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왕이 살해되다 ( 304년 10월(음) )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111111 백제는 책계왕 때에 이르러 한강 수로(水路)를 통하여 남하하는 말갈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도와 그 주변의 방위 시설을 마련하였다. 백제의 성장이 가속화되자 군현과 말갈은 공동 출병하여 책계왕을 전사케 하였고, 그 다음에 즉위한 분서왕은 자객을 파견하여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고 연맹왕국의 토대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축출하자 말갈 세력은 위기감이 팽배해졌고, 백제는 이 기회를 틈타 영서 말갈지역으로 진출하였다(문안식, 《한국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55~57쪽). 말갈은 군현이 축출되자 후원 세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지면서 백제에 복속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말갈은 독자적인 대외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387년(진사왕 3)의 관미령 전투(《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진사왕 3년) 이전까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원주 등지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도자(陶瓷) 등을 통하여 백제의 영향력이 말갈지역까지 미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권오영, 「4세기 백제의 지방통제방식 일례」, 《한국사론》1988, 18쪽 | 이도학, 《백제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995, 1995, 182쪽). 현재의 남한강 중·상류 일대가 백제계 토기의 분포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영향력을 받은 사실을 반영한다(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 《국사관논총》 48, 1993, 1989, 9쪽).닫기

註 111
백제는 책계왕 때에 이르러 한강 수로(水路)를 통하여 남하하는 말갈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도와 그 주변의 방위 시설을 마련하였다. 백제의 성장이 가속화되자 군현과 말갈은 공동 출병하여 책계왕을 전사케 하였고, 그 다음에 즉위한 분서왕은 자객을 파견하여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고 연맹왕국의 토대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축출하자 말갈 세력은 위기감이 팽배해졌고, 백제는 이 기회를 틈타 영서 말갈지역으로 진출하였다(문안식, 《한국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55~57쪽). 말갈은 군현이 축출되자 후원 세력을 잃고 급격히 쇠약해지면서 백제에 복속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말갈은 독자적인 대외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387년(진사왕 3)의 관미령 전투(《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진사왕 3년) 이전까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원주 등지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도자(陶瓷) 등을 통하여 백제의 영향력이 말갈지역까지 미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권오영, 「4세기 백제의 지방통제방식 일례」, 《한국사론》1988, 18쪽 | 이도학, 《백제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995, 1995, 182쪽). 현재의 남한강 중·상류 일대가 백제계 토기의 분포권을 이루고 있는 것도 영향력을 받은 사실을 반영한다(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 《국사관논총》 48, 1993, 1989, 9쪽).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