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5천여 명을 살해하다 ( 369년 09월(음) )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128128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으로, 일명 쇠(釗)라고 하였다.닫기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129129 치양(雉壤)은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치양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개성에서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남부 지역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다(사회과학원, 《고고민속》 1966-1, 1966, 24~27쪽).닫기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130130 백제가 고구려와의 치양성 전투에서 거둔 戰果.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故國原王 39년(369)조에 나온다. 이 치양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가 황해도 지역에 두어졌던 帶方故地의 영유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닫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31131 치양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가 대방 고지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인 사실을 반영한다.닫기


註 128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으로, 일명 쇠(釗)라고 하였다.
註 129
치양(雉壤)은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치양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개성에서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남부 지역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다(사회과학원, 《고고민속》 1966-1, 1966, 24~27쪽).
註 130
백제가 고구려와의 치양성 전투에서 거둔 戰果.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故國原王 39년(369)조에 나온다. 이 치양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가 황해도 지역에 두어졌던 帶方故地의 영유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註 131
치양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가 대방 고지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인 사실을 반영한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정치>군사>군사조직>보훈
색인어
이름 : 사유
지명 : 치양,치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