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표문을 전하다 ( 472년 (음) )

18년, (魏)나라081081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 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로 386~534년 동안 존속했다.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한다.닫기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082082 본래는 울타리라는 뜻인데 이것이 전(轉)하여 한 지방을 진정(鎭定)하여 왕실을 수호하는 제후국을 지칭하기도 한다.닫기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冠軍將軍)083083 중국 남조 송(宋)의 경우 제3품직에 해당하였다.닫기 부마도위(駙馬都尉)084084 원래 한(漢)나라 때 설치된 직책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타던 부마(駙馬:副車의 말)를 맡아본 직책에 불과하였다. 위(魏)·진(晉) 이후에 임금의 딸과 결혼한 사람에 한하여 이 직책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 부르게 되었다.닫기 불사후(弗斯侯)085085 백제에서 왕·후제가 시행된 시기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적지 않다. 백제가 중국식 관제(官制)인 왕·후제를 시행한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는 개로왕이 472년에 여례(餘禮)를 불사후(弗斯侯)로 책봉한 기록이다. 이 사료를 근거로 하여 여례가 불사후에 책봉된 것을 왕·후제의 기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坂元義種, 「5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 《朝鮮史硏究會論文集》 4, 1968, 1968). 그러나 왕·후제는 웅진천도 후 동성왕대에 이르러 시행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그 기원을 여례의 책봉에서 구하는 논자들도 왕·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동성왕대로 보고 있다(정재윤, 「동성왕 23년 정변과 무녕왕의 집권」, 《한국사연구》 99·100합, 1999, 1999, 99쪽).닫기 장사(長史)086086 백제에 설치된 관직의 일종.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하였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에 장군의 막부(幕府)에 두어진 상층 관료이었다.닫기여례(餘禮)087087 개로왕대에 북위에 사절로 파견된 백제의 왕족이다.닫기와 용양장군(龍驤將軍)088088 북위의 경우 용양장군의 관품은 3품(品) 상(上)이고, 송나라의 경우도 3품관이었다.닫기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089089 백제가 중국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한 관부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장군의 막부에 두어진 상층 관료의 하나였다.닫기장무(張茂)090090 개로왕대에 북위에 파견된 사절이다. 장씨라는 한식성(漢式姓)을 가진 것으로 보아 중국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대방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재예(才藝)가 뛰어난 주민들은 추호(推戶)하여 이주시켰다. 이들과 그 후손 중에서 백제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은 근초고왕대의 고흥(高興), 구이신왕대의 장위(張威), 개로왕대의 장무(張茂) 등을 들 수 있다(이홍직,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닫기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제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091091 본 기사는 《論語》 里仁篇 8章의 “子曰朝聞道夕死可矣”를 改書하여 표현한 것이다.닫기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釗)092092 고구려의 고국원왕으로 백제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에 전사하였다.닫기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須)093093 백제 근구수왕의 본명이다.닫기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094094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流矢에 맞아 죽은 것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371)조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近仇須와 더불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 기사에는 근구수왕이 고국원왕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평양성 진격을 태자 근구수가 주도한 것을 반영해 준다고 할 것이다.닫기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095095 중국 5호 16국시대의 북연(北燕)을 말한다. 409년 연왕(燕王) 모용운(慕容雲)이 근신에 의해 살해되자, 한인(漢人)인 풍발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고 도읍을 용성(龍城:요녕성 조양)으로 정하였다.닫기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096096 北燕王 馮弘은 시조 馮跋의 동생으로 430년에 태자 翼을 죽이고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436년에 北魏 太武帝의 공격을 받게 되자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본 기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조 참조).닫기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097097 전쟁으로 인한 財物과 民力의 손실을 말한다. 《孫子》 作戰篇에 “其用戰也 勝久則鈍兵 挫銳攻城則力屈 久暴師則國力不足 夫鈍兵挫銳 屈力殫貨 則諸侯乘其廢而起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이라 한 기사 참조.닫기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璉)098098 고구려 장수왕의 본명.닫기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099099 이것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왕권에 대항하는 유력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닫기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100100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반영한다.닫기 또한 풍족(馮族)101101 고구려로 망명해 온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을 따라온 집단을 말한다.닫기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102102 집에서 기르는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말한다.닫기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103103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본래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 뜻이 變轉되어 고향에 歸葬하는 것을 歸正首丘라고 한다. 이 구절은 《禮記》 권7 檀弓 上에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仁也(正首丘也 [疏]…所以正首而嚮丘者 丘是狐窟穴 根本之處 雖狼狽而死 意猶嚮此丘 是有仁恩之心也)”라 한 데서 나온 것이다.닫기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104104 한(漢)나라 성기(成紀) 출신이다. 배반을 자주 하여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인물을 뜻한다.