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 475년 09월(음) )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001001 고구려왕 …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에 대해서는 474년으로 기록한 자료(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7년(474) 가을 7월조), 476년으로 기록한 자료(『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개로왕 을묘년 겨울 박(고구려) 대군이 와 칠일 밤낮을 공격하여 왕성을 함락시켰다’라고 하여 을묘년[(乙卯年, 개로왕 21년(475)]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475년이 가장 타당하다. 다음으로 발생 달의 경우도 7월과 겨울이 있긴 하지만 전쟁의 당사자인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이 9월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9월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닫기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002002 불을 놓아 성문을 태웠다 : 실제 1997년 현대리버빌 발굴조사에서 19개 건 물터가 화재로 일시에 폐기된 현장이 드러났으며(이형구, 1997), 2004년 조사된 미래마을에서도 역시 불탄 자국들의 흔적이 확인되어(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참고문헌〉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百濟文化開發硏究院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닫기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군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고 백제에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003003 도림(道琳) : 고구려의 승려이다. 장수왕이 보낸 첩자로 백제에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를 이용하여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개로왕을 설득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여 국력을 소진하게 하여 장수왕이 백제를 쳐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는 데 공을 세웠다. 도림의 파견 시기는 개로왕 즉위 초로 보는 견해(梁起錫, 122쪽)와 개로왕 18년 이후로 보는 견해(金壽泰, 236쪽)로 나뉜다.
〈참고문헌〉
梁起錫, 1990,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壽泰, 2000, 「百濟 蓋鹵王代의 對高句麗戰」, 『百濟史上의 戰爭』, 서경문화사
닫기
이 응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승이 아직 도(道)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은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시키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몰래 보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가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왕 근개루(近蓋婁)004004 근개루(近蓋婁) :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455)조 세주에 왕의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근개루’는 ‘개루’에 ‘근(근)’자를 붙여 만든 이름으로 보인다.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처럼 개루왕과 근개루왕(개로왕)의 친연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닫기는 장기와 바둑[博奕]005005 장기와 바둑[博奕] : 박(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대국하는 놀이를 말한다. 국희(局戱)라고도 한다. 혁(奕)은 ‘위기(圍棊)’로 바둑을 의미한다. 당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한(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국희(局戱)의 하나이다. 바둑에 관한 기사로는 본서 권48 열전8 도미전(都彌傳)에 개루왕이 도미와 더불어 바둑을 두어서 이겼다는 기록과 『주서(周書)』 권49 백제전에 “투호(投壺)와 저포(樗蒲) 등 잡다한 놀이가 있으며, 장기와 바둑을 더욱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다.닫기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매우 두텁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한 가지 기술만 바쳤을 뿐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라건대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풀어주신 험한 요새이지 사람이 만든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단지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뿐이며 〔다른〕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많은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하건만, 성곽이 수리되지 않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이 맨땅에 임시로 묻혀있고006006 선왕의 … 묻혀있고 : 이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비유왕의 죽음이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는 점 즉, 정변과 관련시키기도 한다(李道學, 1985,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 『韓國史硏究』 50·51, 3~4쪽). 하지만 개로왕이 즉위한 후 2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 방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강의 수재로 인해 능묘가 드러날 정도로 훼손되었을 가능성 혹은 장례문화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닫기 백성의 집들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니 신은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맞소! 내가 장차 그리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007007 흙을 쪄서 성을 쌓고 : 이 기사를 통해 한성도읍기의 성이 토성이었음은 확인된다. 흙을 쪄서 성을 쌓은 예로서는 중국의 경우 『진서(晉書)』 권130 혁련발발전(赫連勃勃傳)에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나오고, 실제 혁련발발이 쌓은 통만성(統萬城)의 조사에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門田誠一, 155쪽). 이에 따라 이를 풍납토성의 증축으로 연결시키는 견해(申熙權, 2002)도 있다. 반면에 풍납토성은 판축(서울大學校 考古人類學科, 1967)이기 때문에 이와 다르다는 입장(심광주, 74~80쪽)도 상존한다.
