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한주(漢州)001001 신라본기에서는 진흥왕 및 진평왕(眞平王)이 설치한 주(州)가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기록되어 있지만,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한성군주(漢城軍主)의 이름이 보이므로, 현재 하남시 및 광주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0쪽 및 232~233쪽).닫기는 본래 고구려(高句麗)002002 기원전 37년 ~ 668년까지 한반도 북쪽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낳은 주몽(朱夢)이 나라를 세웠다. 건국 초기부터 중국(中國) 및 북방 이민족들과의 잦은 마찰을 통해 성장하여 요동 일대를 영역으로 두었다. 중간에 백제(百濟)와의 마찰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기도 했지만,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면서 한반도 남부 일대로 국력을 집중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공략하여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475). 고구려의 영역 확장은 중국 영토 내에 서로 다른 왕조들의 대립을 통해 가능했으며, 실제로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왕조의 침입을 계속 받게 되었다. 계속된 침입의 와중에 고구려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이 당(唐)에 귀순하면서 보장왕(寶藏王) 27년(668)에 수도 평양성(平壤城)이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된다(고구려본기 및 역주 김동윤).닫기한산군(漢山郡)003003 백제본기에서 온조왕(溫祚王) 13년(기원전 6)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를 옮긴 지역이자,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옮긴 수도 한산(漢山)이 이곳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3쪽).닫기이었는데 신라(新羅)004004 기원전 57년 ~955년까지 한반도 경주(慶州)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혁거세(赫居世)가 왕이 되면서 경북 경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세워졌다. 당(唐)과 연합하여 무열왕(武烈王) 7년(66)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면서 백제(百濟)가 멸망했고 이어서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당(唐)의 군대를 문무왕 16년(676)에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골품제(骨品制)를 중심으로 한 고유의 신분제도를 끝까지 유지하다가 진성왕(眞誠王) 3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난 이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자립하면서 주요 세력이 상실당하고 점차 쇠약해져서 경순왕(敬順王) 9년(955)에 고려(高麗)에게 항복한다(신라본기 및 역주 김동윤).닫기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005005 신라 35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명은 헌영(憲英).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로 경덕왕(景德王)은 효성왕(孝成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비(妃)는 이찬(伊飡) 순정(順貞)의 딸이다. 경덕왕은 귀족 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회복을 목표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펼쳐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의 고유 지명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신라본기, 제9 경덕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한주(漢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광주(廣州)006006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하남시(河南市) 춘궁동(春宮洞) 일대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3~234쪽).닫기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황무현(黃武縣)007007 정덕본에서는 “黃△縣”으로 한 글자의 판독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글자를 “文武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武”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를 인정하여 교감 주해한다.닫기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남천현(南川縣)009009 다른 기록에서는 남매(南買)라고도 나온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4쪽).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위치는 경기도(京畿道) 이천시(利川市) 부발읍(夫鉢邑) 마암리(馬岩里)에 있는 효양산성(孝養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다(정영호, 「신라 남천정지의 연구」, 《변태섭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 1985, 55~69쪽).닫기이었는데 신라(新羅)010010 기원전 57년 ~955년까지 한반도 경주(慶州)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혁거세(赫居世)가 왕이 되면서 경북 경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세워졌다. 당(唐)과 연합하여 무열왕(武烈王) 7년(66)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면서 백제(百濟)가 멸망했고 이어서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당(唐)의 군대를 문무왕 16년(676)에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골품제(骨品制)를 중심으로 한 고유의 신분제도를 끝까지 유지하다가 진성왕(眞誠王) 3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난 이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자립하면서 주요 세력이 상실당하고 점차 쇠약해져서 경순왕(敬順王) 9년(955)에 고려(高麗)에게 항복한다(신라본기 및 역주 김동윤).닫기가 이를 병합하였다. 진흥왕(眞興王)011011 신라 24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본명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金氏)이다. 비(妃)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 7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에는 왕태후(王太后)인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하였다. 진흥왕은 즉위 후부터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는 삭발한 후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했다. 왕비 역시 출가하였다(신라본기, 제4 진흥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이 주(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이천현(利川縣)013013 현재의 경기도(京畿道) 이천시(利川市)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4쪽).닫기이다.
