사(幽州刺史)002002 유주자사(幽州刺史) : 유주(幽州)를 관할하는 장관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시[北京市]를 비롯해 허베이성[河北省] 북부지역과 랴오닝성[遼寧省] 남부지역, 그리고 산둥성[山東省] 일부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치소는 지금의 베이징시 다싱구[大興區] 서남쪽이었다가 진나라 때 허베이성 저줘우시[涿州市]로 옮겨갔다. 후한 말엽의 유주는 11군(郡)·국(國), 90현(縣) 규모였다. 자사는 한(漢)나라 때 군(郡)·국(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주(州)에 둔 검찰관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에는 직위가 군(郡) 태수보다 낮았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한 주(州)의 장관으로서 군사·민정을 관장하는 군벌(軍閥)로 발전하였다.닫기관구검(毌丘儉)003003 관구검(毌丘儉) : 중국 위(魏)나라의 장수이다. 지금의 산시성[山西省]에 위치한 원시현[聞喜縣] 출신으로서 233~237년경에 유주자사가 되어 공손연(公孫淵)과 싸워 이겼고, 238년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공손연을 공격하여 공손씨 정권을 붕괴시켰으며, 이때의 공로로 안읍후(安邑侯)에 봉해졌다. 240~249년경에는 두 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첫 번째 공격에서 고구려군 18,000명을 죽이고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관구검은 사마씨의 전횡에 분노하여 255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망가던 중 살해되었다. 『삼국지(三國志)』 권28 위서(魏書)에 그의 열전이 실려 있다.닫기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004004 유무(劉茂)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이다. 245년에 낙랑태수로서 유주자사 관구검의 지휘를 받아 영동(嶺東)의 예(濊)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247년에 진한(辰韓) 8국의 분할 문제로 낙랑·대방과 한(韓) 사이에 충돌이 생겨 한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함께 한을 공격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이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 실려 있다.닫기, 삭방(朔方)005005 삭방(朔方)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대방으로 나온다. 중국에서 삭방군(朔方郡)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흉노(匈奴)를 쫓아내고 장악한 지역에 설치한 군(郡)으로서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어얼둬쓰시[鄂尔多斯市] 부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본 기사의 삭방은 대방을 잘못 쓴 것일 개연성이 높다. 대방군은 2세기 말 후한(後漢)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 태수인 공손탁이 독립정권을 세우고 요서·요동지역과 산동지역 일부 및 낙랑군까지 장악한 뒤 3세기 초에 아들 공손강이 자리를 이어받고 낙랑군의 남부지역을 따로 떼어내 만든 군(郡)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치소는 봉산 사리원(沙里院)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李丙燾, 1976, 「帶方郡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닫기 태수 왕준(王遵)006006 왕준(王遵)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궁준(弓遵)으로 기록되어 있어 흔히 궁준을 잘못 쓴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낙랑지역에는 왕씨가 많이 살았고 유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므로 왕준일 수도 있다.닫기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007007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 고구려를 쳤다 : 242년에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공략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의 군대는 고구려를 침략해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 방어군을 무찌르고 국내성을 함락시켰으나 동천왕이 옥저지역으로 도망가자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관구검은 245년에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조 참조.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공략한 것을 기념한 「위 관구검기공비(魏毌丘儉紀功碑)」가 1906년에 만주 지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조, 『삼국지(三國志)』 권28 관구검열전권30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활동상이 보이지 않고, 단지 『삼국지』 권30 동이전 예(濊)전한전에만 기록이 있다. 특히 『삼국지』 권30 동이전 예(濊)조에는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지역의 예(穢)가 구려(句驪)에 복속되어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불내후(不耐侯) 등이 읍(邑)을 바치며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현도태수 왕기의 군대는 고구려 환도성을 거쳐 북옥저 일대까지 진격하고,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군대는 영동의 예지역으로 동시에 진격하며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木簡과 文字』 15, 한국목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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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008008 왕이 빈틈을 타서 … 습격하여 빼앗으니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래 한(韓)의 나라들을 통솔하였다 해서 진한(辰韓)의 8국을 나누어 낙랑에게 주었는데, 관리가 통역할 때 차이가 있어 