〈참고문헌〉
서울大學校 考古人類學科, 1967,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申熙權, 2002, 「風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鄕土서울』 62,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門田誠一, 2002, 「三國史記 百濟本紀所在の築城用語に對する釋義-〈蒸土〉をめぐって-」, 『鷹陵史學』 28, 鷹陵史學會
심광주, 2010, 「漢城百濟의 ‘烝土築城’에 대한 硏究」, 『鄕土서울』 76,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닫기
그 안에 궁궐과 누각과 전망대와 건물008008 전망대와 건물 : 대(臺)는 흙을 높이 쌓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고, 사(榭)는 목조로 집을 지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전망대와 건물로 해석된다.닫기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009009 욱리하(郁里河) : 지금의 한강을 말한다. 이외에도 한강, 한수라는 표기도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되어 있다.닫기에서 큰 돌을 가져다 덧널[槨]010010 큰 돌을 가져다 덧널[槨] : 본 기사에 보이는 ‘큰 돌을 가져다 덧널을 만든’ 무덤을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보아 석촌동 4호분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179쪽). 다만 개로왕이 이때 개장한 무덤이 기단식 돌무지무덤인지, 굴식돌방무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 한성시대의 묘제는 크게 널무덤[土壙墓]계 묘제, 돌무지무덤계 묘제, 복합묘제(複合墓制)로 나누어진다. 돌무지무덤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큰 돌로 단을 쌓아 만들었다.닫기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011011 사성(蛇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1 책계왕 즉위년(286)조에 사성을 수리한 기사가 나오므로 본 성의 초축 시기는 백제 초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성은 본서의 내용처럼 제방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강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 혹은 당시 고구려에 대한 방어용 성곽(孔錫龜, 1993), 나성으로 보는 견해(余昊奎, 9~10쪽)가 있다. 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蛇’의 훈 ‘뱀’과 풍납동의 ‘풍납’이 본래는 ‘바람들이’인데 이것이 ‘배암들이’로 음이 전환된 것으로 보아 풍납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498~506쪽)가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이곳이 백제 왕성임이 밝혀져 이 견해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이외에 사성의 위치를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의 龜山토성으로 보는 견해(方東仁, 67~69쪽)가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백제 시가지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성립하기 어렵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토성으로 보는 견해(李道學, 280~285쪽)는 사성을 축조한 목적을 고려하면 도성 관련 유적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
〈참고문헌〉
方東仁, 1974, 「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 16
李丙燾,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孔錫龜, 1993, 「百濟城郭의 類型과 築造技法」, 『大田의 城郭』, 大田直轄市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余昊奎, 2002, 「漢城時代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 『百濟硏究』 36
닫기
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012012 숭산(崇山) : 본서 권37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동남방의 검단산(黔丹山)에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393쪽)와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鄭求福 外, 721쪽 주 147)가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鄭求福 外, 1997, 『譯註 三國史記』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닫기
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가 아뢰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차 백제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었다. 근개루가 그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013013 아들 문주(文周) : 문주왕은 본서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된 점(『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 겨울조), 본서가 후왕을 선왕의 아들로 표기하고 있는 점, 『일본서기』에서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는 점((『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479))을 고려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同)모제(母弟)라고 한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477) 3월조의 기사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닫기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어 이 지경이 되었다. 백성이 쇠잔하고 군사가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느냐.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014014 사직(社稷) : 원문의 사(社)는 본래 토지의 주신(主神)이고 직(稷)은 곡신(穀神)이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의 존속과 같이 하였으므로 전하여 국가(왕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닫기에서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015015 목협만치(木劦滿致) : 백제 개로왕 때 활약한 귀족인 목씨 가문으로 문주왕의 측근이다. 목협만치는 구이신왕대 국정을 농단한 목만치(木滿致)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김현구 외, 177~178쪽)와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盧重國, 139쪽)가 있다. 또한 목협만치가 웅진 천도 후 왜국으로 건너가 소아씨(蘇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본 견해(門脇禎二, 52~54쪽)도 있다. 목협만치는 웅진 천도 후 기록에 보이지 않고, 해구가 전횡을 하였기 때문에 실각하였다고 보인다.