닫기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105105 중국 남조의 송나라를 말하는 데, 그 건국자가 유유(劉裕)이었다.닫기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106106 유연(柔然)이라고도 한다. 몽골 지방에 자리잡고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 중국 동진(東晉) 초기에 선비족에 예속되었다가 5세기 초에는 그 옛 땅을 차지하였으며 555년에 돌궐에 멸망하였다.닫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107107 중국의 전설상의 요 임금이 묘만(苗蠻)과 싸워 항복을 받은 곳으로 섬서성 상현(商縣)의 총령산(冢嶺山))에서 발원한다.닫기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108108 중국 제(齊)나라의 공족(公族)이며, 전국시대 말기의 ‘사군(四君)’의 한 사람이다. 진(秦)나라와 제나라 및 위(魏)나라의 재상을 역임하고 독립하여 제후가 되었다. 고사(故事) ‘계명구도(鷄鳴狗盜)’는 그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닫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109109 440년으로 백제 비유왕 14년, 고구려 장수왕 28년이다.닫기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110110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韓傳에 보이는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 ‘小石山北國’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小石山 북쪽 海中’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6, 389쪽), 이 번역문은 ‘國’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닫기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宋)나라111111 중국 춘추시대의 12열국의 하나이다닫기신주(申舟)112112 중국 전국시대의 초(楚)나라의 대부이다.닫기를 죽이니 나라113113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양자강 남쪽에 있던 나라이다. 25대 500년간 이어졌으며, 존속 기간은 기원전 704~기원전 202년이다.닫기장왕(莊王)114114 초나라의 왕으로 생몰 연대는 기원전 613~기원전 591년이다.닫기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115115 신주가 초나라 장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송나라에 상해당하였다. 이에 장왕은 극도로 분노하여 맨발로 걸어 나와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하였다는 고사(故事)를 말한다.닫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116116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이름은 위무기(魏無忌)이며, 중국 저명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平原君 趙勝),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孟嘗君田文), 초나라의 춘신군 황갈(春申君黃歇)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닫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현조(顯祖)117117 북위(北魏)의 헌문제(獻文帝)를 말하며, 재위 기간은 471~499년이다.닫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邵安)118118 백제에 사신을 파견되었으나 고구려의 방해와 풍랑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닫기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오복(五服)119119 고대 중국에서 경기(京畿) 밖의 지역을 5등급으로 나누어 이를 5복이라 하였는데,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 해당된다.닫기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120120 선군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가리키며, 옛 원한이란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전사한 사실을 말한다.닫기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申包胥)121121 중국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의 대부(大夫)이다. 초나라가 오(吳)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였다. 이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초나라를 도와 안정시켰다.닫기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楚), (越)122122 월(越)나라는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받은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다. 구천(句踐)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월나라의 위치는 현재의 절강성 소흥이며,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334년 구천의 6대손인 오강왕 때 초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닫기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 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楛矢)123123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이다.닫기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 왕 (璉)에게 조서를 보내 (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이 예전에 여경(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124124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일을 말한다.닫기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등이 모두 돌아가니,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125125 《위서(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는 “오년(五年)”으로 명시되어 있다.닫기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126126 중국의 군(郡) 이름으로, 현재의 산동성 액현(掖縣)의 치소이다.닫기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127127 璽는 天子의 도장으로 秦이래 玉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천자만 사용하였다. 唐나라에서는 寶라고 하였다. 璽書는 秦·漢 이후 封한 곳에 御印을 찍은 천자의 詔書를 말한다.닫기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128128 개로왕은 고구려가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청하였으나 북위가 응하지 않자 국교를 단절하고 말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북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김수태, 1998,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145쪽), 백제의 단교 조치는 외교전에서 패배하였음을 의미한다.닫기

註 081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 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로 386~534년 동안 존속했다.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한다.