거서현014014 정덕본에서는 “巨△縣”으로 한 글자의 판독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삼국사절요》에서는 이곳을 “巨黍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인정하여 교감 주해한다.닫기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구성현(駒城縣)016016 일명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5쪽).닫기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용구현(龍駒縣)018018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용인시(龍仁市)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5쪽).닫기이다.

註 001
신라본기에서는 진흥왕 및 진평왕(眞平王)이 설치한 주(州)가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기록되어 있지만,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한성군주(漢城軍主)의 이름이 보이므로, 현재 하남시 및 광주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0쪽 및 232~233쪽).
註 002
기원전 37년 ~ 668년까지 한반도 북쪽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낳은 주몽(朱夢)이 나라를 세웠다. 건국 초기부터 중국(中國) 및 북방 이민족들과의 잦은 마찰을 통해 성장하여 요동 일대를 영역으로 두었다. 중간에 백제(百濟)와의 마찰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기도 했지만,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면서 한반도 남부 일대로 국력을 집중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공략하여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475). 고구려의 영역 확장은 중국 영토 내에 서로 다른 왕조들의 대립을 통해 가능했으며, 실제로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왕조의 침입을 계속 받게 되었다. 계속된 침입의 와중에 고구려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이 당(唐)에 귀순하면서 보장왕(寶藏王) 27년(668)에 수도 평양성(平壤城)이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된다(고구려본기 및 역주 김동윤).
註 003
백제본기에서 온조왕(溫祚王) 13년(기원전 6)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를 옮긴 지역이자,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옮긴 수도 한산(漢山)이 이곳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3쪽).
註 004
기원전 57년 ~955년까지 한반도 경주(慶州)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혁거세(赫居世)가 왕이 되면서 경북 경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세워졌다. 당(唐)과 연합하여 무열왕(武烈王) 7년(66)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면서 백제(百濟)가 멸망했고 이어서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당(唐)의 군대를 문무왕 16년(676)에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골품제(骨品制)를 중심으로 한 고유의 신분제도를 끝까지 유지하다가 진성왕(眞誠王) 3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난 이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자립하면서 주요 세력이 상실당하고 점차 쇠약해져서 경순왕(敬順王) 9년(955)에 고려(高麗)에게 항복한다(신라본기 및 역주 김동윤).
註 005
신라 35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명은 헌영(憲英).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로 경덕왕(景德王)은 효성왕(孝成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비(妃)는 이찬(伊飡) 순정(順貞)의 딸이다. 경덕왕은 귀족 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회복을 목표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펼쳐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의 고유 지명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신라본기, 제9 경덕왕 및 역주 표영관).
註 006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하남시(河南市) 춘궁동(春宮洞) 일대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3~234쪽).
註 007
정덕본에서는 “黃△縣”으로 한 글자의 판독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글자를 “文武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武”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를 인정하여 교감 주해한다.
註 009
다른 기록에서는 남매(南買)라고도 나온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4쪽).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위치는 경기도(京畿道) 이천시(利川市) 부발읍(夫鉢邑) 마암리(馬岩里)에 있는 효양산성(孝養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다(정영호, 「신라 남천정지의 연구」, 《변태섭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 1985, 55~69쪽).
註 010
기원전 57년 ~955년까지 한반도 경주(慶州) 일대를 중심으로 존속한 국가. 혁거세(赫居世)가 왕이 되면서 경북 경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세워졌다. 당(唐)과 연합하여 무열왕(武烈王) 7년(66)에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면서 백제(百濟)가 멸망했고 이어서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당(唐)의 군대를 문무왕 16년(676)에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골품제(骨品制)를 중심으로 한 고유의 신분제도를 끝까지 유지하다가 진성왕(眞誠王) 3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난 이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자립하면서 주요 세력이 상실당하고 점차 쇠약해져서 경순왕(敬順王) 9년(955)에 고려(高麗)에게 항복한다(신라본기 및 역주 김동윤).
註 011
신라 24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본명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金氏)이다. 비(妃)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 7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에는 왕태후(王太后)인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하였다. 진흥왕은 즉위 후부터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는 삭발한 후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했다. 왕비 역시 출가하였다(신라본기, 제4 진흥왕 및 역주 표영관).
註 013
현재의 경기도(京畿道) 이천시(利川市)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4쪽).
註 014
정덕본에서는 “巨△縣”으로 한 글자의 판독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삼국사절요》에서는 이곳을 “巨黍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인정하여 교감 주해한다.
註 016
일명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5쪽).
註 018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용인시(龍仁市)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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