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이 즉위하다 ( 375년 11월(음) )

근구수왕(近仇首王)001001 근구수왕(近仇首王) : 백제 제14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375~384년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56년조에는 왕자 귀수(貴須), 권19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7월에는 귀수왕(貴須王)으로 적혀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우경(右京) 제번(諸蕃) 下에는 근귀수왕(近貴首王)으로 적혀 있다.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 명문 중의 ‘백제왕세자(百濟王世△) 기생성음(奇生聖音)’의 기(奇) 또는 기생(奇生)을 근구수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6, 「百濟七支刀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23~528쪽). 근구수왕의 이름은 아버지 근초고왕처럼 할아버지의 이름 구수왕에 ‘근(近)’자를 앞에 붙여 만든 것이므로 백제왕실 내에서 초고계(肖古系)의 왕위계승을 강조한 것이라고 흔히 해석한다. 그의 이름 귀수는 ‘수(須)’로 축약되기도 하였는데, 472년경 백제가 북위로 보낸 표문(表文)에는 개로왕이 “저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해 번개처럼 달려가…”라고 한 대목이 있다(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18년(472)조 참조).닫기 이름[諱]을 수(須)라고도 한다근초고왕(近肖古王)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국강왕(國岡王)002002 국강왕(國岡王) : 고구려 제18대 고국원왕의 무덤을 기준으로 만든 시호의 일부이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331)조에는 국강상왕(國罡上王)으로 적혀 있다.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의 ‘△岡上聖太王’과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의 ‘國岡上太王’을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국강(國岡)은 ‘나라의 언덕’이라는 뜻으로서 고국원왕의 무덤이 국내성 도읍의 언덕 모양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성이 도읍이었을 때에는 시호가 국강상왕이었으나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 시호가 고국원왕으로 바뀌었다고 해석한다(高寬敏, 1996; 임기환, 2002; 여호규, 2014).
〈참고문헌〉
高寬敏, 1996, 『三國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왕호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닫기
사유(斯由)가 몸소 쳐들어오니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막았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003003 반걸양(半乞壤) : 본서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4년(369) 9월조에 나오는 치양과 같은 곳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이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377쪽). 같은 지명이 이처럼 다르게 적혔다는 것은 같은 사건에 대해 여러 기록이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닫기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004004 사기(斯紀) : 4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백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사기(斯紀)의 ‘사(斯)’를 ‘사(沙)’와 통하는 것으로 보아 사씨(沙氏) 출신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근거는 없다.닫기는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 저쪽으로 달아났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아뢰기를, “저쪽 군사는 비록 많긴 하지만 모두 숫자를 채운 거짓 군사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것은 오직 붉은 깃발뿐이니 제일 먼저 이들을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공격하니 크게 이겼다.
달아나는 자를 뒤쫓아 수곡성(水谷城) 서북쪽에까지 이르니 장군 막고해(莫古解)005005 막고해(莫古解) :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 때 활동한 백제의 장군으로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5 현종기(顯宗紀) 3년(487)에는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가 임나(任那)에서 삼한(三韓)의 왕이 되고자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성(爾林城)에서 죽이고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도(東道)를 막자 백제왕이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와 내두(內頭) 막고해(莫古解)를 파견해 대산(帶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막고해와 글자가 똑같다. 또, 『일본서기』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6년(246; 수정연대 366)에는 백제가 탁순국으로 파견한 사신 3인 중에 막고(莫古)라는 인물이 있으며, 권19 흠명기(欽明紀) 4년(543)에는 백제의 관료로서 덕솔 비리막고(鼻利莫古), 15년(554) 2월에는 덕솔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라는 인물이 있다. 이에 막고를 백제의 성씨 중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사례가 다양하여 단정할 수 없다(李弘稙, 1971, 「百濟人名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55~357쪽).닫기가 간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도가(道家)006006 도가(道家) : 중국 사상의 여명기인 선진시대(先秦時代)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도가는 노자(老子)가 우주 본체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도(道)와 덕(德)의 개념에서 비롯되었으나, 도가라는 이름은 전한(前漢) 때 유흠(劉歆)과 사마담(司馬談) 부자가 중국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운데 구가(九家) 또는 육가(六家)로 분류하면서 일반화되었다.닫기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007007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이 말은 『노자(老子)』 제44장에 나오는 말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절실한가(名與身孰親). 생명과 재산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身與貨孰多].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괴로운가[得與亡孰病]. 지나치게 바깥 것에 집착을 하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是故甚愛必大費], 너무 많이 재물을 쌓아 두면 결국은 그 만큼 잃게 된다[多藏必厚亡].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知足不辱], 그칠 줄 알면 위태로운 일을 당하지 않아[知止不殆]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可以長久].” 『노자』에는 전쟁을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보고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는 내용이 있지만, 부득이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경우에는 전쟁에 임하는 자세와 전쟁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전술 전략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래서 『노자』를 병법서라고 보기도 하는데, 국가는 정도(正道)로 다스려야 하지만 전쟁은 기묘한 술을 써야 한다는 이른바 기정론(奇正論)에서 병법만 떼낸 것이 『손자병법』이고 그것을 치국(治國)까지 확대하여 정치론으로 승화시킨 것이 『노자』라고 해석한다(장인성, 2017, 『한국 고대 도교』, 서경문화사, 87~88쪽).닫기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하여 꼭 많은 것을 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옳다고 여겨 멈추었다. 이에 돌을 쌓아 표시하고 그 위에 올라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그곳에 바위가 있는데, 갈라진 틈이 마치 말발굽 같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 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375)에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註 001
근구수왕(近仇首王) : 백제 제14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375~384년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56년조에는 왕자 귀수(貴須), 권19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7월에는 귀수왕(貴須王)으로 적혀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우경(右京) 제번(諸蕃) 下에는 근귀수왕(近貴首王)으로 적혀 있다.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 명문 중의 ‘백제왕세자(百濟王世△) 기생성음(奇生聖音)’의 기(奇) 또는 기생(奇生)을 근구수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6, 「百濟七支刀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23~528쪽). 근구수왕의 이름은 아버지 근초고왕처럼 할아버지의 이름 구수왕에 ‘근(近)’자를 앞에 붙여 만든 것이므로 백제왕실 내에서 초고계(肖古系)의 왕위계승을 강조한 것이라고 흔히 해석한다. 그의 이름 귀수는 ‘수(須)’로 축약되기도 하였는데, 472년경 백제가 북위로 보낸 표문(表文)에는 개로왕이 “저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해 번개처럼 달려가…”라고 한 대목이 있다(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18년(472)조 참조).