〈참고문헌〉
門脇禎二, 1987, 『飛鳥—その古代史と風土』, 日本放送出版協會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연구(1)』, 일지사
닫기
조미걸취(祖彌桀取)016016 조미걸취(祖彌桀取) : 문주왕을 목협만치와 함께 모시고 남행한 백제의 귀족이다. 문주왕의 측근으로 보이나 목협만치와 같이 문주왕 즉위 이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닫기 목협017017 목협(木劦) : 백제 귀족의 성(姓)으로 복성(複姓)이다. 목협씨는 『수서(隋書)』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로 거론된 목씨(木氏)와 협씨(劦氏)를 목협씨(木劦氏)의 분지화(分枝化)를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또한 ‘木刕不麻甲背’(『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기(繼體紀) 10년(516) 5월조), ‘木刕今敦’(『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13년(522) 5월조) 등 ‘木刕’를 성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 점에 주목하여 ‘劦’과 ‘刕’는 자형이 유사하고, ‘刕’와 ‘羅’는 음운이 상통하므로 ‘木劦’·‘木刕’·‘木羅’는 동일 실체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盧重國, 1994)가 있다. 목협씨의 출자로는 직산설(盧重國, 1994, 6~9쪽), 가야계 귀화인설(鄭載潤, 50·58쪽), 공주설(김수태, 33쪽)이 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 『大丘史學』 48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西江大學校 博士學位論文
김수태, 2004, 「백제의 천도」, 『韓國古代史硏究』 36
닫기
과 조미018018 조미(祖彌) : 백제 귀족의 성으로 복성이다. 조미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기(繼體紀) 7년(513)조에 나오는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의 ‘저미(姐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제서(南齊書)』 권58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의 ‘저(姐)’는 저미(姐彌)의 ‘미(彌)’를 생략하여 단성화(單姓化)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弘稙, 351쪽). 또한 ‘조미(祖彌)’·‘저미(姐彌)’를 ‘차미’로 읽고 이를 진(眞)의 훈(訓) ‘참’과 관련시켜 진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今西龍, 297~298쪽)도 있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닫기
는 모두 복성(複姓)019019 복성(複姓) : 성이 두 자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단성(單姓)이나 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복성이 대부분이다[ 『위서(魏書)』 권113 관씨지(官氏志) 참조]. 백제의 성도 왕실의 성인 부여씨나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택씨 등에서 보듯이 복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면서 단성제(單姓制)를 사용하게 되었다. 부여씨가 여씨(餘氏)로, 사택씨가 사씨(沙氏)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고구려에서도 을지문덕의 ‘을지’처럼 복성이 보인다.닫기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木劦)을 두 개의 성020020 두 개의 성 : 목협(木劦)을 목씨(木氏)와 협씨(劦氏)로 나누어 본 것을 말한다. 이 목씨와 협씨는 『수서(隋書)』 권81 백제전에는 각각 백제의 대성팔족[사씨(沙氏)·연씨(燕氏)·해씨(解氏)·협씨(劦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의 하나로 나온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목협(木劦)’이 ‘목리(木刕)’로 표기되기도 한다.닫기이라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021021 대로(對盧) : 고구려의 관명(官名)이다. 대로의 명칭은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권30 고구려전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에 의하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라 하여 패자(沛者)와 대응된다. 패자와 대로의 성격에 대해 패자는 고구려 초기 나부(那部)의 최고 유력자에게 주어진 관등이고, 대로는 방위부(方位部)의 유력한 대가(大加)에게 주어진 관등으로 추정하는 견해(林起煥, 1995, 「高句麗 集權體制의 成立過程 硏究」, 慶熙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6~69쪽)도 있다. 