註 082
본래는 울타리라는 뜻인데 이것이 전(轉)하여 한 지방을 진정(鎭定)하여 왕실을 수호하는 제후국을 지칭하기도 한다.
註 083
중국 남조 송(宋)의 경우 제3품직에 해당하였다.
註 084
원래 한(漢)나라 때 설치된 직책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타던 부마(駙馬:副車의 말)를 맡아본 직책에 불과하였다. 위(魏)·진(晉) 이후에 임금의 딸과 결혼한 사람에 한하여 이 직책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 부르게 되었다.
註 085
백제에서 왕·후제가 시행된 시기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적지 않다. 백제가 중국식 관제(官制)인 왕·후제를 시행한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는 개로왕이 472년에 여례(餘禮)를 불사후(弗斯侯)로 책봉한 기록이다. 이 사료를 근거로 하여 여례가 불사후에 책봉된 것을 왕·후제의 기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坂元義種, 「5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 《朝鮮史硏究會論文集》 4, 1968, 1968). 그러나 왕·후제는 웅진천도 후 동성왕대에 이르러 시행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그 기원을 여례의 책봉에서 구하는 논자들도 왕·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동성왕대로 보고 있다(정재윤, 「동성왕 23년 정변과 무녕왕의 집권」, 《한국사연구》 99·100합, 1999, 1999, 99쪽).
註 086
백제에 설치된 관직의 일종.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하였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에 장군의 막부(幕府)에 두어진 상층 관료이었다.
註 087
개로왕대에 북위에 사절로 파견된 백제의 왕족이다.
註 088
북위의 경우 용양장군의 관품은 3품(品) 상(上)이고, 송나라의 경우도 3품관이었다.
註 089
백제가 중국 관제를 모방하여 설치한 관부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장군의 막부에 두어진 상층 관료의 하나였다.
註 090
개로왕대에 북위에 파견된 사절이다. 장씨라는 한식성(漢式姓)을 가진 것으로 보아 중국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대방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재예(才藝)가 뛰어난 주민들은 추호(推戶)하여 이주시켰다. 이들과 그 후손 중에서 백제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은 근초고왕대의 고흥(高興), 구이신왕대의 장위(張威), 개로왕대의 장무(張茂) 등을 들 수 있다(이홍직, 「백제인명고」,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註 091
본 기사는 《論語》 里仁篇 8章의 “子曰朝聞道夕死可矣”를 改書하여 표현한 것이다.
註 092
고구려의 고국원왕으로 백제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에 전사하였다.
註 093
백제 근구수왕의 본명이다.
註 094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流矢에 맞아 죽은 것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371)조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近仇須와 더불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 기사에는 근구수왕이 고국원왕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평양성 진격을 태자 근구수가 주도한 것을 반영해 준다고 할 것이다.
註 095
중국 5호 16국시대의 북연(北燕)을 말한다. 409년 연왕(燕王) 모용운(慕容雲)이 근신에 의해 살해되자, 한인(漢人)인 풍발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고 도읍을 용성(龍城:요녕성 조양)으로 정하였다.
註 096
北燕王 馮弘은 시조 馮跋의 동생으로 430년에 태자 翼을 죽이고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436년에 北魏 太武帝의 공격을 받게 되자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본 기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조 참조).
註 097
전쟁으로 인한 財物과 民力의 손실을 말한다. 《孫子》 作戰篇에 “其用戰也 勝久則鈍兵 挫銳攻城則力屈 久暴師則國力不足 夫鈍兵挫銳 屈力殫貨 則諸侯乘其廢而起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이라 한 기사 참조.
註 098
고구려 장수왕의 본명.
註 099
이것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왕권에 대항하는 유력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註 100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반영한다.