註 002
국강왕(國岡王) : 고구려 제18대 고국원왕의 무덤을 기준으로 만든 시호의 일부이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331)조에는 국강상왕(國罡上王)으로 적혀 있다. 「모두루 묘지명(牟頭婁墓誌銘)」의 ‘△岡上聖太王’과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의 ‘國岡上太王’을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국강(國岡)은 ‘나라의 언덕’이라는 뜻으로서 고국원왕의 무덤이 국내성 도읍의 언덕 모양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성이 도읍이었을 때에는 시호가 국강상왕이었으나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 시호가 고국원왕으로 바뀌었다고 해석한다(高寬敏, 1996; 임기환, 2002; 여호규, 2014).
〈참고문헌〉
高寬敏, 1996, 『三國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왕호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註 003
반걸양(半乞壤) : 본서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4년(369) 9월조에 나오는 치양과 같은 곳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이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377쪽). 같은 지명이 이처럼 다르게 적혔다는 것은 같은 사건에 대해 여러 기록이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註 004
사기(斯紀) : 4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백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사기(斯紀)의 ‘사(斯)’를 ‘사(沙)’와 통하는 것으로 보아 사씨(沙氏) 출신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근거는 없다.
註 005
막고해(莫古解) :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 때 활동한 백제의 장군으로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5 현종기(顯宗紀) 3년(487)에는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가 임나(任那)에서 삼한(三韓)의 왕이 되고자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성(爾林城)에서 죽이고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도(東道)를 막자 백제왕이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와 내두(內頭) 막고해(莫古解)를 파견해 대산(帶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막고해와 글자가 똑같다. 또, 『일본서기』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6년(246; 수정연대 366)에는 백제가 탁순국으로 파견한 사신 3인 중에 막고(莫古)라는 인물이 있으며, 권19 흠명기(欽明紀) 4년(543)에는 백제의 관료로서 덕솔 비리막고(鼻利莫古), 15년(554) 2월에는 덕솔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라는 인물이 있다. 이에 막고를 백제의 성씨 중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사례가 다양하여 단정할 수 없다(李弘稙, 1971, 「百濟人名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55~357쪽).
註 006
도가(道家) : 중국 사상의 여명기인 선진시대(先秦時代)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도가는 노자(老子)가 우주 본체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도(道)와 덕(德)의 개념에서 비롯되었으나, 도가라는 이름은 전한(前漢) 때 유흠(劉歆)과 사마담(司馬談) 부자가 중국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운데 구가(九家) 또는 육가(六家)로 분류하면서 일반화되었다.
註 007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이 말은 『노자(老子)』 제44장에 나오는 말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절실한가(名與身孰親). 생명과 재산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身與貨孰多].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괴로운가[得與亡孰病]. 지나치게 바깥 것에 집착을 하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是故甚愛必大費], 너무 많이 재물을 쌓아 두면 결국은 그 만큼 잃게 된다[多藏必厚亡].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知足不辱], 그칠 줄 알면 위태로운 일을 당하지 않아[知止不殆]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可以長久].” 『노자』에는 전쟁을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보고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는 내용이 있지만, 부득이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경우에는 전쟁에 임하는 자세와 전쟁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전술 전략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래서 『노자』를 병법서라고 보기도 하는데, 국가는 정도(正道)로 다스려야 하지만 전쟁은 기묘한 술을 써야 한다는 이른바 기정론(奇正論)에서 병법만 떼낸 것이 『손자병법』이고 그것을 치국(治國)까지 확대하여 정치론으로 승화시킨 것이 『노자』라고 해석한다(장인성, 2017, 『한국 고대 도교』, 서경문화사, 87~88쪽).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왕족>태자·태자비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왕실>국왕>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