후에 대로는 대대로(大對盧)로 격상되어 최고귀족회의체의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닫기제우(齊于)022022 제우(齊牛) : 본서에만 보이며,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대로의 관등을 가진 것으로 보아 백제를 공격한 부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닫기·재증걸루(再曾桀婁)023023 재증걸루(再曾桀婁) : 백제에서 개로왕 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던 장수이다.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이만년과 함께 고구려군의 선봉에 선 장수임을 고려하면 백제의 고위 장수였을 것이다. 고이가 복성임을 볼 때 재증이 성이며, 걸루가 이름으로 추정된다.닫기·고이만년(古尒萬年)024024 고이만년(古尒萬年) : 재증걸루와 함께 개로왕 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 장수이다. 역시 이후 행적은 보이지 않으며, 재증걸루처럼 백제의 고위 장수였을 것이다. 실제 왕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면 왕의 측근에서 활약을 하였던 장수로 추정된다.닫기 재증과 고이025025 고이(古尒) : 백제 복성의 하나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5 현종기(顯宗紀) 3년(487)에 ‘고이해(古爾解)’가 보이는데 ‘尒’와 ‘爾’는 상통하는 자이다. 따라서 고이해의 ‘고이(古爾)’도 복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고이’를 고이왕의 왕명을 딴 복성으로 보는 견해(오택현, 2020, 「百濟 姓氏의 歷史的 展開와 大姓八族」, 東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2~65쪽)도 있으나 동의하기 힘들다.닫기는 모두 두 글자로 된 성이다.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026026 북성(北城) : 이병도는 북성은 한수 이북의 구위례성(舊慰禮城), 남성은 한성(하남위례성)으로 보았다(李丙燾, 491쪽). 북한 학계는 고구려군이 먼저 북한성(오늘날의 서울)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남한성(경기도 광주지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51쪽). 그러나 최근 발굴성과를 고려하면 북쪽에 있는 풍납토성이 북성, 남쪽에 있는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보고, 양자를 합하여 한성이라 보는 견해(金起燮, 59쪽)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起燮, 1990, 「百濟前期 都城에 關한 一考察」, 『淸溪史學』 7, 청계사학회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1, 『조선전사3-고구려사』
닫기
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南城)027027 남성(南城) : 남쪽에 위치한 몽촌토성을 지칭한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발굴을 하여(서울大學校 博物館, 1987; 1988; 1989) 왕성임이 밝혀졌으며, 최근 다시 발굴이 재개되어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유적이 중첩되는 중요한 거점이었음이 확인(한성백제박물관, 2016a; 2016b)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7, 『夢村土城-東北地區發掘報告書』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8, 『夢村土城-東南地區發掘報告書』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9, 『夢村土城-西南地區發掘報告書』
한성백제박물관, 2016a, 『夢村土城Ⅰ-한성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1』
한성백제박물관, 2016b, 『夢村土城Ⅱ-한성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2』
닫기
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028028 북성(北城)을 … 두려워하였다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에는 고구려가 대성(大城)을 공격하였고, 이후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순서를 적용하면 북성인 풍납토성이 대성, 남성인 몽촌토성이 왕성이라 할 수 있다(金起燮, 60~65쪽; 朴淳發, 174쪽). 실제 개로왕이 남성에 있다 피난가려 했다는 점에서 나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유적의 규모와 양에서 압도하여 평상시에 거주한 왕성으로 보아야 하며, 몽촌토성은 구릉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면서 피난 왕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성이 북성과 남성의 2중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 대성은 커다란 성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왕성의 이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鄭載潤, 292~293쪽).