註 101
고구려로 망명해 온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을 따라온 집단을 말한다.
註 102
집에서 기르는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말한다.
註 103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본래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 뜻이 變轉되어 고향에 歸葬하는 것을 歸正首丘라고 한다. 이 구절은 《禮記》 권7 檀弓 上에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仁也(正首丘也 [疏]…所以正首而嚮丘者 丘是狐窟穴 根本之處 雖狼狽而死 意猶嚮此丘 是有仁恩之心也)”라 한 데서 나온 것이다.
註 104
한(漢)나라 성기(成紀) 출신이다. 배반을 자주 하여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인물을 뜻한다.
註 105
중국 남조의 송나라를 말하는 데, 그 건국자가 유유(劉裕)이었다.
註 106
유연(柔然)이라고도 한다. 몽골 지방에 자리잡고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 중국 동진(東晉) 초기에 선비족에 예속되었다가 5세기 초에는 그 옛 땅을 차지하였으며 555년에 돌궐에 멸망하였다.
註 107
중국의 전설상의 요 임금이 묘만(苗蠻)과 싸워 항복을 받은 곳으로 섬서성 상현(商縣)의 총령산(冢嶺山))에서 발원한다.
註 108
중국 제(齊)나라의 공족(公族)이며, 전국시대 말기의 ‘사군(四君)’의 한 사람이다. 진(秦)나라와 제나라 및 위(魏)나라의 재상을 역임하고 독립하여 제후가 되었다. 고사(故事) ‘계명구도(鷄鳴狗盜)’는 그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註 109
440년으로 백제 비유왕 14년, 고구려 장수왕 28년이다.
註 110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韓傳에 보이는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 ‘小石山北國’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小石山 북쪽 海中’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6, 389쪽), 이 번역문은 ‘國’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註 111
중국 춘추시대의 12열국의 하나이다
註 112
중국 전국시대의 초(楚)나라의 대부이다.
註 113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양자강 남쪽에 있던 나라이다. 25대 500년간 이어졌으며, 존속 기간은 기원전 704~기원전 202년이다.
註 114
초나라의 왕으로 생몰 연대는 기원전 613~기원전 591년이다.
註 115
신주가 초나라 장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송나라에 상해당하였다. 이에 장왕은 극도로 분노하여 맨발로 걸어 나와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하였다는 고사(故事)를 말한다.
註 116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이름은 위무기(魏無忌)이며, 중국 저명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平原君 趙勝),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孟嘗君田文), 초나라의 춘신군 황갈(春申君黃歇)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註 117
북위(北魏)의 헌문제(獻文帝)를 말하며, 재위 기간은 471~499년이다.
註 118
백제에 사신을 파견되었으나 고구려의 방해와 풍랑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註 119
고대 중국에서 경기(京畿) 밖의 지역을 5등급으로 나누어 이를 5복이라 하였는데,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 해당된다.
註 120
선군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가리키며, 옛 원한이란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전사한 사실을 말한다.
註 121
중국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의 대부(大夫)이다. 초나라가 오(吳)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였다. 이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초나라를 도와 안정시켰다.
註 122
월(越)나라는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받은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다. 구천(句踐)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월나라의 위치는 현재의 절강성 소흥이며,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334년 구천의 6대손인 오강왕 때 초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註 123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이다.
註 124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일을 말한다.
註 125
《위서(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는 “오년(五年)”으로 명시되어 있다.
註 126
중국의 군(郡) 이름으로, 현재의 산동성 액현(掖縣)의 치소이다.
註 127
璽는 天子의 도장으로 秦이래 玉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천자만 사용하였다. 唐나라에서는 寶라고 하였다. 璽書는 秦·漢 이후 封한 곳에 御印을 찍은 천자의 詔書를 말한다.
註 128
개로왕은 고구려가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청하였으나 북위가 응하지 않자 국교를 단절하고 말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북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였는데(김수태, 1998, 「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145쪽), 백제의 단교 조치는 외교전에서 패배하였음을 의미한다.
주제분류
정치>외교>문서>내용
정치>외교>사신>사절활동
정치>외교>절교>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