신지(臣智)가 격분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본서의 이 기사를 『삼국지』 기록과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보고,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신지를 백제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千寬宇, 1976; 김수태, 1998; 鄭載潤, 2001), 목지국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兪元載, 1994; 노중국, 2018), 신분고국을 비롯한 백제 주변의 다른 정치세력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武田幸男, 1990; 金起燮, 1993; 윤용구, 1998; 권오영, 2001; 尹善泰, 2001)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武田幸男, 1990, 「魏志東夷傳における馬韓」, 『馬韓‧百濟文化』 12,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兪元載, 1994, 「 『晉書』의 마한과 백제」, 『韓國上古史學報』 17
김수태, 1998, 「3세기 중·후반 백제의 발전과 馬韓」,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윤용구, 1998, 「 『三國志』 韓傳 對外關係記事에 대한 一檢討」,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권오영, 2001,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전환」, 『역사와 현실』 40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中原文化論叢』 5,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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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009009 왕이 …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 본 기사를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의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며, 2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는 기록과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 고이왕이 군사를 보내 낙랑·대방의 변경을 공략하였다가 한군현의 반격을 당하게 되자 잡아온 주민들을 되돌려준 일이 『삼국지』에는 한(백제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과장 기록되었다는 해석이며, 한군현과 한(백제)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대방군과 백제가 화친을 맺었다고 보기도 한다(鄭載潤, 2001). 궁준 등이 공격한 것은 마한의 신분고국이며, 이때 신분고국이 멸망함으로써 백제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한다(윤용구, 1998; 尹善泰, 2001).
〈참고문헌〉
윤용구, 1998, 「 『三國志』 韓傳 對外關係記事에 대한 一檢討」,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中原文化論叢』 5,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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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위(魏)나라 : 2세기 말엽에 중국 후한(後漢)의 재상 조조(曹操)가 기틀을 마련하고 220년에 그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로부터 양위 받아 세운 나라로서, 조위(曹魏)라고도 한다. 처음의 수도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쉬창[許昌]이었으나 조비가 문황제(文皇帝)로 즉위한 뒤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이후 하북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며 촉(蜀)·오(吳)와 함께 삼국시대를 형성하였다가 265년 제5대 원황제(元皇帝)가 권신 사마염(司馬炎)에게 선양함으로써 진(晉)나라로 바뀌었다.
註 002
유주자사(幽州刺史) : 유주(幽州)를 관할하는 장관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시[北京市]를 비롯해 허베이성[河北省] 북부지역과 랴오닝성[遼寧省] 남부지역, 그리고 산둥성[山東省] 일부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치소는 지금의 베이징시 다싱구[大興區] 서남쪽이었다가 진나라 때 허베이성 저줘우시[涿州市]로 옮겨갔다. 후한 말엽의 유주는 11군(郡)·국(國), 90현(縣) 규모였다. 자사는 한(漢)나라 때 군(郡)·국(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주(州)에 둔 검찰관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에는 직위가 군(郡) 태수보다 낮았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한 주(州)의 장관으로서 군사·민정을 관장하는 군벌(軍閥)로 발전하였다.
註 003
관구검(毌丘儉) : 중국 위(魏)나라의 장수이다. 지금의 산시성[山西省]에 위치한 원시현[聞喜縣] 출신으로서 233~237년경에 유주자사가 되어 공손연(公孫淵)과 싸워 이겼고, 238년 사마의(司馬懿)를 따라 공손연을 공격하여 공손씨 정권을 붕괴시켰으며, 이때의 공로로 안읍후(安邑侯)에 봉해졌다. 240~249년경에는 두 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첫 번째 공격에서 고구려군 18,000명을 죽이고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관구검은 사마씨의 전횡에 분노하여 255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망가던 중 살해되었다. 『삼국지(三國志)』 권28 위서(魏書)에 그의 열전이 실려 있다.
註 004
유무(劉茂)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이다. 245년에 낙랑태수로서 유주자사 관구검의 지휘를 받아 영동(嶺東)의 예(濊)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247년에 진한(辰韓) 8국의 분할 문제로 낙랑·대방과 한(韓) 사이에 충돌이 생겨 한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함께 한을 공격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이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 실려 있다.