〈참고문헌〉
金起燮, 1990, 「百濟前期 都城에 關한 一考察」, 『淸溪史學』 7, 청계사학회
朴淳發, 2001, 『漢城百濟의 誕生』, 서경문화사
鄭載潤, 2003, 「475년 漢城戰鬪의 軍事戰略과 戰爭史的 意味」, 『軍史』 50
닫기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029029 아차성(阿且城)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의 아차산성을 말한다. 본서 권24 백제본기2 책계왕 즉위년(286)조 참조.닫기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030030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 도망했었다 : 이들은 전제왕권이 확립된 469년 이후 대토목 공사에 반대하다 망명한 것으로 보거나(金壽泰, 238~240쪽)와 개로왕이 즉위할 때 정변과 관련하여 망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139쪽; 梁起錫, 121~123쪽)가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梁起錫, 1990,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壽泰, 2000, 「百濟 蓋鹵王代의 對高句麗戰」, 『百濟史上의 戰爭』, 서경문화사
닫기

註 001
고구려왕 … 포위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조에 나온다. 그런데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에 대해서는 474년으로 기록한 자료(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7년(474) 가을 7월조), 476년으로 기록한 자료(『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개로왕 을묘년 겨울 박(고구려) 대군이 와 칠일 밤낮을 공격하여 왕성을 함락시켰다’라고 하여 을묘년[(乙卯年, 개로왕 21년(475)]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475년이 가장 타당하다. 다음으로 발생 달의 경우도 7월과 겨울이 있긴 하지만 전쟁의 당사자인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이 9월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9월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註 002
불을 놓아 성문을 태웠다 : 실제 1997년 현대리버빌 발굴조사에서 19개 건 물터가 화재로 일시에 폐기된 현장이 드러났으며(이형구, 1997), 2004년 조사된 미래마을에서도 역시 불탄 자국들의 흔적이 확인되어(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참고문헌〉
이형구, 1997,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실측조사연구』, 百濟文化開發硏究院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풍납토성 Ⅺ』
註 003
도림(道琳) : 고구려의 승려이다. 장수왕이 보낸 첩자로 백제에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를 이용하여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개로왕을 설득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도록 하여 국력을 소진하게 하여 장수왕이 백제를 쳐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는 데 공을 세웠다. 도림의 파견 시기는 개로왕 즉위 초로 보는 견해(梁起錫, 122쪽)와 개로왕 18년 이후로 보는 견해(金壽泰, 236쪽)로 나뉜다.
〈참고문헌〉
梁起錫, 1990,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壽泰, 2000, 「百濟 蓋鹵王代의 對高句麗戰」, 『百濟史上의 戰爭』, 서경문화사
註 004
근개루(近蓋婁) :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455)조 세주에 왕의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근개루’는 ‘개루’에 ‘근(근)’자를 붙여 만든 이름으로 보인다.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처럼 개루왕과 근개루왕(개로왕)의 친연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註 005
장기와 바둑[博奕] : 박(博)은 장기와 바둑, 고누 등 대국하는 놀이를 말한다. 국희(局戱)라고도 한다. 혁(奕)은 ‘위기(圍棊)’로 바둑을 의미한다. 당나라 이전의 바둑은 가로·세로 17줄에 289점이었고, 현재는 가로·세로 19줄에 361점이다. 장기는 한(漢)나라 이후의 놀이로서 국희(局戱)의 하나이다. 바둑에 관한 기사로는 본서 권48 열전8 도미전(都彌傳)에 개루왕이 도미와 더불어 바둑을 두어서 이겼다는 기록과 『주서(周書)』 권49 백제전에 “투호(投壺)와 저포(樗蒲) 등 잡다한 놀이가 있으며, 장기와 바둑을 더욱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다.
註 006
선왕의 … 묻혀있고 : 이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비유왕의 죽음이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는 점 즉, 정변과 관련시키기도 한다(李道學, 1985,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 『韓國史硏究』 50·51, 3~4쪽). 하지만 개로왕이 즉위한 후 2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 방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강의 수재로 인해 능묘가 드러날 정도로 훼손되었을 가능성 혹은 장례문화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註 007
흙을 쪄서 성을 쌓고 : 이 기사를 통해 한성도읍기의 성이 토성이었음은 확인된다. 흙을 쪄서 성을 쌓은 예로서는 중국의 경우 『진서(晉書)』 권130 혁련발발전(赫連勃勃傳)에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나오고, 실제 혁련발발이 쌓은 통만성(統萬城)의 조사에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門田誠一, 155쪽). 이에 따라 이를 풍납토성의 증축으로 연결시키는 견해(申熙權, 2002)도 있다. 반면에 풍납토성은 판축(서울大學校 考古人類學科, 1967)이기 때문에 이와 다르다는 입장(심광주, 74~80쪽)도 상존한다.
〈참고문헌〉
서울大學校 考古人類學科, 1967,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
申熙權, 2002, 「風納土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南慰禮城 고찰」, 『鄕土서울』 62,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門田誠一, 2002, 「三國史記 百濟本紀所在の築城用語に對する釋義-〈蒸土〉をめぐって-」, 『鷹陵史學』 28, 鷹陵史學會
심광주, 2010, 「漢城百濟의 ‘烝土築城’에 대한 硏究」, 『鄕土서울』 76,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註 008
전망대와 건물 : 대(臺)는 흙을 높이 쌓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고, 사(榭)는 목조로 집을 지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전망대와 건물로 해석된다.
註 009
욱리하(郁里河) : 지금의 한강을 말한다. 이외에도 한강, 한수라는 표기도 보인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되어 있다.
註 010
큰 돌을 가져다 덧널[槨] : 본 기사에 보이는 ‘큰 돌을 가져다 덧널을 만든’ 무덤을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보아 석촌동 4호분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179쪽). 다만 개로왕이 이때 개장한 무덤이 기단식 돌무지무덤인지, 굴식돌방무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 한성시대의 묘제는 크게 널무덤[土壙墓]계 묘제, 돌무지무덤계 묘제, 복합묘제(複合墓制)로 나누어진다. 돌무지무덤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큰 돌로 단을 쌓아 만들었다.
註 011
사성(蛇城) : 본서 권23 백제본기1 책계왕 즉위년(286)조에 사성을 수리한 기사가 나오므로 본 성의 초축 시기는 백제 초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성은 본서의 내용처럼 제방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강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 혹은 당시 고구려에 대한 방어용 성곽(孔錫龜, 1993), 나성으로 보는 견해(余昊奎, 9~10쪽)가 있다. 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蛇’의 훈 ‘뱀’과 풍납동의 ‘풍납’이 본래는 ‘바람들이’인데 이것이 ‘배암들이’로 음이 전환된 것으로 보아 풍납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498~506쪽)가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이곳이 백제 왕성임이 밝혀져 이 견해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이외에 사성의 위치를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의 龜山토성으로 보는 견해(方東仁, 67~69쪽)가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백제 시가지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성립하기 어렵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토성으로 보는 견해(李道學, 280~285쪽)는 사성을 축조한 목적을 고려하면 도성 관련 유적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
〈참고문헌〉
方東仁, 1974, 「納里土城의 歷史地理的 檢討」, 『白山學報』 16
李丙燾,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孔錫龜, 1993, 「百濟城郭의 類型과 築造技法」, 『大田의 城郭』, 大田直轄市
李道學,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余昊奎, 2002, 「漢城時代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 『百濟硏究』 36
註 012
숭산(崇山) : 본서 권37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동남방의 검단산(黔丹山)에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393쪽)와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鄭求福 外, 721쪽 주 147)가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鄭求福 外, 1997, 『譯註 三國史記』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013
아들 문주(文周) : 문주왕은 본서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된 점(『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 겨울조), 본서가 후왕을 선왕의 아들로 표기하고 있는 점, 『일본서기』에서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는 점((『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479))을 고려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同)모제(母弟)라고 한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477) 3월조의 기사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註 014
사직(社稷) : 원문의 사(社)는 본래 토지의 주신(主神)이고 직(稷)은 곡신(穀神)이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의 존속과 같이 하였으므로 전하여 국가(왕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註 015
목협만치(木劦滿致) : 백제 개로왕 때 활약한 귀족인 목씨 가문으로 문주왕의 측근이다. 목협만치는 구이신왕대 국정을 농단한 목만치(木滿致)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김현구 외, 177~178쪽)와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盧重國, 139쪽)가 있다. 또한 목협만치가 웅진 천도 후 왜국으로 건너가 소아씨(蘇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본 견해(門脇禎二, 52~54쪽)도 있다. 목협만치는 웅진 천도 후 기록에 보이지 않고, 해구가 전횡을 하였기 때문에 실각하였다고 보인다.