註 005
삭방(朔方)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대방으로 나온다. 중국에서 삭방군(朔方郡)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흉노(匈奴)를 쫓아내고 장악한 지역에 설치한 군(郡)으로서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어얼둬쓰시[鄂尔多斯市] 부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본 기사의 삭방은 대방을 잘못 쓴 것일 개연성이 높다. 대방군은 2세기 말 후한(後漢)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 태수인 공손탁이 독립정권을 세우고 요서·요동지역과 산동지역 일부 및 낙랑군까지 장악한 뒤 3세기 초에 아들 공손강이 자리를 이어받고 낙랑군의 남부지역을 따로 떼어내 만든 군(郡)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치소는 봉산 사리원(沙里院)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李丙燾, 1976, 「帶方郡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註 006
왕준(王遵)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궁준(弓遵)으로 기록되어 있어 흔히 궁준을 잘못 쓴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낙랑지역에는 왕씨가 많이 살았고 유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므로 왕준일 수도 있다.
註 007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 고구려를 쳤다 : 242년에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공략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의 군대는 고구려를 침략해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 방어군을 무찌르고 국내성을 함락시켰으나 동천왕이 옥저지역으로 도망가자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관구검은 245년에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조 참조.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공략한 것을 기념한 「위 관구검기공비(魏毌丘儉紀功碑)」가 1906년에 만주 지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한편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조, 『삼국지(三國志)』 권28 관구검열전권30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활동상이 보이지 않고, 단지 『삼국지』 권30 동이전 예(濊)전한전에만 기록이 있다. 특히 『삼국지』 권30 동이전 예(濊)조에는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지역의 예(穢)가 구려(句驪)에 복속되어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불내후(不耐侯) 등이 읍(邑)을 바치며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현도태수 왕기의 군대는 고구려 환도성을 거쳐 북옥저 일대까지 진격하고,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의 군대는 영동의 예지역으로 동시에 진격하며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木簡과 文字』 15, 한국목간학회).
註 008
왕이 빈틈을 타서 … 습격하여 빼앗으니 :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래 한(韓)의 나라들을 통솔하였다 해서 진한(辰韓)의 8국을 나누어 낙랑에게 주었는데, 관리가 통역할 때 차이가 있어 신지(臣智)가 격분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본서의 이 기사를 『삼국지』 기록과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보고,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신지를 백제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千寬宇, 1976; 김수태, 1998; 鄭載潤, 2001), 목지국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兪元載, 1994; 노중국, 2018), 신분고국을 비롯한 백제 주변의 다른 정치세력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武田幸男, 1990; 金起燮, 1993; 윤용구, 1998; 권오영, 2001; 尹善泰, 2001)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武田幸男, 1990, 「魏志東夷傳における馬韓」, 『馬韓‧百濟文化』 12,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兪元載, 1994, 「 『晉書』의 마한과 백제」, 『韓國上古史學報』 17
김수태, 1998, 「3세기 중·후반 백제의 발전과 馬韓」,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윤용구, 1998, 「 『三國志』 韓傳 對外關係記事에 대한 一檢討」,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권오영, 2001,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전환」, 『역사와 현실』 40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中原文化論叢』 5,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註 009
왕이 …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 본 기사를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전의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며, 2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는 기록과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 고이왕이 군사를 보내 낙랑·대방의 변경을 공략하였다가 한군현의 반격을 당하게 되자 잡아온 주민들을 되돌려준 일이 『삼국지』에는 한(백제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과장 기록되었다는 해석이며, 한군현과 한(백제)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대방군과 백제가 화친을 맺었다고 보기도 한다(鄭載潤, 2001). 궁준 등이 공격한 것은 마한의 신분고국이며, 이때 신분고국이 멸망함으로써 백제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한다(윤용구, 1998; 尹善泰, 2001).
〈참고문헌〉
윤용구, 1998, 「 『三國志』 韓傳 對外關係記事에 대한 一檢討」, 『馬韓史 硏究』, 忠南大學校 出版部
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鄭載潤, 2001,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中原文化論叢』 5,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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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 관구검, 유무, 왕준, 진충
지명 : 낙랑
국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