〈참고문헌〉
門脇禎二, 1987, 『飛鳥—その古代史と風土』, 日本放送出版協會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연구(1)』, 일지사
註 016
조미걸취(祖彌桀取) : 문주왕을 목협만치와 함께 모시고 남행한 백제의 귀족이다. 문주왕의 측근으로 보이나 목협만치와 같이 문주왕 즉위 이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註 017
목협(木劦) : 백제 귀족의 성(姓)으로 복성(複姓)이다. 목협씨는 『수서(隋書)』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로 거론된 목씨(木氏)와 협씨(劦氏)를 목협씨(木劦氏)의 분지화(分枝化)를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또한 ‘木刕不麻甲背’(『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기(繼體紀) 10년(516) 5월조), ‘木刕今敦’(『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13년(522) 5월조) 등 ‘木刕’를 성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 점에 주목하여 ‘劦’과 ‘刕’는 자형이 유사하고, ‘刕’와 ‘羅’는 음운이 상통하므로 ‘木劦’·‘木刕’·‘木羅’는 동일 실체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盧重國, 1994)가 있다. 목협씨의 출자로는 직산설(盧重國, 1994, 6~9쪽), 가야계 귀화인설(鄭載潤, 50·58쪽), 공주설(김수태, 33쪽)이 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 『大丘史學』 48
鄭載潤, 1999,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西江大學校 博士學位論文
김수태, 2004, 「백제의 천도」, 『韓國古代史硏究』 36
註 018
조미(祖彌) : 백제 귀족의 성으로 복성이다. 조미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7 계체기(繼體紀) 7년(513)조에 나오는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의 ‘저미(姐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제서(南齊書)』 권58 백제전에 보이는 저근(姐瑾)의 ‘저(姐)’는 저미(姐彌)의 ‘미(彌)’를 생략하여 단성화(單姓化)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弘稙, 351쪽). 또한 ‘조미(祖彌)’·‘저미(姐彌)’를 ‘차미’로 읽고 이를 진(眞)의 훈(訓) ‘참’과 관련시켜 진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今西龍, 297~298쪽)도 있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李弘稙,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註 019
복성(複姓) : 성이 두 자 이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단성(單姓)이나 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복성이 대부분이다[ 『위서(魏書)』 권113 관씨지(官氏志) 참조]. 백제의 성도 왕실의 성인 부여씨나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택씨 등에서 보듯이 복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면서 단성제(單姓制)를 사용하게 되었다. 부여씨가 여씨(餘氏)로, 사택씨가 사씨(沙氏)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고구려에서도 을지문덕의 ‘을지’처럼 복성이 보인다.
註 020
두 개의 성 : 목협(木劦)을 목씨(木氏)와 협씨(劦氏)로 나누어 본 것을 말한다. 이 목씨와 협씨는 『수서(隋書)』 권81 백제전에는 각각 백제의 대성팔족[사씨(沙氏)·연씨(燕氏)·해씨(解氏)·협씨(劦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의 하나로 나온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목협(木劦)’이 ‘목리(木刕)’로 표기되기도 한다.
註 021
대로(對盧) : 고구려의 관명(官名)이다. 대로의 명칭은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권30 고구려전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에 의하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라 하여 패자(沛者)와 대응된다. 패자와 대로의 성격에 대해 패자는 고구려 초기 나부(那部)의 최고 유력자에게 주어진 관등이고, 대로는 방위부(方位部)의 유력한 대가(大加)에게 주어진 관등으로 추정하는 견해(林起煥, 1995, 「高句麗 集權體制의 成立過程 硏究」, 慶熙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6~69쪽)도 있다. 후에 대로는 대대로(大對盧)로 격상되어 최고귀족회의체의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註 022
제우(齊牛) : 본서에만 보이며,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대로의 관등을 가진 것으로 보아 백제를 공격한 부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註 023
재증걸루(再曾桀婁) : 백제에서 개로왕 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던 장수이다.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이만년과 함께 고구려군의 선봉에 선 장수임을 고려하면 백제의 고위 장수였을 것이다. 고이가 복성임을 볼 때 재증이 성이며, 걸루가 이름으로 추정된다.
註 024
고이만년(古尒萬年) : 재증걸루와 함께 개로왕 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 장수이다. 역시 이후 행적은 보이지 않으며, 재증걸루처럼 백제의 고위 장수였을 것이다. 실제 왕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면 왕의 측근에서 활약을 하였던 장수로 추정된다.
註 025
고이(古尒) : 백제 복성의 하나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5 현종기(顯宗紀) 3년(487)에 ‘고이해(古爾解)’가 보이는데 ‘尒’와 ‘爾’는 상통하는 자이다. 따라서 고이해의 ‘고이(古爾)’도 복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고이’를 고이왕의 왕명을 딴 복성으로 보는 견해(오택현, 2020, 「百濟 姓氏의 歷史的 展開와 大姓八族」, 東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62~65쪽)도 있으나 동의하기 힘들다.
註 026
북성(北城) : 이병도는 북성은 한수 이북의 구위례성(舊慰禮城), 남성은 한성(하남위례성)으로 보았다(李丙燾, 491쪽). 북한 학계는 고구려군이 먼저 북한성(오늘날의 서울)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남한성(경기도 광주지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51쪽). 그러나 최근 발굴성과를 고려하면 북쪽에 있는 풍납토성이 북성, 남쪽에 있는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보고, 양자를 합하여 한성이라 보는 견해(金起燮, 59쪽)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百濟의 蛇城에 대하여」,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起燮, 1990, 「百濟前期 都城에 關한 一考察」, 『淸溪史學』 7, 청계사학회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1, 『조선전사3-고구려사』
註 027
남성(南城) : 남쪽에 위치한 몽촌토성을 지칭한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발굴을 하여(서울大學校 博物館, 1987; 1988; 1989) 왕성임이 밝혀졌으며, 최근 다시 발굴이 재개되어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유적이 중첩되는 중요한 거점이었음이 확인(한성백제박물관, 2016a; 2016b)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7, 『夢村土城-東北地區發掘報告書』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8, 『夢村土城-東南地區發掘報告書』
서울大學校 博物館, 1989, 『夢村土城-西南地區發掘報告書』
한성백제박물관, 2016a, 『夢村土城Ⅰ-한성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1』
한성백제박물관, 2016b, 『夢村土城Ⅱ-한성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2』
註 028
북성(北城)을 … 두려워하였다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기(雄略紀) 20년(476)에는 고구려가 대성(大城)을 공격하였고, 이후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순서를 적용하면 북성인 풍납토성이 대성, 남성인 몽촌토성이 왕성이라 할 수 있다(金起燮, 60~65쪽; 朴淳發, 174쪽). 실제 개로왕이 남성에 있다 피난가려 했다는 점에서 나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유적의 규모와 양에서 압도하여 평상시에 거주한 왕성으로 보아야 하며, 몽촌토성은 구릉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면서 피난 왕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성이 북성과 남성의 2중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 대성은 커다란 성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왕성의 이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鄭載潤, 292~293쪽).
〈참고문헌〉
金起燮, 1990, 「百濟前期 都城에 關한 一考察」, 『淸溪史學』 7, 청계사학회
朴淳發, 2001, 『漢城百濟의 誕生』, 서경문화사
鄭載潤, 2003, 「475년 漢城戰鬪의 軍事戰略과 戰爭史的 意味」, 『軍史』 50
註 029
아차성(阿且城)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의 아차산성을 말한다. 본서 권24 백제본기2 책계왕 즉위년(286)조 참조.
註 030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 도망했었다 : 이들은 전제왕권이 확립된 469년 이후 대토목 공사에 반대하다 망명한 것으로 보거나(金壽泰, 238~240쪽)와 개로왕이 즉위할 때 정변과 관련하여 망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139쪽; 梁起錫, 121~123쪽)가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梁起錫, 1990,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壽泰, 2000, 「百濟 蓋鹵王代의 對高句麗戰」, 『百濟史上의 戰爭』, 서경문화사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